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신 3화
새로운 인생(2)
오늘은 1997년 4월 28일이다.
“새로운 인생이 주어진 것인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결과는 보는 대로다.
“다시 그렇게 병신같이 살 수는 없지.”
인생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게 뭐가 있을까?
인생 뭐 있어? 대충 살다 가면 되지.
그래서 나는 망했다. 이번에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며 살고 싶다.
이전에는 몰랐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남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지금의 학교에 왔다. 나는 열심히 하지 않았다. 수업 이외의 것은 공부하지 않았다.
공부를 열심히 했었다면, 서울대를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차라리 고등학교 일 학년으로 돌아갔다면 좋았겠지만…….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다시 공부해서 서울대를 가 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20년이 넘도록 입시 공부를 하지 않았다. 가능성이 낮았다. 인생 경험으로 시험을 친다면 압도적인 결과를 내겠지만.
지금은 수능 시대이다. 나는 학력고사 마지막 세대이고, 전혀 다른 관점에서 공부를 해야 하는데, 미친 짓이다. 시간낭비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나중에 스펙 딸리면 서울대 대학원이라도 가면 되지. 뭐.”
나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은-아이들이 맞다.
지금의 내게는-감히 고개도 못 들 정도의 스펙과 실전 능력을 갖추게 될 테니까. 아니, 그렇게 만들 테니까.
고민의 결과, 돈, 건강, 경제 지식, 법률 지식. 이 네 가지로 함축되었다.
마흔 인생을 살아보니 이것만 있으면 대부분을 해결할 수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더 단순화했다. 돈, 건강, 사람으로. 세 개로 압축한 이유는 간단했다.
돈 있고, 건강하고, 든든한 인맥이 있는데, 하고자 하는 바가 막힐 일이 있을까?
돈은 벌면 되고, 건강은 챙기면 되고, 인맥은 만들면 된다.
24살의 나에게 불가능은 없어 보였다.
“올해 말에 IMF가 있었지. 이것 때문에 취업이 어려워졌었고.”
금융위기 이후로 한동안 건설 경기가 얼어붙었다.
건설 회사들이 움직이지 않으니, 나 같은 건축과 학생들은 갈 곳이 없었다. 결국은 나도 생각지도 않았던 가구 회사로 들어가지 않았던가!
동기들 중에 제대로 건설 관련 계통으로 취업한 친구들은 반도 없었다. 그나마도 십 년 뒤에는 거기서 반으로 줄어들었고.
“IMF라.”
그것은 국가적인 재난이요, 위기였다. 하지만 내게는 기회로 보였다.
“일단 종잣돈을 만들자. 급속한 경제 성장이 거품이라는 게 드러나면서 달러가 두 배로 뛰었었지. 가지고만 있어도 두 배 이득이지!”
단 두 달 사이에 200% 이득을 보는 것을 못 챙겨서야 과거로 돌아온 의미가 없다.
‘남에게 피해를 주고, 미래를 변화시키는 거라면 피해야겠지만 이건 그런 게 아니잖아.’
건강은? 건강하다. 제대하고 열흘도 안 된 젊은 몸이었다. 팔뚝에 자리 잡은 이두근이 각을 세우고 있었다.
“하긴. 말년에 할 게 없어서 맨날 역기만 들었지.”
서른다섯에 종합검진을 받았을 때도 충치 말고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 이후로는 일에 치여서 받지 못했다.
적어도 큰 변화가 없다면 그 전에 내가 병으로 쓰러질 일은 없을 것이다.
친구는? 지금부터 만들어 가면 된다. 술친구 말고 믿을 수 있는 친구를. 그건 복학한 뒤로 미루었다.
삐까 번쩍 일류대도 아니고, 지금 당장 생각나는 놈들은 술 잘 먹고 여자 밝히는 놈들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좀 쓸 만하고 믿을 만한 놈을 친구로 사귀어야지. 돼먹지 못한 술꾼들과는 연을 끊어야지.”
전생의 내 친구들은 지금의 나에게는 요주의 대상이 되었다.
젊음을 불사르고, 중년에 재가 된 놈들! 아무 짝에 쓸모없다. 그중에는 나에게 사기를 친 놈도 있었다.
“나중에 한 번 밟아줘야겠다. 망할 자식!”
“엄마.”
“와? 불렀으면 말을 해야지.”
일에서 돌아온 어머니는 지친 기색이었지만, 나를 돌아보더니 내 볼을 만지며 말했다.
“아이구, 우리 아들. 군대도 갔다 오고. 언제 이리 컸노? 나는 해준 것도 없는데.”
어머니는 항상 내게 미안해했었고, 나를 원망하지도 않았었다. 돌아가실 때까지도.
너무너무 오랜만에 불러보는 호칭이었다.
내 입으로 자연스레 흘러나온 그 말이 난 너무 어색했다.
‘엄마’라는 말이 원래 이런 느낌이었던가?
어머니 장례식장에서 이모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느그 엄마가 꼭 전해 달라 카드라.’
‘…….’
‘엄마 노릇 제대로 몬해가 미안타꼬. 다음 세상에는 잘하꾸마꼬.’
그래, 나는 그 말을 듣고 울었었다. 그동안 잊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내가 잘해야 한다.
어머니는 자신의 인생 전체를 바쳐 나에게 사랑을 주었던 사람이다.
나는 코끝을 비비며, 눈물을 삼켰다.
“와? 말을 해라.”
“응. 아니. 나 내일부터 울산 내려갈 거예요. 일하러.”
엄마의 눈이 동그래졌다. 제대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으니 한동안은 있을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뭐할라꼬? 몇 달 더 쉬지. 니 줄라꼬 꼬추 짱아찌도 어제 담갔는데.”
“먹으러 올게요. 울산에 일할 데 많더라. 거기 화학공장 많거든. 일당도 세다. 하루 8만 원 정도 해.”
정확하지 않지만 예전에 그러니까 지금, 아니, 20년 전에는 그렇게 받았었다. 물론 술값으로 모두 날렸었지만.
아직은 시간관념이 헷갈린다. 혼자 생각하는 거니 미친놈이라고 부르지는 않겠지.
“와? 복학할라믄 아직 시간 있는데, 좀 쉬었다가 하지?”
어머니는 만난 지 며칠도 안 지났는데, 벌써 헤어지게 되니 내심 아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시간이 많지 않았다. 기회는 다가오는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통째로 날리게 된다.
그리고 다시 기회를 기다리기엔 삶이 너무 각박했다. 빨리, 가능한 한 빨리, 준비를 하고 싶었다.
그날 나는 엄마를 꼭 껴안고 잠들었다.
엄마에게 안기는 것이 아니라, 엄마에게 팔베개를 해주고 꼭 껴안아 주었다. 지금 엄마는 이전의 나보다 한 살이 어렸다. 그리고 내 품에 쏙 들어올 정도로 여렸다.
‘엄마! 사랑해요.’
울산에 왔지만 거창한 계획은 없었다.
일을 해야 했다. 새벽에 직업소개소를 찾았다. 공업도시라서 일할 곳은 많았고, 사람은 항상 모자랐다.
“사장님! 더럽고 힘든 일 안 가립니다. 돈만 많이 주면 됩니다.”
험상궂게 생긴 사장이 웃었다. 며칠이나 가는지 보자는 눈빛이었다.
“그래? 알았다. 좀 앉아서 기다리그라.”
사람이 모이자, 사장이 분류를 하고 봉고에 사람들을 때려 넣었다. 아니, 구겨 넣었다.
12인승 봉고에 15명이 탔으니 구겨 넣은 거라고 한 것이다. 봉고차는 신나게 달려서 공단에 도착했다. 필요한 사람 수대로 공단에 내렸다.
화학공단이었다.
예측했던 대로였다. 전생에서도 알바를 하게 되면 화학공단에서 주로 일을 했었다.
나와 함께 2명의 아저씨가 내렸다.
“열심히 일 안 하고 말 나오게 하면 내일부터 일 없어. 알지! 그리고 이놈 잘 가르쳐!”
못 미더운 눈초리를 나를 보며 엄포를 놓았다. 걱정 말라며 웃어주었다.
‘가르치다니, 누가 누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