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건축의 신-17화 (17/427)

017. 설계 의뢰(2)

아침 일찍 교수 사무실로 등교를 했다.

한 교수는 만족을 모르는 완벽주의자였다. 가끔씩 헛소리 찍찍 하는 것 말고는 아주 괜찮은 스승이었다.

스스로 설계한 것에 대해서도 한 번도 만족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학생이 말하는 것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안 된다고 한 적이 없었다. 다만 이런저런 문제가 생길 거라고 지적해 줄 뿐이었다.

그의 이상한 상상력은 정말 이해가 안 되지만, 실무에 대한 부분에서는 누구보다 해박했다. 미국이 괜히 선진국이 아니다.

자신의 고질적인 문제인 무한 상상능력에 대해서는 철저한 방어논리가 있지만 학생 스스로 길을 찾아가면서 자신만의 노하우를 만들게 하는, 전형적인 스승이었다.

가르치면서 배운다. 그는 아직도 배우고 있었다. 그리고 좋은 친구이자 동료였다.

스승과 제자의 예의에 대해서 강조하지 않았고, 수직적인 사제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사제 관계를 지향하는 사람이었다.

“성훈아, 선영아. 이리 좀 와 봐라.”

그의 책상 앞에는 거대한 탁자가 있다. 그곳에 수십 장의 문서가 늘어져 있었다.

“이거 현재중공업에서 설계를 좀 해달라고 의뢰가 왔다. 할까 말까?”

‘자기한테 온 걸 나한테 묻다니. 애냐?’

살아온 세월로 친다면 나보다 한참 어린 나이이니 스스럼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 교수가 스스럼없기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는 나이에 대한 예우나, 깍듯함을 바라지 않았다. 강요하지도 않았다.

지극히 인본주의적 인간이다. 인간을 서열이 아니라 자신과 동등한 인격으로 본다는 말이다.

이렇게 물어보면 예의상으로라도 한 번 훑어보고 대답을 해줘야 한다.

슥슥 훑어보니 현재중공업 작업자들을 위한 기숙사였다.

수십 장의 문서를 요약하면 ‘30명 정도가 머물 수 있는 기숙사가 필요하다.

조건에 맞춰서 설계해 주시오’였다. 좋은 경험이 될 터였다. 나에게도 그에게도.

교수에게 물었다.

“다른 데도 의뢰가 들어갔겠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35살짜리 건축가에게 뭘 바랄 것인가?

“그럼 해야죠. 실력을 보여주세요. 어디어디 의뢰가 들어갔는지 제가 알아볼게요.”

“그래 줄래?”

대책 없는 교수였다. 좋은 스승이기는 하지만 나중에 어떻게 스스로 그 자리까지 올라갔는지.

‘남자가 말이야. 야망이 없어. 야망이!’

지금의 그는 그저 좋은 스승일 뿐이었다.

정보를 캐는 것은 쉬웠다. 현재중공업에 전화해서 동문 선배를 찾았다.

“선배님! 건축과 2학년 김성훈입니다. 한 교수님 밑에 있습니다. 잘 지내시죠?”

-어? 어, 그래. 어쩐 일이냐?

얼굴? 모른다. 어색하다고 티 내다가는 대화만 서먹해진다.

선배 좋다는 게 뭔가. 비비고 들어가면 된다.

‘얼굴 참 두꺼워졌다. 그때는 선배 무서워서 말도 잘 못 붙였는데.’

바로 용건으로 들어갔다. 구구절절이 설명할 필요도 못 느꼈다.

“현재중공업에서 기숙사 의뢰가 들어왔는데, 알고 계시죠?”

-어. 그래. 얘기만 들었지. 기획실에서 바로 진행하나 보던데. 근데 그거 그쪽으로 갔냐?

“예. 대충 보니까. 공사비 얼마 안 들어가는 거든데요. 큰 거였으면 학과장님한테 갔겠죠. 헤헤.”

-학과장님이 거기까지 말씀하시데? 네 말대로 그냥 던지는 거지. 그래도 명색이 재단에서 지원하는 학교잖냐.

‘말하긴 뭘 해! 학과장, 그 양반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너구리네.’

대충 분위기 파악이 됐다. 가끔 다이렉트로 의뢰가 들어오기도 한다.

그건 어디까지나 인지도가 있을 때의 이야기다.

그것도 학과장 정도는 무시할 수 있는 인지도일 때나 가능한 일. 대부분은 학과장의 손을 거치게 된다.

학과장이 먹기는 너무 파이가 작고, 다른 교수들에게 줘도 생색낼 수 없으니 이쪽으로 돌린 모양이다.

두 교수가 합작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아무래도 실수할 여지가 적고, 책임질 일이 생겼을 때 그 책임도 반이 되는 안정적인 방법이었다.

그런데 이제 막 부임한 교수에게 일거리를 던져준다? 그것도 찌꺼기를?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혹은 ‘예일대 나왔다는데, 실력이나 한번 보자’라는 심산일 것이다.

‘이것들 봐라! 진짜!’

미우나 고우나 내 스승인데, 나름 공들이고 있는데 이러면 나도 체면 상하지.

“그래서 어디 어디 의뢰 들어갔어요?”

-잠깐만. 어디 보자. 성진, 상아, 도산, 그리고 학교로 들어갔네.

선배 직책이 대리라고 했으니, 대리 선에도 신경 안 쓰는 하찮은 일이었다. 그래도 모교라면 신경 쓸 텐데.

아니면 학과장이 선배에게도 따로 언질을 주지 않은 모양이다. 이거 완전 무시당했는데.

통화를 하면서 속으로 웃었다.

‘다음에도 이런 일거리를 던져 줄 수 있는지 보자고.’

변동 사항이 있으면 연락을 달라고 했다. 술 한잔 얻어먹으러 가겠다는 너스레도 잊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한 교수에게 말했다.

“크게 돈 쓸 생각은 없는 모양인데요? 그냥 울산에 있는 건축사무소 몇 군데에 맡겼대요.”

한 교수는 실망한 얼굴이었다. 서울의 유명한 건축가들과 경쟁하기를 원했던 모양이다. 꿈도 크지. 젊은 친구가.

“하지 말까?”

여리여리하게 생긴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이 사람아, 당신이 결정하는 거라고! 참. 어쩌다가 이 길로 들어서가지고.’

외모로는 어디 가서 시인이라고 하면 딱 어울린다. 하지만 나는 성급할 필요가 없었다.

“에이, 교수님도. 그러니까 해야죠.”

한 교수가 왜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돈 별로 안 쓸 생각이었는데, 괜찮은 거 나와 보세요. 그 사람들 얼굴이 어떨지.”

교수의 얼굴이 밝아졌다. 실력을 보여주고 놈들 뒤통수 한 방 날리자는 건데, 기분 나쁠 리가 없었다.

남들이 몰라서 그런 거지. 한 교수는 실력자다. 옆에서 보조해 줄 사람만 제대로 만나면 그 실력 제대로 나온다.

“그래도 그 사람들 경력이 있을 텐데, 지면 얼굴 팔리는 거잖아. 명색이 교수님인데.”

선영이가 걱정을 했다.

“그러니까 더 해야지. 이기면 적어도 그들보다는 실력 있다는 걸 증명할 수 있잖아.”

‘격차가 크면 클수록 더 하지! 크크, 아예 수준 차이를 느끼게 해주지.’

이미 나는 계획이 있었다. 나는 미래에서 온 사나이거든!

돈 안 되어도, IMF 직후라 경기가 바닥이었다. 무슨 일이든 잡으려고 설계사무소들은 혈안이 되어 있었다.

“뭐 특별한 방법이라도 있나?”

“교수님, 특별한 방법이 있겠어요? 그냥 실력대로 하는 거죠.”

한 교수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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