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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신-22화 (22/427)

건축의 신 22화

도면을 그리다(3)

“아는 사람만 아는 구조와 공간의 아름다움으로는 의외성을 줄 수 없지!”

확연하게 차이를 두지 않으면 누군가는 말로 끼어든다. 말이란 살짝만 비틀면 코걸이도 귀걸이도 되는 것이다.

“‘바보가 와도 이게 더 멋있어요’라는 말이 나와야 하지 않겠어?”

결국 말이 끼어들 여지를 안 주면 되는 것이다. 혼잣말을 하며 투지를 불태웠다.

이미 다른 건축사사무소에서도 CAD로 도면 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아직은 CAD가 대중화되지 않았다고 해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옳은 판단이다.

그러나 캐드의 기능에 대해서 나보다 더 많이 알리는 없었다. 1년 경력과 20년 경력을 비교하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누가 캐드를 잘 다루냐를 경쟁하는 것이 아니다. A4 위에 새겨진 선들은 공평하다.

‘스트레치’를 사용하든 하나하나 ‘무브’로 옮겨서 이어붙이든 종이에 새겨진 결과는 똑같다는 말이다.

‘말이나 다른 계략이 끼어들 여지를 두지 않는다.’

캐드가 2000 버전이 활성화되고 윈도우 기반 인터페이스를 갖추게 되면서 오토 캐드는 건축 전반에 뿌려지게 된다. 그때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건축 관련자들의 필수 요소가 되어버린다. 세상이 바뀌는 것이다.

나는 그 바뀌는 세상의 것들을 사용할 수 있다. 내 전문 분야의 기술이라면 절대로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유행과 지식을 선도하는 학교에서 그들보다 못하다면 어떻게 명함을 내밀 수 있을 것인가?

전문가가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하는 변명은 애들이나 하는 짓이다. 무슨 수를 쓰든 그들에게 이겨야 했고, 나는 그럴 자신이 있었다.

마감 날이었다. 드디어 승부의 시간이 왔다.

“교수님, 제가 직접 갖다 주고 올게요. 그때 그 선배도 한 번 만나보구요.”

“그래, 술 많이 마시지 말고.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고.”

한 교수는 흔쾌히 허락했다.

쓸데없는 말이란 아마도 동문이라고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 양반! 이상한 데서 자존심을 세우네. 쩝.’

현재중공업 앞에서 학과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선영이가 받았다.

“선영아, 내가 하나 첨가할 게 있는데, 교수님께 여쭤 봐. 그래도 되냐고.”

잠시 후, 선영이가 답했다.

-공동 설계자니까. 알아서 하라시는데요? 뭐예요?

“그런 게 있어. 그럼 내일 보자. 바로 들어간다.”

통화를 마치고, 서류철 안으로 CD 한 장을 집어넣었다.

서류를 제출하고 그 선배를 만났다. 박중완이라고 했다. 선배는 기숙사건축을 담당하는 기획실 장 주임도 불렀다.

바로 회사 앞의 호프집으로 향했다.

박 선배가 호쾌하게 말했다.

“얘기 들었다. 독일어가 유창하다면서. 와, 언제 그렇게 공부했냐?”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는 말로 어물쩍 넘겼다.

오랜만에 후배에 대한 칭찬을 들어서 기분이 좋았던 모양이다.

“남자는 말이야. 술로 친구가 된다. 술 마셔 보면 다 알아.”

한참 어린 후배 앞에서 호기를 부렸다. 서른밖에 안 된 친구가 술을 상당히 좋아했다.

또한 술에 대한 자신감도 있어 보였다. 좋은 현상이다.

현장에서 일을 하면서 술을 못 하면 어떡하는가? 한국 사회에서 사람과 엮인 일은 술로 풀면 편하다.

“건설 현장에서 일하려면 말이야. 남자가 호탕해야 해. 성훈아, 한 잔 받아!”

맥주잔에 두꺼비를 가득 따랐다. 그리고 내 앞으로 슥 밀었다.

‘어쭈! 겁주는 거냐?’

복잡한 의미의 웃음을 지었다. 너무 좋기도 하고 살짝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렇지. 나 스물셋이지!’

내 실체를 알았다면 이런 겁대가리 상실한 행동을 감히 못했을 텐데. 선배야! 명복을 빌어주마.

“하늘 같은 선배님이 주시는 술을 어찌 거부하겠습니까!”

벌컥 벌컥 물마시듯 원샷을 하고, 선배에게 두 손으로 잔을 바쳤다.

“크! 후배가 한 잔 따르겠습니다. 선배님! 원샷?”

그리고 활짝 미소 지었다. 15년이 넘게 해왔던 영업용 미소를.

흠칫하던 선배 녀석이 따라 미소 지었다. ‘감히 후배 놈이 술 배틀을 걸어?’라는 눈빛이었다. 그는 남자였다.

“크으! 딸꾹!”

그의 빈 잔을 반아 장 주임에게도 잔을 들이밀자, 질리는지 두 손을 휘휘 저었다. 그리고 소주잔을 흔들었다.

“나는 이 잔으로 먹을게요. 괜찮죠?”

선배도 아닌데, 마구 들이밀기가 애매했다. 그리고 저렇게 예의를 차리는데야.

그렇게 둘은 술 배틀이 붙었고, 한 시간도 되기 전에 두꺼비 열 마리를 잡았다.

그리고 한 사람이 전사했다. 넋이라도 있고 없고!

쿵.

장 주임이 질린다는 듯 웃었다. 그도 우리 따라 홀짝 하면서 취해 있었다.

“욱, 자네 술 진짜 센데. 옆에서 보는데도 쏠린다. 욱.”

내 앞에 머리를 숙인 선배를 보며 웃었다.

‘덤빌 걸 덤벼야지. 15년 접대 경력을 뭐로 보고. 적어도 폭탄주 30잔은 돼야지.’

“장 주임님, 저 학교로 들어가 봐야 되는데. 괜찮겠습니까?”

그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래, 그래. 박 대리님은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럼, 설계안 보시고 연락 주십시오. 우리 선배님 통해서 연락 주시면 됩니다. 그럼.”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 포장마차를 나왔다. 저녁 8시였다.

“어, 기분 좋다.”

제대 후 처음 마시는 술이었다. 선배에게 얻어먹는 술이라 기분이 좋았다.

이겨서 더 기분이 좋았다. 선배고 나발이고. 애송이에게 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흥.

최종 발표일은 보름 후였다. 할 수 있는 것을 했으니, 기다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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