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9화
복학. 한 교수를 만나다(2)
‘하긴 한 교수가 지금은 풋내기니까. 내가 졸업할 때 즈음에는 한 교수에게 줄을 대려고 안달 나게 만들어주지.’
지금은 한승원 교수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애초에 한국에 예일대 출신의 건축 전공자가 드물었다.
몇 사람이 있기는 하겠지만, 그들은 한국의 인맥이 있으므로 그들 중에서 대우를 받는다.
하지만 한 교수는 같은 예일대라도 한국에 연줄이 없다.
한 교수의 가족은 한 교수가 어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거기서 대학을 졸업했기 때문이다.
소위 SKY대 출신들보다 더 뛰어난 스펙임에도, 그는 이방인이었다. 사자도 하이에나 틈에 끼이면 물어 뜯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타협을 모르는 사람이다. 자신만의 고집을 가지고 건축을 대한다.
한마디로 꼬장꼬장하다. 젊은 사람이 가지기 어려운 장점이지만 대인관계에 있어서는 독이다.
그래서 학계에서, 가까이는 학교 교수들 사이에서도 왕따를 당한다.
인맥이 없고 성격으로 인해 경원시당하니 실력이 있어도 드러낼 수 없었다. 멍석이 깔려야 뭐라도 할 것 아닌가!
‘하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미국에서 공부한 학생들이 귀국을 하게 되지.’
그들의 대부분은 IMF라는 고난의 시대를 악으로 깡으로 버티면서 공부한 사람들이다.
한국 경제가 흔들리면서 자신의 부모에게서 지원이 끊어졌음에도, 외국인이라는 차별을 버티며 학위를 딴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한승원 교수를 중심으로 뭉치고 학맥을 만들게 된다. 원래 독한 사람들이 뭉치니 더 강해졌다.
‘지금은 마이너지만 10년 뒤에는 전혀 상황이 다를걸.’
한승원 교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다만 지금은 때가 아닐 뿐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건축가가 되었는데, 지금이라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과는 좀 다른 철학이 있는 사람이지. 그런 사람이 하루라도 빨리 자리를 잡는 게 우리나라를 위해서 좋아. 나를 위해서도 좋고.”
나는 내 스스로의 성공을 위해서 한승원 교수와 함께하기로 했다.
거기다 이제 곧 나이 들어 은퇴할 교수님들보다는 젊은 친구가 좋았다.
오랫동안 윈윈할 수 있고, 무엇보다도… 다루기 편하다. 나는 액면가 25살의 마흔셋 중년이었다.
꼬장꼬장하니 힘들지 않겠냐고?
헐. 나 마흔셋이라니까. 찬물 더운물 안 가리며 똥물 뒤집어쓰고 살았다고! 온실 속의 엘리트와 비교되면 섭섭하다.
“나도 성공 한번 해봐야지. 남 좋은 일만 시킬 수는 없잖아. 안 그래?”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배관 안에서 9개월 있다 보니 혼자서 중얼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자네, 2학년 아닌가?”
“네, 맞습니다.”
“전공은 3학년부터 정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아닌가?”
듣던 대로 꼬장꼬장한 한 교수는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나는 교수보다 어렸다. 한국에서 어리면 거의 절대적 ‘을’이다. 대등한 입장이 아니라는 말이다.
“어차피 3학년 되면 교수님께 지원할 겁니다. 그 전에 미리 배우고 싶습니다.”
“이상한 친구로군. 돌아가. 배우려는 자세는 좋지만 그게 내가 자네를 받아야 할 이유라고는 납득되지 않아.”
‘어차피 찬밥 신세면서. 꼬장꼬장하기는.’
여기서 한 교수를 납득시키지 못하면 나는 일 년을 기다려야 하고, 그러면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내게 시간은 금보다 귀했다. ‘한번 부딪쳐나 보자. 안 되면 다른 방법 찾지 뭐!’
한 교수를 도발했다. 뭐 뜯어먹을 거 있다고 한국 왔냐! 물론 그렇게 대놓고 물으면 안 되고.
“예일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오히려 교수님이 이상합니다. 미국에서 건축을 하셔도 되고, 대학에서 교편을 잡아도 될 텐데 왜 한국까지 오셨습니까?”
2학년인데도 찾아와서 가르쳐 달라는 내가 싫지는 않았던지, 한 교수는 어깨를 으쓱하며 답을 해줬다.
“그거야, 한국에 살고 싶어서지. 미국도 좋아. 하지만 나는 한국 사람이거든. 한국 전통 건축도 좋고 말이야.”
그는 매우 단순한 이유로 한국행을 택한 심플한 아메리칸 이었다.
전통 건축이라! 그것 때문에 한국에 왔다? 그럼 방법이 있지.
“저는 전통 건축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잘 압니다. 적어도 전통 건축에 대한… 사랑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겁니다.”
전통 건축은 한 교수의 관심 분야이지, 전공 분야가 아니다.
문서로 접하고, 궁금증을 풀기 위해 연구함으로써 알게 되는 것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미국에서 한국의 전통 건축을 얼마나 공부했겠는가?
제대로 된 서적도 없었을 텐데. 그렇다면 내가 더 잘 아는 것이 당연했다.
지식이라고 하면 자존심이 상할 테니, 사랑으로 포장한 것뿐이다.
한 교수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인상 쓰는 것은 아닌데, 이해 불가한 뭔가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너무 세게 나갔나?’
보통 사람 같으면 기분 나쁠 수 있다. 더군다나 지성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교수라면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를 보였다. 합리적인 사람이다. 선생이라고 모든 걸 다 알지는 못하잖나.
미간을 좁히며 의심스러운 듯 물었다. 내가 약 파는 걸로 보였던 것 같다.
“겨우 2학년인데 어떻게 그걸 그렇게 많이 안다고 확신하나?”
‘전생에는 수많은 사찰과 전통 가옥을 방문했습니다요. 한 교수님아.’
하지만 그것을 말할 수는 없는 법. 그리고 구라를 친다고 확인할 수도 없으리라.
“경복궁 가보셨습니까?”
“당연히 가봤지.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거기부터 가봤지.”
아주 기분 좋은 경험이었던 듯 그는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그럼 양동마을도 가보셨어요?”
“양동마을? 거기는 어디야? 안동 하회마을을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니야?”
하회마을까지 아는 것을 보니, 꽤나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나 보다. 외국인치고는…….
“양동마을을 모르면 진정한 한국의 전통 건축을 안다고 말할 수 없죠.”
에헴! 여기부터는 약을 팔았다. 어쩔 수 없지. 사람 낚는 데는 궁금증이 최고다. 전생에 나는 영업과장이었다.
“정말?”
‘진정한 한국 전통 건축’이라는 약발이 먹혔는지, 한 교수가 의자를 당겨 앉았다. 경청할 자세가 되었다.
경복궁이 왕의 거처라면 경주 양동마을은 실제적인 양반들의 집이다.
세도가들이 살던 안동 하회마을과는 또 다른 느낌이 있다.
어쩌면 가장 중산층의 양반 문화를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고관대작들이 살았던, 고래등 같은 기와집은 아니지만, 그 속에서는 그 시대의 생활상이 묻어나온다. 등등의 썰을 풀었다. 내 경험상 반은 넘어왔다.
교수가 모르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는 것. 그것도 관심 분야를 말이다.
나는 말하고 교수는 경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