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6화
공장문을 나서다.(1)
깡. 깡.
“성훈아, 밥 먹자.”
식사 시간 알람이다. 매일 조장은 나를 부르러 온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밥 먹은 시간도 잊어버리기 일쑤였으니까.
이제는 힘들다는 것도 모른다. 어느 경지에 이르니 칼을 갖다 대면 실리콘이 알아서 일어났다.
한 아름의 실리콘 찌꺼기를 앞으로 내밀었다.
“야, 인마. 너는 인사를 항상 이걸로 대신하냐?”
그는 웃으면서 음료수를 내밀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너무 안 쉬는 거 아니냐? 쉬어가며 해. 일당 충분히 하고 있으니까. 옆에서 보는 내가 불안해서 그런다.”
내가 깎아낸 실리콘 덩어리들을 보며 질린다는 듯이 눈썹을 으쓱거렸다.
그가 내민 음료수를 받으며 말했다.
“형님, 저는 저 안이 좋습니다.”
조장이 머리를 배관 안으로 들이밀었다.
“완전 찜통인데?”
별종이라는 듯이 나를 쳐다본다.
“네, 안에 들어가 있으면 도 닦는 기분입니다. 조용해요. 제 숨소리밖에 안 들립니다.”
사실이었다. 좁고 어둡지만 내 호흡에 집중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최고의 공간이었다.
“들어가 있기만 해도 마음이 편합니다. 저기 있으면 돈이 되잖아요.”
“그래도. 야. 이거 살 빠진 거 봐라.”
하루 종일 땀을 흘리니 군살이 빠지지 않고는 못 배긴다. 최소한의 지방만 남아 있었다. 90㎏이 넘던 몸이 지금은 80㎏도 안 나갈 것이다. 몸이 날아갈 듯 가볍게 느껴진다.
배관 청소를 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아침에 잠시 봤던 한신공영을 생각하면서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이 좁은 공간은 나를 탈바꿈시키는 고치가 될 것이다. 참고 견디면 된다.’
다음 해에는 복학을 할 것이고, 공부에 집중을 해야 할 것이다. 준비가 되지 않아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42살의 내가 지금의 24살짜리들에게 이길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당연히 이긴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단지 미래를 조금 안다는 것? 조금 더 알아서 그 지식을 돈으로 환산하는 것?
‘내가 이전 삶에서 알고 있던, 지극히 경멸했던 졸부들과 뭐가 다르지? 할 줄 아는 게 돈질밖에 없는 놈들!’
나는 근본부터 달라지고 싶었다.
지금의 내가 그들과, 아니, 내 실제 나이 또래의 사람들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나는 특별하다. 24살의 친구들에 비해서는 절대적으로 경험이 풍부하고, 42세의 친구들과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젊다. 어느 한쪽에도 꿇릴 이유가 없다. 오히려 더 나은 것이 당연하다.’
실제로 나는 영어를 잘한다. 일본어도 능숙하다. 다른 외국어들도 좀 한다. 컴퓨터도 잘 다룬다. 현장 경험이 있다.
토익 공부를 열심히 해서 영어를 익힌 것이 아니다. 외국 바이어와 대화하기 위해서 익혔다.
지금 당장 토익에서 고득점을 할 자신은 없지만, 외국인과의 대화는 자신이 있다. 얼마 전까지 해도 그들과 대화를 했고, 바이어를 안내하고 다녔다.
보이는 스펙은 밀릴지 몰라도 실전에서 꿇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스펙도 이제 밀리지 않아야 한다.
마흔둘의 친구들에 비해서는 젊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압도할 수 있다.
나이 사십이 넘어가고 주름이 생기면서 젊은 친구들에게 부러웠던 것은 그들의 스펙, 배경,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단지 하나. 젊음이 부러웠지.’
젊음이라는 단어 하나에 지치지 않는 체력, 세상에 병들지 않은 몸, 무서움을 모르는 패기. 젊음 안에 그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나는 지금은 특별하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면 특별해지지 않는 시기가 올 것이다. 그저 남들보다 약간 나은 처지가 될 것이다. 그렇게 예상한다. 돈이 조금 더 많은 사람? 그래 봤자 삼송 회장이나, 현재 회장에게는 안 되겠지. 그들에게는 전혀 특별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내가 생각한 결론은 이거였다.
‘계속 특별하기 위해서는 탄탄한 기본을 바탕으로 경험을 업그레이드시켜 가는 수밖에 없다.’
좁은 배관 안에서, 나는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렇다고 미래를 안다는 장점을 버리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에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겠다. 나는 새로운 나를 개척하겠다.
“형님, 식당이 진짜 좋은데요. 메뉴도 좋구요.”
식판에 밥을 담아 와서 조장의 맞은편에 앉았다.
“우리 회사가 복지는 좋지. 그런데 지금 그거 몇 그릇째냐?”
입은 밥을 먹느라 바빠서 나는 손가락 세 개를 펴보였다.
“아줌마, 뭐라 안 하시디?”
“더 퍼주시려고 하길래 오늘은 이걸로 끝이라고 했죠.”
“아줌마도 귀찮겠지. 어쩌냐 그래도. 힘든 일 하는데 밥이라도 많이 먹어야지.”
조장이 숟가락을 놓고 물을 받아왔다. 내 앞으로 스테인리스 컵을 들이밀었다.
“야, 물 좀 마셔가면서 먹어라.”
“형님. 헤라(긁어내는 칼.) 좀 주세요. 다 낡아가지고 잘 안 돼요.”
뒷주머니에 꽂혀 있던 헤라를 식탁에 올렸다. 헤라가 반 토막이 되어 있었다. 얼마나 갈았던지 맨들맨들했다.
“벌써. 와! 너 진짜 엄청난 놈이구나. 강자로 인정한다.”
“그리고요, 형님. 저 카세트 하나만 사다 주세요. 시간이 없어서요. 돈은 드릴게요.”
“뭐하게?”
“라디오 좀 듣게요. 가끔씩 영어 테이프도 좀 듣고요. 복학 준비 해야죠.”
“그래? 그럼 내가 쓰던 거 있으니까. 그거 그냥 줄게. 얼마 전에 새 카세트 거 사서, 그건 안 쓰거든. 괜찮지?”
괜찮고 달고가 어디 있나!
“감사합니다, 형님!”
“충전지도 필요하지? 충전기랑.”
계속 얻기만 하는 것도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얻는 것이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 한다.
지금 내 처지에 그런 것이 가능할 리가 없다. 거절하려는데, 그가 말을 막았다.
“주는 사람 있을 때 많이 벗겨 먹어, 인마. 내가 주고 싶어주는 거니까 미안해하지 말고.”
그가 물을 마시면서 말을 이었다.
“나는 너한테 투자하는 거다. 혹시 아냐? 잘되서 거하게 술 한잔 살지, 안 그래?”
고마운 사람이었다. 내 인생에서 절대로 잊지 못할 사람이 될 것이다.
“반드시 사겠습니다, 형님. 고맙습니다.”
다음 날 조장은 카세트와 테이프 한 세트를 가져왔다. 토익 강의 세트였다.
충천기와 충전지 한 꾸러미도 있었다. 깨끗해 보이는 것이었다.
“하도 토익이 대세라고 하길래 나도 해보려고 일 년 전에 샀던 건데…….”
그가 머쓱하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었다.
“솔직히 한 번도 못 봤다. 그냥 네가 써라. 대신 너는 그거 다 봐야 된다. 그게 조건이다.”
멍하니 바라보는 나에게 어깨를 토닥이며 격려하고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이전 삶에서 그다지 받아보지 못한 배려를 타인에게 받는다는 건 어색한 기쁨이었다. 그것도 나보다 어린 친구에게 말이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나는 조장에게 처음으로 사람에게 빚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중에 이자 쳐서 갚지 뭐. 그래도 진짜 고맙네.’
7월 1일. 홍콩은 약속되어 있듯이 중국으로 반환되었다.
8월 6일. 대한항공 여객기 801편이 괌에서 추락했다.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나는 매달 1일 은행으로 갔다. 환전을 하고 통장에 입금했다.
아직 환율 변동은 없었다. 그리고 계속 변동은 없을 것이다. 11월 3일 이전까지는.
나는 지금 2달 동안 모은 1,300만 원이 넘는 돈으로 뭔가를 할 생각이 없었다.
확실하지 않은 무엇인가에 도박하듯 걸기보다는 확실한 것에다가 투자를 할 것이다.
좁디좁은 배관에 혼자 있으면서 할 수 있는 것은 생각뿐이다. 손은 쉴 새 없이 바쁘지만, 머리가 필요한 일은 아니었다.
과거를 떠올리며 주식을 한다면 어디에 투자를 해야 할지 충분한 고민을 할 수 있었다.
‘주식은 보험일 뿐이야.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이제 4개월 후 나라가 망할 것처럼 들썩이는 그날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