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 복학. 한 교수를 만나다(3)
“교수님! 그래도 부석사는 가보셨겠죠?”
“거기도 아직이야. 들어보기만 했지. 가보고는 싶었지만 도로가 너무 복잡해서…….”
한 교수는 아쉽다는 듯이 말꼬리를 흐렸다. 당연히 그럴 거라 예상했다.
아직 내비게이션이 상용화되지 않았을 때다. 그런데 한국이 초행길인 사람이 찾아갈 수 있을까?
잠깐만 표지판을 놓쳐도 삼천포로 빠지는 게 한국의 도로 상황인데. 미국 도로를 생각하다가는 이박 삼일이 걸려도 못 찾아간다. 가 봤을 리가 없다.
나는 당신이 봤든지 못 봤든지 관심없다는 듯 내 말만 계속했다.
“만약에 가시게 되면 무량수전에서 소백산맥 쪽을 한 번 바라보세요. 소백산을 배경으로 담벼락과 건물들이 쪼르륵 서 있는데, 곡선과 배치가 정말 예술이죠. 특히 구름 낀 날에는 소백산 자락에 구름이 살포시 앉아 있는데, 그 운치가. 캬! 정말 말로는 설명할 수 없죠!”
두 손을 흐느적거리며 내가 느꼈던 감동을 생생히 늘어놓았다. 마지막에는 쌍 엄지를 들어 올렸다.
‘책과 사진으로는 절대로 그런 감동 못 느끼지. 미녀를 눈팅만 한다고 알 수 있나! 직접 만져봐야지.’
전통 건축 때문에 한국에 올 정도면 목마름도 장난이 아닐 것이다. 한 교수의 미래도 전통 건축과 연관이 있다.
말을 끝내고, 한 교수를 바라보았다. 그 느낌이 오는지, 내가 말하는 내내 눈을 감고 상상하고 있었다.
‘미국의 산으로는 그 느낌 모를 텐데, 쩝. 어쨌거나 거의 넘어왔네.’
왜 이렇게 얼토당토않은 약을 팔아 대냐고? 그건 그렇지 않다. 실제로 가 봤고, 여러 곳을 답사했었다.
한 교수가 나의 말을 의심해서 인터넷을 찾아볼 것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네이머가 1999년, 밀레니엄이 시작되기 직전에 포털 서비스를 시작했다.
아직 1년이 더 남았다. 그 이전의 인터넷이란 정말 원시인 수준의 정보 검색이었다.
‘이제 방점을 찍어야지!’
“그리고!”
‘그리고? 또 무슨 할 말이 남았냐?’는 듯한 교수가 두 눈을 으쓱했다. 잘생긴 이마에 주름이 잡힌다.
“그 절경을 최고로 멋있게 감상할 수 있는 포인트가 있습니다.”
한 교수가 어깨를 앞으로 디밀었다. ‘어디! 어디!’정도로 해석 가능하겠다.
귀를 내 입에 갖다 댈 기세였다. 궁금하냐?
“거긴 저밖에 모릅니다. 하하.”
한 교수가 의자 등받이로 털썩 등을 기댔다. 기대가 너무 컸던 거다. 쉬우면 재미없지!
“에이, 사람 이렇게 약 올리긴가. 너무한데. 그런데 자네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알 수가 있나?”
“제가 가본 곳 중에 몇 군데만 말씀드린 거예요. 그쪽으로 관심이 많아서 어릴 때부터 엄청 돌아다녔습니다.”
어릴 때부터 관심이 있었다는 것은 거짓말이지만 많이 돌아본 것은 사실이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눈이 가는 곳이 전통 건축이었고, 한국의 세계화가 이루어질수록 독창성을 내세울 것은 전통밖에 없었다.
미국에 미국 문화를 팔아먹는 것은 어렵지만 전통 문화를 쉽다. 일단 새로우니까. 오죽하면 음식 한류 바람이 전 세계를 휩쓸었을까?
때마다 방송으로 전파를 했으니 모르면 오히려 바보였다.
“경주 양동마을부터 시작해서 경복궁까지 안 가본 곳이 별로 없죠. 언제 시간 나시면 안내해 드릴까요?”
한 교수가 벌떡 일어섰다. 주인 잃은 의자가 뒤로 넘어졌다.
“진짜? 같이 가줄 수 있어? 언제?”
‘말해라. 말해라. 와 달라고 부탁하라고.’
주문을 걸었다.
“아니지! 여기 오면 되겠네. 자리 만들어 둘 테니 언제든지 와라. 환영한다!”
배고픈 곰이 미끼를 물었다. 덥석!
“네, 그러겠습니다. 교수님의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운전기사를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의욕 있고 능력도 있는 한 교수는 그렇게 나와 인연을 맺었다.
“성훈아, 부석사 언제 갈 거냐?”
내가 교수실을 갈 때마다 듣는 말이다.
한 교수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없다. 취업이 급한 선배들은 아무도 그의 세미나 그룹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생긴 교수실의 빈자리를 쓰라고 했다. 선심 쓰듯이 말이다. 당연히 나는 그곳에 둥지를 틀었다.
시간이 남거나 수업이 없으면 항상 교수실에서 죽치고 앉아 공부를 했다. 교수는 내가 부석사 가이드로 보이는 모양이다.
‘이 양반아. 편도만 4시간이야! 왕복 8시간 걸리는 거리라고. 옆 동네인 줄 아나.’
괜히 부석사 이야기를 꺼내 가지고. 그냥 양동마을 정도만 했어도 될걸. 지금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이미 교수는 거기에 꽂혔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교수를 위해 움직여줄 생각이 없다. 전혀! 배부른 곰은 말을 안 듣는다.
“사내가 한 번 뱉은 약속! 어기지 않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큰 소리 떵떵 치면서 나만 믿으라고 했다.
그리고 언제라는 말을 절대 하지 않았다. 목말라 본 사람만이 그 가치를 아는 법이다.
‘자꾸 그러면 내비게이션 달고 나서 가는 수가 있어.’
지도 보고 찾아가야 하는 시대였다. 대한민국 방방곡곡이 머릿속에 없으면 여행 자체가 불가능했다. 적어도 나로서는.
네비가 없으니 지도책을 봐야 하는데, 그것만 펴면 머리가 어지러웠다. 돌아가고 싶다, 젠장.
‘어쩜 이렇게 불편하게 살았을까.’
미래에서 온 사람들이 성공해서 떵떵거리고 잘 먹고 잘 산다는 소설은 전부 거짓말이다.
지금은 스마트폰도 없다. 불편함의 극치다. 휴대폰으로 사진 찍는 시대가 온다고 하면 모두 미쳤다고 할 것이다.
‘슬라이드 폰도 아직 안 나왔구나. 폰의 세대교체라면서 불티나게 팔렸는데.’
건축 때려치우고, 휴대폰 회사나 차릴까 하는 생각을 안 해본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러면 두 번째 삶에서 나는 남의 재능이나 훔치는 거짓인간이 될 것이다.
배관 일을 하면서 결심했던 것은 ‘주식 외에 다른 것은 일체 손대지 말자’였다. 주식은 보험일 뿐이다.
알고 있는 미래를 송두리째 바꾸기 싫었다. 바뀌어버린 미래는 미래가 아니다. 내 손으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약속은 지켜야 하는 것.
“교수님, 이번 주말에 양동마을이나 한 번 다녀오시죠.”
“이번 주는 시간 되냐?”
한 교수의 입이 헤벌레 벌어진다.
내심 흐뭇하게 웃었다.
“교수님, 가시면 턱 조심하셔야 됩니다.”
교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집들이 하도 신기해서 넋 놓고 걸어 다니다가 자빠지거든요.”
나도 20년 전에 가서 입을 떡 벌린 곳이거든. 그 시대에 그런 구조와 공간들을 어떻게 생각해 냈는지.
계급사회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 내가 보기에도 그 시대의 장인들이 존경스러워지는 건축물이었다.
한 교수가 마음을 먹는다면 다른 교수들과 친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과의 정보 교류를 통해 어디가 볼 게 많고, 어떤 게 좋다. 정도는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교수는 마인드 자체가 미국식이라,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사람이고, 꼬장꼬장하다.
합당하지 않은 것에 숙이고 들어갈 정도로 자존심이 약하지도 않다. 그런 그가 알 수 있는 것은 책, 그리고 나를 통해서였다.
‘책으로 알게 되는 것은 한계가 있고, 나는… 쉽지 않은 남자지.’
한 교수는 이따금 당근을 주지 않으면 어디로 튈지 모르니, 가끔은 갈증을 해결해 주어야 한다.
“뭔가 일거리 하나 안 떨어지나? 미국에 있을 때는 기업들이 종종 설곗거리를 던져줬는데.”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중얼거리는 한 교수였다.
‘인지도가 이래서야 제대로 된 일이 올지……. 비비기라도 잘하면 모를까! 쯧쯧.’
내가 보기에는 얻어걸리면 몰라도 자력으로 설계를 따오는 것은 요원해 보였다. 해서 위로의 말을 던졌다.
“오겠죠. 코딱지만 한 일이 걸리면 여기로 떨어지지 않을까요?”
“그래. 코딱지만 한 거라도 나왔으면 좋겠다. 설계를 하고 싶어 죽겠어.”
그냥 하면 안 되느냐고? 선 죽죽 그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 사람은 초짜다.
설계란 게임과 같다. 건축주가 오더를 내리는, 제한된 공간과 제한된 조건!
그 모든 것을 만족시키되, 아름다워야 하고 건설 비용이 저렴해야 한다. 또한 새로워야 한다.
설계! 그 자체가 도전이고 게임이다. 텅 빈 땅에서 건물이 솟아나는 거니까. 건축은 창조의 예술이다.
그리고 얼마나 고객의 니즈를 만족시키느냐! 거기에서 건축가의 가치가 결정된다.
한 교수는 자신의 가치를 알리고 싶은 것이고, 더불어 자신의 감각이 둔해질까 염려하고 있었다.
‘뭐! 한 교수의 운에 달린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