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5화
때를 기다리다(2)
점심을 먹고 다시 배관에 매달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다시 배관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성훈아, 쉬었다가 해.”
“네, 비키세요. 형님.”
아까보다 더 많은 찌꺼기가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조장이 음료수 캔을 내밀었다.
따악.
“벌써 참 먹을 시간이에요?”
“이 친구야, 퇴근할 시간이 다 돼간다. 천천히 하라니까.”
그러면서도 밖으로 나온 찌꺼기 더미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조장이었다.
“힘들지. 근데 이 일 계속할 거야?”
드디어 올 것이 왔다.
‘그래도 이 친구, 바보는 아니네.’
조장은 다른 사람이 하기를 꺼려하는 일을 할 사람을 찾았다. 나는 계속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찾았고.
사실 이전 삶에서, 멋모르고 열심히만 일할 때 이런 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술 먹을 돈이 필요했던 것이지, 미래를 위한 돈이 필요하지 않아서 거절했었다.
또한 내가 고작 이런 일이나 할 사람으로 보이냐는 건방진 자신감도 있었다. 젊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나는 젊지 않다. 몸뚱이만 젊다.
접대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말을 빙빙 돌린다는 것이 귀찮았다.
내 앞의 어린 녀석이 알아들을지도 미지수고. 그래서 대놓고 말했다.
“네! 형님. 힘들고 더럽고를 떠나서 지금은 돈이 필요합니다.”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되니까 ‘형님’ 하는 소리가 술술 나왔다.
‘무슨 상관이야.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이 몸을 하고 형님이라 부르라는 것도 웃기지.’
각오로 이글거리는 눈을 조장에게 쏘아 보냈다. 지금 당장은 이 일을 잡아야 했다.
이 일에 집착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배관의 찌꺼기는 화학공장에 불이 켜져 있는 한 계속 쌓인다.
화학공장은 불 꺼지면 망한다. 철강 회사나 마찬가지다.
배관이 막히면 그거 뚫는 데 걸리는 비용이 어마어마하고, 그동안 라인이 멎는다.
도시에 전력은 끊겨도 화학공장 전기는 안 끊긴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계속 돌린다.
‘고로 일거리가 계속 생긴다는 거지. 24시간 내내. 이거 긁으면 몽땅 돈이다.’
내게는 실리콘 찌꺼기가 금덩어리로 보였다.
“흠. 그럼 우리 회사에 취직할래?”
“아뇨. 그건 싫습니다.”
단호한 내 말에 그가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좋게 봐줘서 취직을 권하는데 싫다니! 나름 A급 직장이었다.
“형님! 저는 돈이 필요합니다. 일자리가 아니라.”
그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용직과 직원은 당연히 임금 차이가 난다.
직원은 월급이 200만 원이지만, 일용직은 일당 8만 원이다.
직원은 4대 보험을 들지만, 일용직은 들지 않는다. 직원은 안정적이지만, 일용직은 불안정하다.
하지만 순수하게 시급만 따진다면 일용직이 높다. 그러므로 일이 끊이지만 않는다면 일용직이 더 많은 돈을 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안정된 직장이 아니었다. 수중에 당장 들어오는 돈이었다.
“좋아. 내일부터 그럼 여기로 바로 출근할래?”
“연장 근무 있습니까? 야근은요?”
그의 호의에 나는 질문으로 답했다. 이왕 시작한 거 확실하게 물고 싶었다. 돈이 필요했으니까.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
“매일 야근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물은 데는 나름 계산이 있었다. 연장 근무는 시급이 1.5배, 야근은 시급이 2배다.
연장 근무는 저녁 6시~10시까지 대략 4시간이고, 야근은 밤 10시 이후로 4시간 이상이다. 기본 근무 8시간까지 포함하면 총 16시간 정도를 일한다.
시급이 1만 원일 때 기본 근무만 하면 8만 원지만, 연장 근무를 하면 14만 원, 야근까지 하게 되면 22만 원이 된다.
일당쟁이들 세금 떼는 거 봤나? 그리고 배관의 때는 계속 새롭게 쌓인다.
“한다는 사람만 있으면 매일도 할 수 있지. 하지만 몸이 버텨내나.”
“매일 하겠습니다. 저 돈 필요합니다. 그것도 많이.”
아마 조장은 어린놈이 돈독이 올랐나 싶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런 눈으로 나를 보고 있으니 말이다.
“잠은?”
당연한 질문 아닌가? 16시간 일하면 잠은 언제 자는가? 얼굴에 철판 깔기로 했다.
“형님! 기숙사에 빈자리 하나 주십시오. 왔다 갔다 하면 잠잘 시간 없습니다.”
“햐, 이 친구 보게. 날로 먹을라드네. 그럼 밥은? 밥 먹을 시간도 없냐?”
“식당에서 먹게 해주십시오.”
“허허허, 그래. 그래라. 대신 열심히 해야 된다.”
하루 일과가 단순하게 짜여졌다.
7시 기상, 뉴스 시청, 8시 반 식사, 9시부터 새벽 2시까지 근무.
매일 아침 뉴스를 보는 것은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껍데기는 스물넷, 그 알맹이는 마흔둘. H.O.T를 보며 열광하기에는 너무 성숙해 버렸다.
당연히 사회 경제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지만. 중요한 건 다른 것이었다.
‘확인해야 해! 정말 그런지. 그냥 돌아왔다고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어.’
나는 이제 철부지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한 달 후인 6월 3일. 아침부터 TV가 목청을 높여댔다.
“자금난으로 지난 5월 30일 법정관리를 신청한 한신공영은 어제 2일 최종적으로 부도 처리가 되었습니다.”
“왜 부도가 났습니까?”
“네, 한신공영은 지난달 31일 하나은행 신사동지점에 지급 요구된 1백 14억 9천 5백만 원을 비롯하여 총 2백 16억 1천 1백만 원의 어음을 결제하지 못해 1차 부도를 낸 데 이어 2일에도 이를 막지 못해 부도가 났습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한신공영의 주거래은행인 서울은행은 일단 법정관리 신청에 동의한 후 제삼자 인수를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더 자세한 소식은 파악이 되는 대로 바로 전해 드리겠습니다.”
현장기자와 앵커가 서로 핑퐁 치듯이 말을 주고받으며 한신공영의 부도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아침 식사 후, 배관으로 가기 전에 조장을 찾았다.
“형님, 저 은행 좀 다녀올게요.”
“그래, 가끔씩 찬바람도 좀 쐬고 해라. 그래 봐야 코앞이지만.”
그렇다. 아주 다행스럽게도 공장 바로 옆에 OO은행이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달러 통장을 만들었다.
660만 원을 환전했다. 수수료 1.5% 포함한 금액이 974.4원이었다. 6,773달러가 나왔다.
환전하고 바로 통장으로 집어넣었다. 뿌듯한 마음을 안고 공장으로 돌아왔다.
“워낙 떠들썩하게 난리가 났었으니, 기억하지 않으래야 안 할 수가 있어야지.”
대기업이, 그것도 손가락에 꼽을 만한 대기업이 부도가 나는 일이었으니 20년 전의 일이라도 내 머리에도 남아 있었다.
뉴스를 들으면서 나는 확신했다. 더 이상 의심할 것이 없었다.
‘며칠 전만 해도 한신공영이 망할 거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대한민국 국민들 중, 어느 누구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1997년 11월 3일! IMF는 반드시 온다. 이번 삶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