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11화
배우고 싶었던 그림(1)
오랜만에 도서관을 들렀다. 정확히는 15년 만이다.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겠지.
아직 자신은 한글에 익숙하지 못하니 양동마을에 대한 자료를 찾아봐 달라는 한 교수의 부탁 때문이다.
“젠장, 다음부터는 어디 가자는 말 하나 봐라.”
한 번을 가도 약속은 지키는 것이다. 최대한 가까이 있는 것부터 답사를 하면 될 것이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은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음으로 인해 거의 대부분을 책으로 찾아야 한다는 것.
네이머가 생기면 그때부터는 알아서 조사를 하겠지. 그리고 나를 운전기사로 써먹겠지.
“밖으로 나돌 구실을 찾아야겠어.”
그 전까지는 어떠한 정보도 주지 않겠어. 미국에서 전통 문화를 공부했으면 얼마나 했겠나!
아직은 번역된 것도 몇 개 없었을 건데. 나는 확신했다.
왜냐? 한국이라는 나라는 2002 월드컵이 개최되기 이전에는 일본의 속국 정도로 치부되고 있었으니까.
나는 88 올림픽보다도 2002 월드컵이 훨씬 더 한국의 위상을 높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개개인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대충 몇 권을 뒤적이며, 남한산성에 대한 자료를 찾고 있는데 ‘그림 그리는 법’이라는 제목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림을 배우고 싶었다. 아주 오래전 일이다.
‘그 친구가 홍대 미대 출신이라고 했었지.’
전생에서 모델하우스에 들어가는 디피 가구 일을 할 때, 미대 출신의 남자를 만났다.
디피 가구는 디스플레이용 가구를 말한다. 쉽게 말해 장식용 가구이다.
기존의 앤틱 가구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주로 주문형 가구가 많았다. 그는 가구 디자인 회사의 직원이었다.
그는 자신이 만들고 싶은 제품을 말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림으로 그리면 금방 알 수 있는데, 여기는 이런 곡선, 저기는 저런 곡선이라고 설명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텅 빈 종이였다. 그 위에 선이 그어지니 공간이 생겨났고, 곡선이 들어가니 아름다움이 탄생했다.
짧은 시간에 그림 하나를 완성하는 것은, 내가 보기에는 묘기에 가까웠다.
그 사람을 좋아하진 않았다. 까탈스러워서 맞추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 실력에는 감탄을 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나도 내가 만드는 집에 대해 말로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말이란 그 사람이 가진 관념에 의해서 다르게 전달되거든. 가장 편한 건 그림이지.”
이미지를 설명하는 데 말로 표현하는 것은 하수 중에서도 가장 하수가 하는 짓이다.
그 기억 때문에 나는 그림을 배우고 싶어 했다. 그때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지만 지금은 가능하다.
공장에서 일하면서 ‘미대를 갈까?’ 하고 잠시 생각했던 적도 있지만 그 생각을 접었다. 건축이 더 좋았다.
지금 필요한 건 미대생의 지식이 아니라, 내 머리의 이미지를 얼마나 그림으로 잘 표현할 수 있느냐 하는 것!
내게 있어서 그림은 그 이미지를 효율적으로 빠르게 형상화할 수 있는 기술일 뿐이었다.
미술사를 배우고 색감, 공간을 배우는 등. 그런 잡다한 것을 배제하고 싶었다.
물론 그림을 배우면서 이런 내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 알게 되었지만 그건 그 이후의 일이다.
빌린 책을 교수 책상에 올려놓고, 자취방 근처의 미술 학원을 찾아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하얀 벽의 널찍한 공간에 석고상 몇 개가 보였다. 그리고 한쪽 벽면에는 가르치는 학생들이 그린 듯한 그림이 줄줄이 붙어 있었다.
선생은 나를 돌아보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하고는 학생에게 조곤조곤하게 이런저런 설명을 이어갔다.
학생이 알아들었는지 확인하고 머리도 쓰다듬어주면서, 배려 있게 잘 가르치는 선생이었다.
나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벽에 붙은 그림들을 훑어보았다.
‘흠. 좀 실력이 있나 보네. 주로 입시반 학생들을 가르치나 봐.’
그림 하단에 무슨 학교 몇 학년이라고 써 있었으니 금방 알 수 있었다. 재능 있는 아이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면 가르치는 실력이 상당히 좋은 것이다.
내심 만족스러웠다. 내가 필요한 것은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가 아니라, 잘 가르치는 사람이었으니까.
이삼 분 지났을까? 선생이 다가왔다. 30살 정도의 곱상한 미인이었다. 내가 먼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그림을 배우고 싶어서 왔습니다.”
“입시 준비를 하시려는 건 아니시죠?”
선생은 내가 입시생이라기엔 나이가 많아보였는지, 살포시 웃었다. 초면에 실례를 하는 게 아닌가 걱정하는 느낌이었다.
“하하, 그건 아닙니다. 건축과 학생인데, 그림 실력이 딸려서 기초부터 배우고 싶어서 왔습니다.”
“아. 건축과시구나. 그래서 몸이 이렇게 좋으신가 보다.”
순간 기분이 묘했다. ‘건축과면 노가다를 하는 줄 아나?’ 하는 언짢은 마음과 몸이 좋다니 뿌듯한 마음.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그러면서도 웃겼다. 기분 나쁘지도 않았다.
‘이 여자. 살짝 허당기가 있네.’
선생은 전혀 무시하는 말투가 아니었고, 오히려 감탄하는 말투였다. 그러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키도 크시고 비율도 좋으시네요. 아! 빈말 아니에요. 호호, 커피나 드시면서 말씀하시죠.”
제 할 말만 늘어놓더니 나를 사무실로 안내했다. 책상 하나에 테이블 하나, 그리고 이 인용 소파 2개가 있었다.
응접실 겸 사무실인 모양이었다. 뻘쭘하게 따라 들어가서 소파에 앉았다.
선생은 커피 두 잔을 타오더니, 살갑게 말을 붙였다.
“혹시 운동하셨어요? 몸이 각이 딱 잡혀 있고, 라인이 좋으셔서 옷빨도 굉장히 잘 받으세요. 아! 제가 조각을 전공해서 사람 몸에 관심이 많아요. 호호.”
그녀의 말에 눈썹을 으쓱하면서 농담으로 받아쳤다. 내가 칭찬에 얼굴 빨개질 나이는 아니잖아?
“그래도 얼굴이 그렇게 미남은 아니잖아요. 남자는 얼굴인데.”
“무슨 말씀이세요? 얼굴선이 굵으면서도 각지지 않았잖아요. 완전 남자 얼굴이세요. 카리스마도 있어 보이고.”
키 185에 77의 몸무게면 어떤 옷을 입어도 핏이 산다. 거지처럼 걸치지만 않으면 말이다. 배관 수련의 결과다.
그리고 이 여자는 직업을 잘못 택했다. 강사가 아니라 영업을 해야 할 여자였다.
선생에게 휘둘려서 용건만 꺼내고 다음 말은 하지도 못했다.
내 말을 하려고 하는데 그새를 못 참고 또 선생이 입을 열었다.
“혹시 모델 할 생각 없어요?”
호의로 봐주는 건 고맙고 하는 짓이 귀엽기는 하지만 살짝 짜증이 났다.
“선생님, 저는 모델 할 생각이 없고, 그림 배우고 싶어서 왔어요.”
“어머, 그렇다고 하셨지. 기초부터 배우고 싶다고 하셨나요?”
그랬지 하면서 손뼉을 짝 쳤다. 그녀는 언뜻 내비친 내 짜증을 전혀 짜증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강적인데!
“흠, 그럼 선 긋기부터 하셔야 돼요. 그게 기초거든요. 기초가 안 잡히면 시간이 꽤 걸릴 수도 있어요.”
안다. 기초 중의 기초. 그래서 가장 하기 귀찮은 것. 선 긋기를 못하는 사람도 있을까?
그녀에게 다른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러죠. 언제부터 시작하면 되죠?”
누구는 설거지 몇 년, 재료 손질 몇 년을 하고 나서야 칼을 들었다고 하지만 그건 사수에게 잘 보이기 나름 아닌가?
설거지만 시키기엔 아까운 놈이라는 생각이 들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마련이다. 이른바 요령이다.
사회생활 20년 동안 갈고닦은 게 요령이다. 더러운 거 못 본 척. 치사해도 웃어주기, 욕 나오는 거 삼키기 등등.
지금의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게 만들 테니까.
눈앞의 내 사수는 30살짜리 신출내기다. 파란 새싹 요리하는 건 식은 죽 먹기다.
즉답하는 나에게 ‘쉽지 않을 텐데!’ 하는 눈으로 슬며시 웃고 있었다. 나도 씨익 웃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