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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신-27화 (27/427)

건축의 신 27화

한 걸음 차이

그동안 그림의 기초를 연습했다. 정윤을 만난 지도 석 달이 넘었다.

그 사건 이후, 잠시 그녀가 어색했지만 아무 일 없이 넘어갔다.

알다시피 나는 연습광이다. 그리고 반복광이다. 기초를 신물이 나게 반복 연습했다.

석고 데생만 100개를 넘어섰다. 짬짬이 풍경화와 세부 묘사도 연습했다. 십만 번의 법칙은 무시했다. 꼬부랑 할배가 되도록 연습만 할 수는 없으니까. 나는 융통성이 풍부한 40대 중년이었다.

나는 그리고 싶은 것이 있었다. 얼마 전 ‘타이타닉’이 개봉했었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흥행작.

남자들은 케이트 윈슬렛의 미모에 반했고, 여자들은 디카프리오의 열병을 앓았다.

거의 20년 만에 다시 보는 나는 아름다운 영상에 빠졌다. 디카프리오가 윈슬렛의 몸을 그려주던 방.

붉은색 나무에 신주를 가공해서 박은 판넬들로 화려하게 장식된 그 방!

타이타닉의 일등 객실은 디카프리오가 묵던 창고 같은 방과는 비교도 안 되게 화려하고 멋있었다.

케이트 윈슬렛의 몸도 그 소파와 배경이 받쳐줬기에 더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을까?

그걸 계기로 나는 서양식 귀족풍의 인테리어를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내게는 도전이었다.

도서관을 뒤지다가, 무시무시하게 귀족 냄새가 나는 방들만 모아놓은 유럽 저택 사진집을 발견했다. 슥슥 페이지를 넘기면서 보고 있는데, 굉장히 화려한 응접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느낌이 딱 왔다.

‘난 이걸 그리기 위해서 그림을 배운 거야.’

실패할 수도 있었고,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몰랐다. 하지만 그 사진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Catch me, if you can!’

약 올리듯 도도한 모습에 넋을 잃었다. 그리고 웃어줬다. 까짓것 해보지, 뭐. 말리는 사람도 없는데.

정윤은 제자들의 그림을 정리하고 있었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내 자리에 앉았다.

밤 11시. 아무도 없었다. 조용하니 집중하기 좋은 밤이었다.

연필을 든 채 눈을 감았다. 사진에 있던 귀족의 응접실이 내 머리로 들어왔다.

‘블록으로 구분된 사각 돔의 천정, 그 블록마다 천정화가 그려져 있었고.’

그림들이 하나하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두운 느낌의 풍경화들.

탁자 옆에 근엄하게 찻잔을 들고 있는 귀부인, 활을 들고 사슴을 잡는 모습, 아마 신화의 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각각의 블록 테두리는 화려하게 양각되어 금박이 입혀져 있었다.

‘그 아래로 천정 몰딩이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지.’

그 또한 금이었다. 얼마나 위세가 대단했기에 모두 금으로 장식할 수 있었을까?

각 벽체는 몰딩으로 파티션을 나누고 아름다운 문양의 실크로 마감이 되었다. 저 시대에 실크 벽지는 없었을 테니, 한 땀 한 땀 수놓은 것이리라. 화려함의 극치였다.

잠시 방의 풍경을 구경하던 나는, 그곳에 가 있는 듯했다. 공간의 실재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 방을 거닐며 공기를 들이켰다. 오래된 목재의 은은한 향, 큰 창을 통해 들어오는 눈부신 햇살, 푹신하게 깔린 카펫, 실크의 부드러움, 앤틱 가구의 나뭇결.

“이제 그릴 수 있겠어.”

손을 움직였다. 투시도의 중심선을 미미하게 그었다. 나중에는 다른 선들에 가려 보이지 않을 것이다. 가려질수록 그 존재는 흐려지지만, 흐려져야만 임무가 끝나는 히든 라인!

천정과 벽체를 구성하는 블록들, 그것들의 이음새를 부드럽게 하고 거친 구조물을 가려주는 몰딩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실크 벽지와 양탄자가 자리를 잡고, 가구들이 배치되었다. 보일 듯 말 듯한 옅은 선으로 여백을 채워 나간다.

마지막으로는 빈 공간에 떡하니 존재감을 과시하는 샹들리에.

“좋아. 배치가 끝났군.”

세부적인 디테일은 가장 전면의 샹들리에부터 시작되었다. 천정에서 내려온 하나의 라인!

그곳에서 6개의 줄기가 뻗어 나오고 아래로 치달아 다시 하늘로 고개를 쳐든다. 꽃받침, 꽃송이, 개화.

피어오른 꽃에서 하얀 밀랍이 솟아오르고, ‘화륵’ 초에 불이 붙었다. 가지의 지나온 곳에 수정방울들이 송골송골 맺혔다. 수백 개의 방울은 스펙트럼이 되어 무지개를 만든다. 눈부시다.

“흠, 똑같으면 재미없지.”

***

정윤이 말했었다.

모방과 창조는 한 걸음 차이라고.

정윤은 내 옆에 서 있었다.

“똑같은 선에 서 있죠. 모방이에요. 이제 겨우 따라잡은 거죠. 큰 가치를 둘 수 없어요.”

그렇다. 남이 개척해 놓은 길을 편하게 따라가는 것을 누가 못 할까!

나를 옆으로 바라보며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녀는 나보다 딱 한 걸음 앞에 서 있다. 뒤를 돌아 나를 보았다.

“이 한 걸음이 창조의 시작이죠. 저는 건축을 모르지만, 당신의 노력이 뭘 위한 건지는 알아요. 당신은 창조자가 되고 싶은 거예요. 건축의 신!이랄까. 누구도 내딛어 보지 못한, 그 한 걸음을 내딛는 자!”

참 거창하게도 말한다. 그러나 기분 좋은 말이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그녀의 말에는 격려와 여유가 있다. 원래 그런 여자다. 나이에서 나오는 것과는 다른 분위기가 있다.

창조라!

이전의 삶에서는 감히 엄두도 낼 수 없었던 생각이다.

이런 말을 해주는데도, 나는 고맙다는 말도, 그렇게 거창한 목표는 아니라는 겸양도 하지 않았다.

그냥 웃었다.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편안한 미소였던 것 같다.

그게 정말 내가 바라는 것일까? 과연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모방에서 창조로 나아가는 그 한 걸음 앞에서 대부분은 좌절한다. 딱 한 걸음!

‘알 게 뭐야! 가는 데까지 가보는 거지. 적어도 못 해봐서 후회하지는 않겠지.’

그런 후회는 한 번으로 충분했다.

***

샹들리에의 밋밋한 줄기에 두 마리 실뱀을 둘렀다. 백금 색으로 빛난다. 실처럼 가늘어서 쉽게 눈에 띄지 않으나, 자각하는 순간 이미 눈은 사로잡힌다.

굵직한 뿌리는 생명의 출발점. 꿈틀거리는 근육처럼 매끈하면서도 강력하게.

“뭐, 직접 만들 것도 아닌데, 화려하면 어때.”

내 목적은 귀족의 응접실보다 더 화려하게 만드는 것, 시선을 사로잡는 것, 내 손 끝에서 나오는 그림에게 사진 속 응접실이 고개를 숙이는 것.

‘감히 어디서… 머리를 조아리거라.’ 내 그림이 호통치는 소리가 들렸다.

“크크크.”

미친놈처럼 혼자 환상을 그려간다. 어떤 곳은 강하게 또 어떤 곳은 연하게. 종이 위에서 연필이 신명나게 춤춘다.

잔잔한 종이 위, 목탄 가루 한 방울!

톡!

수면이 일렁이듯 파도가 퍼져 나간다. 물결을 따라 흐릿함은 밀려나고, 숨어 있던 라인이 드러난다.

수천, 수만의 터치로 새롭게 완성된 나만의 응접실!

손대야 할 곳이 점점 사라져 갔다. 본능처럼 구별된다. 채워야 할 곳과 비워야 할 곳이.

더 이상 손댈 곳은 사라지고, 마지막 터치를 했다. 의자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났다. 팔짱을 끼고, 오른손으로 턱을 긁었다. 예술가의 지정 포즈 아닌가!

뿌듯한 마음으로 그림을 감상했다. 나르시스트라고 해도 좋다. 뿌듯한 걸 어쩌라고!

미소 지었다. 만족스러웠다. 보여줄 사람은 없지만 이 정도면 수준급이지 않은가!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하지만 내 나이 마흔셋. 춤추기엔 좀.

히딩크 포즈로 팔을 들었다가 힘차게 내렸다. 함성을 지르면서.

“예에!”

발도 동동 구르고 싶었지만 나이가… 쩝!

맹세코 누군가에게 보이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쉩!

뒤에서 소리가 들렸을 때,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덜컥!

생각만 해도 오글거린다. 나이 사십 넘은 놈이 그런 오두방정이라니!

짝짝짝짝!

“와우! 정말 아름다운 응접실이에요!”

내 스케치북에 얼굴을 갖다 대고 꼼꼼히 살피더니, 내 얼굴을 빤히 보며 말했다. 나는 석고상처럼 굳어서 눈만 데굴거리고 있었다.

“당신은 정말 적응이 빠르네요. 뭐 그만큼 노력을 했으니, 당연한 결과겠지만.”

내 옆에 서서 아까의 나와 같은 포즈로 그림을 감상했다. 혹시 놀리는 건가?

그녀의 손이 그림을 따라 움직인다.

“가구터치에서는 라인이 잘 살아 있고, 벽체에서는 몰딩 라인이 두드러져요.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백미는 샹들리에네요. 디테일이 정밀해요. 그리고 꽃의 수술처럼 말려 올라간 곳에서는 속도감까지 느껴지네요. 정말 대단한 발전이에요.”

그녀는 진지한 목소리로 내 그림에 대한 감평을 했지만, 내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리고 뭐! 제발 봤다고만 말하지 마!

“40대 아저씨 같았지만 귀여운 포즈였어요. 풋!”

눈치 없이 쾌활한 그녀는 마지막의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너무 어색하게 굳어 있는 내 모습에 참고 있었던 웃음이 터져 나온 것 같다.

몰아지경에 빠져 있던 내 잘못이다.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돌아보지도 않고 그녀에게 물었다. 사실 지금 당장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어디서부터…….”

제발 그것만 봤다고 말해주기를…….

“눈 감았을 때?”

분명히 정윤은 실눈을 뜨고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것이다. 안 봐도 훤하다.

그럼 내가 눈감고 이것저것 만지고 쓰다듬는, 일인 팬터마임을 다 봤다는 거 아냐! 생쑈를 한다고 생각했겠네.

“너무 진지해 보여서 몰입을 깨고 싶지 않았어요. 미안해요.”

‘미안하면 끝까지 모른 척했어야지, 이것아!’

“하지만 도저히,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익숙할 사람이 있기는 할까?-아직 돌아서지 못했다.

‘아! 쪽팔려 죽을 것 같아.’

죄지은 것도 아닌데, 지금의 쪽팔림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혼자 마임하고, 홀로 웃고, 외롭게 함성 지르며, 거기다 포즈까지. 이건 뭐!

해결책을 찾았다. 정윤에게 말했다.

“저 화장실 좀…….”

그리고 좁은 미술실을 정윤에게서 등 돌린 채 빙 돌아서 문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낼 봬요. 풋!”

젠장, 딱 걸렸다. 그대로 집으로 도망쳤다. 쉩! 쉩! 쉩! 아! 쪽팔려!

다음 날.

띠리리리!

정윤이었다. 갈까 말까 망설이던 차였다.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 과거는 무의미하다.’를 외치며, 마음속의 심마를 몰아냈다.

‘어차피 스케치북 가지러 갈 거잖아. 그건 걸작이라고. 회수해야지.’

갖은 핑계로 내 발길을 미술 학원으로 몰던 중이었다.

‘그래! 쪽팔린다고 죽은 사람 못 봤어.’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전화를 받았다.

“네, 선생님!”

-저 커피 먹고 싶어요. 라떼.

“커피점에 들러서 카페 라떼를 사오라고요?”

이 여자가 내가 심부름꾼으로 보이나! 커피전문점까지 30분이나 걸린다고!

-저 어제 뭘 보긴 본 거 같은데 기억이 잘… 뭐였…….

“OK. 거기까지. 아무것도 못 보신 겁니다.”

-네!

수화기 건너편의 그녀가 웃었다.

“콜! 하늘땅 별 땅!”

유치뽕짝한 대사가 절로 나왔다.

“더블로 사갈까요? 아뇨. 아예 두 개로 사갈게요.”

이런 배려심 있는 아가씨 같으니라고!

이미 보인 거 그게 무슨 소용이냐고? 내 말이. 이미 보인거야 어쩔 수 없는 과거고. 중요한 건 그걸로 놀리는 게 두려운 거지. 나 그렇게 소심한 사람 아니라고. 약속까지 했으니 놀리지는 않겠지.

‘어차피 갈 생각이었어. 하루라도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손바닥에 비늘이 돋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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