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12화
배우고 싶었던 그림(2)
“제 이름은 강정윤이에요. 이 학원 원장이죠.”
“저는 김성훈입니다.”
“제가 누나인 것 같으니 말 놔도 되죠?”
어딜 은근슬쩍. 더 친해졌다가는 곤란하다. 적절한 선이 필요했다.
“아뇨. 당신은 선생님! 저는 학생! 남녀칠세부동석! 존칭 꼭 해주십시오. 그리고 모델 안 합니다.”
분명히 그녀의 다음 말은 모델에 관한 말일 것이다.
관심 없다.
하는 거 봐서 결정할 것이다.
“아이 참, 성훈 씨도. 모델하면 진짜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그럼 시간은 9시. 좋죠?”
“아뇨. 저녁 11시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시간이 그때밖에 안 됩니다.”
어린 학생들로 북적이는 시간을 피하고 싶었다. 1N으로 대충 지도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요? 뭐, 정히 원한다면.”
뭐지? 저 끈적끈적한 눈빛은?
쉬는 시간마다 선을 그었다. 벌써 스케치북을 하나 소모했다.
“성훈 선배, 뭐 해?”
며칠 지내니 친해졌다 생각하는지 은근슬쩍 말을 놓는다. 대가리 피도 안 마른 오크가.
“그림 배우거든.”
“선긋기 지겹지도 않아요? 일 학년 때 손가락 뭉개지게 했잖아요.”
건축학과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하는 제도 수업이 A1 트레싱지에 선긋기다.
1㎜ 간격으로 선을 그어서 그 용지를 다 채운다. 물론 실선만 그리는 것은 아니다.
점선, 일점쇄선, 이점쇄선 등등의 건축에 필요한 모든 선을 그어 넣는다. 긋기만 하면 그렇게 어렵지 않다.
화방에 가면 ‘STAEDTLER’라는 독일제 연필이 있다.
일반 연필로 하면 심이 몽땅 부러진다.
부러지지 않을 정도의 4H용 연필을 산다. 그리고 트레싱지 위에 꾹꾹 눌러서 선을 그린다.
왜냐고?
도면을 청사진으로 뽑으려면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대충 눌러 그리면 청사진을 뽑았을 때, 희미해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트레싱지 위에 홈이 파이게 선을 그으려면 강한 힘이 필요하고, 그 힘에 부러지지 않을 강한 탄소뭉치가 필요하다.
반 장도 채우기 전에 손가락이 아린다. 연필을 꽉 쥐고 누르기 때문에 눌려서 그렇다.
한 장을 끝내기도 전에 건축과를 왜 들어왔는지, 후회가 생긴다. 캐드가 있었다면 그런 고생 안 했을 텐데.
“차라리 일 학년 때로 돌아갔으면 좋았을걸!”
“선배도 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요? 다 늙어 가지고.”
푸념 섞인 내 말의 의미도 모르면서 선영이가 핀잔을 주었다.
그렇지. 다 늙어 가지고.
그렇다고 말이 안 되는 소리는 아니거든. 이것아.
‘일학년으로 돌아갔으면 ‘F’도 안 생겼을 거고, 그거 때우느라 지금 고생 안 할 텐데. 업보다, 업보.’
이번 학기는 죽음이다. ‘F’ 2개를 메우느라 개고생을 해야 한다.
물론 수업은 안 들어도 되니, 리포트나 제대로 제출하라는 교수님의 배려가 있었지만 말이다.
몇 살이나 어린 친구들이랑 같이 수업을 들었다면 얼마나 쪽이 팔렸을 것인가?
‘으으!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어머. 성훈 씨. 이걸 언제 다 한 거야?”
스케치북 세 권을 들고 미술학원을 갔다.
권당 앞뒤로 빽빽하게 선들이 채워져 있다. 검은 선 반, 여백 반이다.
조금만 떨어져서 보면 회색으로 보인다.
스케치북을 넘기며 정윤이 입을 딱 벌렸다.
물론 시위용이다. 이 정도로 열심히 했으니 빨리 다음 단계로 넘어가자는.
사회생활 하루 이틀 하나!
‘정말 혼자 다 했을까?’ 하는 그녀의 눈길을 받으며 캔버스 앞에 앉았다. 스케치북에 선을 그었다.
한번 그어 보면 바로 실력 뽀록나는데, 여기서 거짓말하는 건 사회인으로서의 자격 미달이었다.
‘날 대체 어떻게 봤기에. 참.’
스으윽. 스으윽-
연필이 지나가면 선이 생성된다. 한 치의 흔들림도, 삐뚤어짐도 없는 선이었다. 가로선, 세로선, 곡선과 동그라미.
그냥 기계적인 반복일 뿐이다. 긋고자 하면 손이 자연히 따라가는 경지였다.
“하루 이틀 한다고 되는 게 아닌데. 대단하네요!”
당연하지!
하루에 한 장씩 해서는 백날이 가도 못하지만, 하루에 백 장이면 가능하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이 없어서 그렇지.
나는 절박했다. 다시 패배자로 살고 싶지 않으니까.
감각이 안 되면 노력으로 따라잡는다.
노력하는 범인은 노력하지 않는 천재를 따라잡을 수 있다.
긴 세월을 살지는 않았지만, 노력하는 사람이 뒤쳐지는 경우는 별로 보지 못했다.
시간이 약간 더 걸릴 뿐. 마지막에 웃는 자는 항상 우직한 사람이었다.
당장의 힘듦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미래의 자괴감이다.
‘시간을 헛되이 보냈다는 것보다 후회되는 것은 없지. 돈은 벌면 되지만 시간은 불가능해.’
무엇보다도, 다시 사는 생에서 이 정도 노력도 안하고 날로 먹으려 들면 그건 도둑놈이다.
뿌듯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노력의 결과죠.”
“정말 대견해요. 착한 우리 성훈이. 선생님이 커피 한 잔 타 줄까?”
은근슬쩍 말을 놓으며 정윤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왠지 그 손길에서 애정이 느껴지는 건 내 착각일까?
기특한 학생에게 주는 칭찬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커피를 타러 갔고, 나는 연필을 왼손으로 옮겨 잡았다. 스케치북에 선을 그었다.
오른손보다 더 가늘고 굵기도 일정한 선이 그어졌다.
‘역시 왼손이 편해. 오른손은 좀 더 노력해야 되겠어.’
나는 왼손잡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