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머리 감독의 할리우드 정복기-141화 (141/145)

# 141 < 히어로 영화 시대의 시작 (2) >

253.

김포 국제 공항.

비행기 한 대가 미끄러지듯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비행기에서 내린 이는 나를 비롯한 영화사 Film Kim 관계자들이었다.

내가 오늘 한국을 찾은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2년 전,

나는 한국의 IMF 경제 위기를 이용해 본격적인 극장 체인 설립을 시작했는데, 바로 오늘이 Film Kim의 이름을 내건 극장이 처음 문을 여는 날이었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하지. 곧이어 서울의 주요 도심은 물론 지방 광역시와 소도시까지 빠짐없이 우리 Film Kim의 간판이 걸린 극장 체인이 문을 열게 될 테니까. 마치 전생에 CV나 로테와 같은 기업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Film Kim이 설립한 극장은 이전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퀄리티를 가지고 있었다.

기존의 한국 영화관은 단 1개의 스크린만 보유한 단관 극장이 주를 이루고 있었는데 반해, Film Kim이 설립한 극장은 최소 5개 이상의 스크린을 보유한 멀티 플렉스 형식의 극장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다양한 음식과 오락 거리, 쇼핑몰까지 접목된 일종의 복합 문화 공간의 형식을 띠고 있었다.

‘전생의 내 기억에 따르면 2000년대 들어 한국의 영화산업은 폭발적인 성장을 하게 되고, 이에 상영관도 북미 지역과 유사한 멀티 플렉스 형태로 바뀌기 시작하지. 우리 Film Kim은 그보다 한발 앞서 이런 형식의 극장 체인을 설립한 것이고.’

THX 인증을 거친 고해상도 와이드 스크린과 음향시설,

여기에 단순히 영화 관람만이 아닌 다양한 먹거리와 즐길 거리가 갖추어진 Film Kim의 극장 체인은 한국의 영화 관람 문화 수준을 한층 더 높이기에 충분했다.

“사장님.”

개관식을 앞두고,

Film Kim의 극장 체인 사업을 총괄하고 있는 미셸 예 지부장이 나를 찾아왔다.

이전까지 홍콩 영화 사업을 책임지고 있던 그녀는 Film Kim의 홍콩 철수를 계기로 다시 한국으로 자리를 옮겨 이번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죠, 미셸 양. 극장 체인을 설립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닌데.”

“고생은요. 그리고 사장님이 본사에서 여러 인력을 많이 보내주셔서 일하기가 훨씬 수월했어요.”

“그나마 다행이군요, 하하.”

내가 다시 미셸 예에게 말했다.

“앞으로 한국 영화 시장은 북미 시장만큼이나 중요한 우리 회사의 수익원이 될 거예요. 요 근래 한국 경제가 다소 어려움에 빠지기는 했지만, 워낙 저력이 있는 나라라 이를 쉽게 극복하고 예전보다 훨씬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룰 것이 분명하니까요. 그렇게 되면 문화 수준도 덩달아 높아져 영화에 대한 수요도 한결 커지게 될 것이고요.”

전생의 기억을 토대로 한 말이었다.

지금 내가 한 말은.

물론 미셸 예는 꿈에도 이를 생각하지 못하겠지만.

“안 그래도 최근 한국 정부가 IMF로부터 빌린 외채를 조기에 상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발표를 하더라고요. 우리 Film Kim의 극장 체인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와 맞물려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그러게요. 자, 그럼 곧 개관식이 시작될 것 같으니 우리도 얼른 자리를 옮기도록 하죠.”

“예, 사장님.”

***

Film Kim의 극장 체인은,

대한민국 영화산업의 판도를 바꾸어 놓을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대규모의 자본이 투입된 멀티 플렉스 극장이 전국 각지에 속속 설립됨에 따라 기존의 단관 극장들은 점차 폐업의 수순을 밟게 된 것이다.

덕분에 우리 Film Kim은 한국 영화 시장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할 수 있었다.

물론 이 같은 상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현행 법률로는 Film Kim의 극장 체인 확장세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오히려 다른 대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우리 Film Kim과 같은 극장 체인 설립에 앞장서게 됨에 따라 영세 극장은 완전히 몰락하고 대기업 중심으로 영화 상영 시장이 재편되었다.

‘하지만 이 사업을 가장 먼저 시작한 Film Kim만큼의 선점 효과는 다른 기업들이 누릴 수 없는 부분이지. 게다가 우리 회사는 단순히 영화를 배급, 상영하는 수준을 넘어 영화의 제작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까. 그것도 내가 가진 전생의 기억을 바탕으로 앞으로 흥행에 성공할 다양한 종류의 영화를 미리 선점해나가면 당분간은 한국 영화 시장에서는 우리 Film Kim의 독주를 막을 수 있는 회사는 없을 테지.’

지난 20년간의 홍콩 영화 시장에 이어,

앞으로 20년간은 한국 영화 시장을 우리 Film Kim이 독점적으로 장악할 수 있는 완벽한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254.

영화사 Film Kim.

올해 우리 회사 최고의 야심작인 영화 <스파이더맨> 제작 회의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영화 제작 초기,

다시 말해 포스트 프로덕션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은 각본 제작과 배우 캐스팅이다.

관객을 영화에 빠져들게 만드는 흡입력 있는 각본과 이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배우의 캐스팅은 영화의 성공 여부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약 석 달간에 걸쳐 진행된 작업을 통해 이번 영화의 각본은 이미 완성된 단계이지. 이제 남은 것은 주연 배우를 캐스팅하는 것인데......’

사실,

이번 영화의 연출은 맡은 제임스 카메룬은 각본 제작 단계에서부터 염두에 두고 있는 배우가 한 명 있었다.

그는 바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요?”

나의 물음에 제임스 카메룬이 대답했다.

“예. 곱상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강렬해 보이기도 하는 레오의 이미지는 이번 영화의 주인공 피터 역에 매우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레오야 뭐, 자타가 공인하는 할리우드 최고의 배우이긴 하죠. 앞선 영화 <타이타닉>을 통해 지미와 좋은 호흡을 선보이기도 했고요.”

전생의 내 기억에 따르면,

영화 <스파이더맨>의 주인공은 ‘토비 맥과이어’라는 배우였다.

TV 아역 배우 출신인 그는 여러 영화에 출연하며 할리우드 영화계에 조금씩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중적인 인지도는 그렇게 높지 않았는데, 그런 그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준 영화가 바로 <스파이더맨> 시리즈였다.

‘감독이 바뀌니까, 주연 배우도 바뀌게 되는군. 뭐, 그래도 할 수 없지. 방금 제임스 카메룬이 말했듯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도 피터 역에 꽤나 잘 어울리는 배우이니까. 실제 영화의 제작 단계에서도 그의 이름이 거론된 적이 있었기도 하고.’

“주연 배우 캐스팅 문제는 이번 영화의 연출을 맡은 지미의 의견을 전적으로 따르도록 할게요. 지미가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는 영화의 이미지가 있을 테니까 말이죠.”

“고마워요, 킴.”

하지만,

실제 캐스팅은 제임스 카메룬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주인공 피터 역을 제안받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기존의 소년 같은 이미지에서 벗어나 다양한 연기 변신을 하고 싶다’라는 이유로 이번 영화의 출연을 거절했다.

결국 주인공 피터 역은,

전생과 마찬가지로 나의 추천을 받은 ‘토비 맥과이어’로 낙점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대중적 인지도가 낮은 그를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제임스 카메룬도 오디션을 통해 그의 연기력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그의 출연을 승낙했다.

‘아무래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인가 보군. 토비 맥과이어가 스파이더맨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은 말이야, 흐흐.’

그리고,

각본과 주연 배우 캐스팅이 모두 완료된 영화 <스파이더맨>은 곧바로 프로덕션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

2000년 가을.

영화 <스파이더맨>이 크랭크 인 됐다.

이번 영화는 로케이션 촬영만큼이나 스튜디오 촬영의 비중이 높은 영화였다.

주인공 피터의 일상적인 모습을 제외한 나머지 액션 씬, 가령 예를 들면 거미줄을 타고 도심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모습은 모두 CG로 배경처리가 이루어질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이에 Film Kim 본사에는 이번 영화 촬영을 위한 대규모의 특별 스튜디오가 제작되기도 했다.

‘이번 영화는 ‘90년대의 클래식함’과 ‘21세기의 테크놀로지’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합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영화라고 할 수 있지.’

영화 <스파이더맨>의 촬영 장면을 지켜보며,

내가 영화의 이 같은 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두 장면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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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차에서 내리는 주인공 피터를 삼촌인 벤이 붙잡았다.

“왜요, 삼촌?”

“내가 가만 생각해보니 우리가 오랫동안 대화를 하지 못한 것 같아. 그 사이 피터 네가 많이 변한 것 같고.”

“제가 변하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네가 꼭 해야 할 일은 미루면서 이상한 실험이나 하고 있고, 또 며칠 전에 있었던 친구와의 싸움도 그렇고.”

“그건 제 잘못이 아니에요. 플래쉬 그 자식이 예전부터 저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어쨌든 싸웠잖아. 그건 분명 옳지 않은 일이야.”

“그럼 도망가요? 비굴하게 무릎 꿇고 빌기라도 해야 했나요?”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그날 싸움의 원인이 플래쉬 탓이었다고 해도 네가 그 애를 때릴 권리는 없다는 거야.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피터.”

벤의 진심 어린 충고에도 불구하고,

피터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우연히 참석한 실험실에서 거미에게 물린 이후 초인적인 힘을 가지게 된 피터,

그런 그에게는 지금 전혀 무서울 것도, 거리낄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제발 설교 좀 그만하세요. 삼촌이 제 아버지도 아니잖아요.”

“피, 피터.”

“저 그만 가볼게요.”

쌩하니 차에서 내려 학교로 들어가는 피터.

그런데.

그때까지만 해도 피터는 알지 못했다.

그것이 삼촌이 자신에게 해준 마지막 충고가 되리라는 것을.

왜냐하면 그날 밤 삼촌 벤은 길거리에서 강도가 쏜 총에 맞아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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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블 코믹스의 히어로 캐릭터들이 저마다 하나씩의 특별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지. 스파이더맨도 마찬가지야. 정의를 수호하는 영웅으로서 스파이더맨의 정체성을 만들어준 것은 바로 삼촌의 죽음과 그에 대한 후회 내지는 자책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뒤이어 또 하나의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앞선 장면이 ‘90년대의 클래식함’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이번 장면은 발전된 CG 기술이 접목된 ‘21세기 테크놀로지’가 유감없이 발현된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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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한가운데 축제 현장.

주인공 피터가 무수히 많은 인파들 사이에 서 있었다.

그런데.

- 위이이잉!

저 멀리 하늘 높은 곳에서 정체불명의 비행 물체가 날아들었다.

“저건 뭐지?”

“못 보던 건데?”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비행 물체를 향해 쏠렸다.

잠시 후.

드디어 비행 물체의 정체가 드러났는데, 그것은 바로 악당 ‘그린 고블린’이었다.

“오 마이 갓!”

“노!”

“아아악!”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함께,

- 펑!

- 퍼펑!

- 쿠콰쾅!

그린 고블린이 던진 폭탄이 도심 여기저기에서 연쇄적인 폭발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축제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살려줘, 해리!”

“안 돼, 엠제이!”

건물 높은 곳에 서 있던 여주인공 엠제이가 붕괴된 건물 잔해와 함께 바닥으로 추락을 시작했다.

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피터가 황급히 그녀의 곁으로 달려가며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던졌다.

피터의 옷 안에는 스파이더맨 복장이 숨겨져 있었다.

- 쉬이이익!

스파이더맨의 손에서 발사된 거미줄이 엠제이를 낚아챘다.

덕분에 그녀는 구사일생으로 추락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

“스파이더맨이다!”

“우와아!”

군중들의 환호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스파이더맨이 순식간에 몸을 날려 그린 고블린을 공격했다.

곳곳에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구해내면서.

“두고 보자, 스파이더맨. 우린 또다시 만나게 될 테니까.”

스파이더맨의 거센 공격으로 수세에 몰린 그린 고블린이 황급히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틈을 타 스파이더맨이 공중에 매달려 있는 엠제이를 안고 안전한 곳으로 날아갔다.

스파이더맨 특유의 거미줄을 타고 빌딩 숲을 헤쳐 나가는 아찔한 곡예를 선보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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