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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신-18화 (18/427)

건축의 신 18화

입주자 조사(1)

한 교수는 신이 나서 구상 중이다.

그리고 문득 나는 이상한 점을 느꼈다. 왜?

‘기숙사를 만든다? 현재중공업 바로 앞에 만세대가 있는데?’

나중에 없어지지만 현재중공업 앞쪽의 전하동은 현재 왕국이었다.

현재그룹 왕 회장이 사원들의 복지를 위해서 전하동 언덕배기에 집들을 줄줄이 지었다.

일만 세대나 된다고 하여 동네 이름이 ‘만세대’였다.

그런데 잘 곳이 없어서 기숙사를 짓는다? 개가 들어도 웃을 소리였다.

“교수님, 저 중공업에 좀 다녀올게요.”

“그래라.”

‘그래라? 윽, 저 인간이!’

보통은 왜 가느냐고 묻지 않나? 당연히 물어볼 것이라 생각했고, 누가 살 집인지 알아볼 거다. 라는 대답까지 준비해 두었다.

하지만 한 교수는 지금 무지 바빴다. 등받이 의자에 누운 듯이 기댄 채, 정신은 이미 안드로메다로 갔다.

‘상상의 날개를 펴셔. 나이 든 내가 고생 좀 하지. 어떡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교수실을 나왔다.

처음에는 학과장이나 다른 교수를 찾아가 볼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이내 어리석은 짓이라 생각했다.

좋은 소리 듣기는 어려울 거고, 괜히 어린놈이 나댄다는 소리나 들을 것이다. 이십 년 전에 겪어 봐서 안다.

현재중공업 기획실을 찾았다. 실장을 만나고 싶었지만, 그 자리가 어린 학생을 만나줄 정도로 한가하지 않았다.

장연철이라는 주임을 만났다. 바로 결론에 들어갔다. 무슨 큰일이라고 빙빙 돌려 말을 할까!

“장 주임님, 기숙사 건 때문에 왔습니다. 그거 사용자가 누굽니까?”

그는 허둥거렸다. 딱 봐도 어제 주임을 단 친구였다. 척 봐도 어리바리. 대기업이라는 현재에 들어왔으면 머리가 좋을 텐데. 낙하산인가?

“음, 보자. 매뉴얼 라흠, 필립 멀트쌔커, 퍼 메우이어…….”

퍼 메우긴 뭘 퍼 메우라고! 아주 독특한 영어 발음을 더듬더듬 구사하며 명단의 이름을 읊었다.

‘이 친구야. 내가 그 사람들 이름이 궁금해서 왔겠어. 출세하긴 다 틀렸네.’

“잠깐 제가 볼 수 있을까요?”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틈을 타서 명단을 낚아채듯 넘겨받았다.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계속 듣고 있으면 내가 숨넘어갈 것 같아서 말이지.’

사회 초년병은 다 어리바리하다. 거의 대부분 경직되어 있다. 그것도 나 같은 외부인이 찾아오면 더하다.

그래도 현재 간판을 달았는데 새파란 대학생 앞에서 모르는 척도 할 수도 없고… 고생한다. 쯧, 먹고살기 힘들지!

명단을 보니 그가 왜 더듬거렸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럴 수밖에! 영어가 아니었다. 쓰여진 건 알파벳이지만.

“마누엘 람, 필립 메르테자커, 페어 모이어. 흠… 전부 독일 사람들이네요?”

어떻게 그걸 알아? 라는 표정에 명단을 보여주며, 아래쪽을 가리켰다.

독일산 수입 가구를 판매한 적이 있었고, 몇몇 독일 업체와 다이렉트로 거래를 했었다.

독일어 모르면 당연히 할 수 없다. 죽기 살기로 공부를 했었다. 더듬더듬해도, 말하고 알아듣는 수준이었다. 처음에는 그걸로도 충분했다.

해외 영업? 특별할 것 같은가?

제품명 알고, 단가 알면 된다. 그리고 들어오는 날짜만 말하면 알아서 맞춰준다. 환율까지 따지면 칭찬받는다.

나는 칭찬받을 마음이 없었으니, 신경 쓰지 않았다. 안 해도 모르는 바보 고참을 둔 죄로 머리는 편했다.

고로 단어 몇 개 알고, 인사성 바르고, 숫자만 제대로 알아도 외국인 상대는 문제없다. 문제는 자신감이지.

그쪽에서 볼 때, 내가 있는 회사는 고객이었으니까! 말 못 해도 결제만 잘하면 ‘VVIP’였다.

내가 물건을 파는 입장이라면 이건 심각한 문제가 되겠지만, 나는 돈을 내는 입장이었다.

독일인들은 내 생각보다 친절했다. 최소한 전생의 뚱땡이 부장보다는 백배는 친절했다.

원어민처럼 말하지 못했지만, 회사는 나를 자르지 못했다. 나 빼고는 모두 벙어리였거든.

“독일에서 온 기술자들인가 보죠?”

장 주임은 고개를 끄덕였다. 독일에서 노동자를 끌고 오진 않았을 테니, 충분히 가능한 추론이었다.

독일하면 자동차의 메카이고, 그들의 선진 기술을 배우기 위해 무던히 기술자들을 초빙했었다.

독일 사람들 생각보다 까탈스럽다. 하지만 속정이 깊은 면이 있어서 한 번 관계를 맺어놓으면 오래 간다.

오히려 내게는 강점이 될 수 있었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외국인이 자기 나라말 하는 걸 언제 듣겠어?’

그것만 해도 점수는 먹고 들어간다. 물론 만나봐야 알겠지만 말이다.

“이 사람들 좀 만났으면 하는데, 안내 좀 받을 수 있을까요?”

당연히 받을 수 있다.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거든.

‘그냥 주는 대로 설계나 할 것이지. 웬 설레발이냐!’부터 시작해서 ‘괜히 귀찮은 일 안 생기게 잘 협조해라!’ 하는 소리들.

잘 협조하라면서 이런 어리바리를 붙여주는 건 무슨 심술이냐! 대리급도 아니고.

“아, 네”

장 주임이 일어섰다.

“빨리요! 시간이 많이 없어서요.”

한 교수가 완전히 안드로메다로 떠나기 전에 붙잡아야 된다.

고객이 누군지도 모르고, 너무 멀리 가버리면 궤도를 바로잡는 데 걸리는 시간이 더 많이 걸린다.

너무 창의성이 뛰어나도 주변 사람에겐 민폐였다.

최종 소비자인 기술자들의 취향을 알아내면, 바로 교수에게 연락을 할 참이다. 지구를 완전히 떠나기 전에.

“성훈 학생, 통역 불러서 같이 가요.”

시간 없다니까.

“그럼 위치만 가르쳐 주세요. 먼저 가 있을 테니까.”

그의 눈에 의아함이 서렸다. 미친 놈 아닌가 싶을 것이다.

콧대 높은 코쟁이들 앞에서 벙어리 되려고 저러나? 하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장 주임은 생각보다 친절했다.

“가면서 부르죠. 뭐, 급하니까 가시죠.”

장 주임은 휴대폰을 꺼내 들고 기획실로 전화를 해서 위치를 가르쳐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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