건축의 신 29화
베를린 & 마이어(2)
이 독일인 같지 않은 독일인은 축구광이기도 하지만, 건축광이다. 그리고 한 교수과다.
다른 점이 있다면-여기서는 또 독일인답네. 평범하지 않아!-상상력이 풍부한데, 아주 정확하다는 것.
한 교수는 얼렁뚱땅 시작해도 마무리를 잘하고, 마이어는 처음부터 마무리를 생각하고 상상력을 퍼뜨린다는 것.
서로 앞뒤가 바뀌었는데도 통하는 것은 비슷했고 건축 쪽의 흥미도 비슷했다. 묘한 인종들끼리 잘 어울린다.
그래서인지 쿵짝이 기가 막히게 잘 맞는다. 한 교수가 자랑을 시작했다.
“마이어. 당신, 양동마을 가봤어?”
그러더니 품에서 사진을 뒤적뒤적 꺼낸다. 저건 또 언제 가져온 거냐? 챙기는 것도 못 봤는데.
지금 보니 자랑하려고 가져온 거네. 저 마이어란 인간한테! 어쩐지 양동마을에서 미친 듯이 찍어대더라.
그리고 대부분의 사진에는 한 교수가 V 포즈를 잡고 있다. 으스대면서. 그 사진의 관객은 마이어였던 모양이다.
마이어가 양동마을을 알 리가 없다. 하지만 사진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진다.
“진짜 이런 집이 있어? 오! 완전 콤팩트한데. 여기서 사람이 산다고?”
이어지는 의문문을 한 교수가 거드름을 피우며 대답한다.
“그러엄. 내가 직접 보고 왔어. 그 풍수지리학적으로 좋은 땅에다가. 그…….”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손가락으로 한문을 그렸다. 그리는 수준이다. 알아보는 내가 용치!
“성훈, 이게 무슨 글자지?”
“물(勿)”
뭐처럼 말해도 기가 막히게 알아들으니, 한 교수의 어깨가 쑥쑥 올라간다. 지식인들의 과시욕이란 앎에서 시작된다.
“그래. ‘물’자로 만들어서 말이야. 어쩌고저쩌고… 일제강점기가 어쩌고저쩌고…….”
한 교수는 열심히 썰을 풀고 있다. 양동마을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자랑한다.
중간중간에 사실과 다른 것도 더러 있다. 아직은 전문가가 아니니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겠지. 굳이 지적해 주지 않는다. 지금은 알려줘도 모르고 몰라도 재밌다. 그리고 신기하다.
저 둘이 한국의 전통 건축을 대하는 방식이다. 그들에게는 판타지였다. 한 교수에겐 좀 더 구체화된 판타지고, 마이어에겐 침을 질질 흘릴 새로운 판타지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지금도 침을 질질 흘리면서 보고 있다. 당장 내일이라도 갈 것처럼 말이다.
‘잘 봐둬, 이 양반들아. 그게 2010년에 유네스코에 등재돼! 그만큼 유서 깊은 곳이야.’
안동 하회마을도 같이 등재가 된다. 그러나 하회마을은 알려진 만큼 아는 지식이 있지만, 양동마을은 생짜로 환상이었다.
남들보다 먼저 알게 된다는 것은 그만큼 앞서 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들처럼 좋아하는 이 둘을 보면서 나는 흐뭇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마치 아들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이랄까. 참, 내가 나이가 있기는 하구만.
그들의 대화에 주섬주섬 끼어들면서 함께했다.
참! 마이어. 마이어 하다 보니까, 생각이 났다.
풀 네임이 ‘리건 마이어’였다. 이 양반도 한 10년 뒤에는 ‘대가’라는 소리를 듣는다.
동양의 사상을 재해석한 설계로, 독일의 혁신적인 건축을 주도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양반도 일각에서는 천재라고 소문이 났지만, 그 두각을 드러내는 것은 베를린 박람회 이후라고 알고 있다. 이전 삶의 이 시절에는 별로 해외에 관심이 없었고, 솔직히 건축 동향에 대해서도 무관심했었다.
베를린 박람회 이후라는 것도, 바로 직후인지 아니면 한참 후인지도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저 친구들끼리 농담을 하면서 ‘이건 말이여. 리건 마이어! 비슷하지 않냐?’ 하면서 웃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이때의 나의 관심은 여자와 술이었었다.
‘참, 끼리끼리 노는구만. 이런 사람들이 진짜 천재지. 저렇게 즐기면서 좋아하는데 어떻게 따라가.’
마음 한쪽 구석에는 씁쓸한 마음이랄까. 나는 되돌아와서도 이들을 못 따라가는 것인가? 하는 마음 말이다.
하지만 한구석으로 밀어버렸다. 나는 이들과 다른 강점이 있을 것이다. 애초에 기죽을 필요 없다. 이런 천재가 있으면 저런 천재도 있고, 태어나는 천재가 있으면 만들어지는 천재도 있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 보이는 것이 있다. 그게 뭐냐?
유럽과 미국 쪽의 건축인들이 한국의 전통 건축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가!
그럼 하수를 벗어나지 못하는 거다. 나는 저 서양의 지식인들에게 뭘 팔아야 할지가 보였다.
‘저들이 궁금해 하는 것을 조금씩 조금씩 감질나게 풀어주면 되는 것이지.’
가격은 공급과 수요가 결정한다. 다이아몬드가 왜 비싼가? 그만한 값어치를 하기 때문인가?
애기 조막만 한 수백억짜리 다이아몬드가 수억 명의 아프리카 빈민을 한순간이라도 배부르게 할 수 있는가?
이유는 단지 하나! 귀하기 때문이다. 허영심이라는 수요에 비해 공급이 터무니없이 적기 때문이다.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채취되는 양이 적기 때문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부러 높은 가격대를 형성하게끔 조절하는 사람, 혹은 조직이 있다.
열 개를 팔아서 천억을 남기는 것과 백 개를 팔아서 천억을 남기는 것.
어느 쪽이 이득일까?
나는 한국인이고 전통에 대해 그들보다 잘 알기 때문에 공급자가 될 기본 자격을 갖췄다.
사용하는 사람이 만드는 사람보다 제품의 기능을 더 잘 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단적인 예가 한 교수다.
전통 건축과 사찰을 갈 때 한 교수의 자세는 학생이다. 어떻게든 나에게서 한 단어라도 더 뽑아내려고 눈에 불을 켠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나를 동생이나 제자 대하듯 무시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런 적도 없었지만.
이들은 내 미래의 고객들이다. 아니, 대한민국의 미래 고객들이다.
‘전통을 감히 팔 거리로 생각하다니!’ 하면서 입에 거품을 물 건축인 들과 전통 관련자들도 있겠지.
그들의 아집을 깨뜨려야 한다. 그래야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는다.
세계인들이 다 알고 아끼는 문화재가 있는 나라에서 전쟁을 한다? 미친 소리다. 수많은 나라에게 돌 맞을 소리다. 자국의 작은 이득을 위해서 인류의 문화유산을 훼손하는 것은 절대로 용서를 할 수 없는 행위가 될 것이다.
미국의 오바마가 한국의 절과 석탑이라면 환장을 하게 좋아한다고 하자. 그런데 한국에서 전쟁이 벌어진다?
감히… 나는 상상할 수 없다. 내가 오바마면… 절대! 절대로 좌시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지금은 IMF가 터진 지 일 년도 안 지났다. 나라를 팔아서라도 국민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데, 무슨!
‘지금 나는 저들의 열정 가득한 대화를 돈으로 보고 있다. 난 너무 속물인 건가?’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상품이 된다.
잘 팔리고 못 팔리고는 얼마나 잘 포장하고 기대감을 높여서 고객을 즐겁게 하느냐의 차이가 결정할 뿐이다.
“킴, 이것 좀 설명해 봐봐!”
마이어였다. 한 교수가 바로 맞받아친다.
“내가 한 말이 맞다니까!”
“한! 이 구라꾼아. 아까도 킴 말을 들어보니까, 삼분지 일은 네놈 상상이더구만. 내가 폰(Pawn)으로 보이냐. 엉?”
‘폰’은 체스의 ‘졸(卒)’이다. 내가 졸로 보이냐는 말이지. 독일인치고는 언어구사가 상당히 화려한 사람이었다.
뭐. ‘구라꾼’이라는 말은 독일어에서 입에 담지 못할 강력한 거짓말쟁이라는 의미라 적당히 의역을 했다.
그 정도로 흥이 있고, 말이 거친 독일인이다.
둘의 대화는 물 흐르듯 흘러간다. 건축은 종합예술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동서양을 망라한 전통과 미술에서 조각을 거쳐 건축 구조와 인테리어, 가구를 지나 예술 전반을 아우른다. 아는 것이 많은 만큼 이견도 많다.
둘의 대화-저 의견 충돌과 투닥거림을 대화라고 한다면 말이다-는 새벽 4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독일로 오기 전에 한 교수가 말했었다.
“내가 독일 구경시켜 줄게. 나 거기 ‘통’이야!”
둘을 업다시피 객실로 데려와 눕히고는 나도 기절하듯 엎어졌다.
“텃네. 텄어! 구경은 무슨…….”
아! 정말 피곤한 하루였다. 지옥의 12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