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 최초의 생존 게임 영화 <배틀 필드> (5) >
213.
영화 <배틀 필드>가 크랭크 인 된 지도 어느덧 4개월.
촬영은 이제 거의 막바지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지난 4개월 동안 나는 촬영장과 회사를 오가며 몹시도 바쁜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촬영장에서는 영화감독으로서 영화 촬영 전반을 진두지휘하고,
회사에서는 최고 경영자로서 투자할 영화를 최종 컨택하는 작업을 병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여러 명의 세컨 유닛 감독들이 촬영을 분담한 덕분에 다소 시간적 여유를 많이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 킴. 정말 오래간만이네요.”
평소 친분이 있는 영화감독 하나가 나를 찾아왔다.
영화 <백 투 더 퓨처> 시리즈로 유명한 로버트 저메스키 감독이었다.
로버트 저메스키 감독과 내가 인연을 맺은 것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을 통해서였다.
몇 해 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자신의 수제자나 다름없는 로버트 저메스키를 나에게 소개해줬는데,
그의 나이가 나와 동갑인 관계로 이후 우리 두 사람의 사이는 급격하게 가까워지게 되었다.
“어서 와요, 로버트.”
“많이 바쁘죠? 내가 며칠 전에도 한번 킴을 찾아왔었는데, 자리에 없더라고요.”
“요즘 영화 촬영 때문에 현장에 나가 있는 날이 많아서요. 오늘은 다행히 촬영이 없는 날이라 로버트 얼굴을 볼 수 있게 됐네요, 하하.”
“그러게요, 하하.”
“아 참, 로버트도 이제 슬슬 새 작품 준비에 들어가야죠?”
“안 그래도 내가 그 일 때문에 킴을 찾아온 거예요.”
“준비하고 있는 새작품이 있나 보군요?”
“예. 사실 전 이번 작품도 스필버그 감독님 회사의 투자를 받아 제작하려고 했는데, 이미 여러 편의 영화 제작에 상당 금액을 투자한 관계로 지금은 자금적인 여유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할 수 없이 킴을 찾아왔어요.”
로버트 저메스키의 말을 듣는 순간,
내가 속으로 쾌재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영화 <백 투 더 퓨처> 시리즈 성공 이후 로버트 저메스키 감독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또 하나의 명작 영화를 만들어내게 되지. 그것도 월드 박스 오피스 7억 달러가량의 초 흥행작이 된 영화를 말이야.’
사실 나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나에게 로버트 저메스키를 소개해 준 당시에도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동안 그를 자주 만나 친분을 쌓아 온 것도, 또 여러 차례 그에게 영화 투자 의향을 밝혀 온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떤 영화에요? 이번에 로버트가 새로 준비하고 있는 작품은?”
“그게......”
로버트 저메스키가 가방에서 시나리오 책자 한 권을 꺼내 내 앞에 내려놓았다.
시나리오의 가장 첫 장에는 다음과 같은 제목이 적혀 있었다.
<포레스트 검프>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휴먼 드라마 형식의 영화였다.
줄거리는 대략 다음과 같았고.
------
경계성 지능 장애, 그리고 다소 불편한 다리를 가지고 있는 주인공 포레스트 검프.
하지만 강인하고 헌신적인 어머니의 보살핌 덕분에 사회적인 편견 속에서도 따뜻하고 순수한 마음을 간직한 사람으로 성장한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의 괴롭힘을 피해 도망치던 포레스트 검프는 자신의 특별한 재능 한 가지를 깨닫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누구보다 빠른 ‘달리기 실력’이었다.
이에 그는 자신의 달리기 실력을 바탕으로 여러 분야에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죽음,
뒤이어 첫사랑인 연인 제니마저도 그의 곁을 떠나면서 큰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되는데......
------
‘자극적인 액션과 화려한 CG가 난무하는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진정한 삶을 가치와 의미를 깨우쳐 준 감동적인 휴먼 드라마로 전 세계적으로 큰 흥행을 기록한 영화가 바로 지금 내 손에 들려 있는 <포레스트 검프>라는 영화이지.’
속마음을 감추며 내가 로버트 저메스키 감독에게 물었다.
“의외네요. SF 공상 과학 영화에 특출난 재능을 가진 로버트가 휴먼 드라마 적 요소가 강한 영화를 차기작으로 선택했다는 것이.”
“원작 소설이 워낙 제 마음에 와닿아서요. 아, 물론 시나리오는 원작과 다른 면이 많이 있지만 서도요.”
“내가 아는 로버트라면 분명 이번 영화도 훌륭하게 연출해낼 수 있을 겁니다. 앞선 영화 <백 투 더 퓨처>도 장르는 SF 영화이지만, 드라마 적인 요소와 코미디적인 요소가 적절하게 어우러져 아주 훌륭한 작품이 됐듯이요.”
“지금 그 말은 킴이 이번 내 영화에 투자를 하겠다는 뜻입니까?”
그야 당연하지.
제작비 대비 무려 10배가 넘는 엄청난 수익을 올리게 될 초 흥행작을 절대 놓칠 수는 없으니까.
“물론이죠. 원작 소설이 로버트의 마음에 와닿은 것처럼 이번 영화의 시나리오 또한 제 마음에 아주 깊게 와닿았으니까요.”
“정말 고마워요, 킴. 덕분에 나도 한시름 놓게 됐군요.”
“대신 제작에는 저도 함께 참여하는 걸로 해요. 물론 영화의 전반적인 사항들은 모두 로버트가 결정하고, 나는 그저 약간의 조언 정도만 하는 걸로 하고요.”
“그래요. 나도 킴이 제작에 참여하면 여러 가지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이로써,
세계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 영화 하나가 또 우리 Film Kim의 이름으로 제작되게 되었다.
물론 제작자인 내 이름도 영화의 처음과 시작을 장식하게 될 테고.
214.
영화 <배틀 필드> 촬영 현장.
스태프들이 분주히 오가며 촬영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앞으로 이틀간은 현장 촬영이, 다음 이틀간은 세트장 촬영이 진행될 예정이었다.
총 4일에 걸쳐 촬영이 예정된 이 장면은 모두 이번 영화의 대미를 장식할 엔딩 씬으로 사용될 예정이었다.
먼저 진행된 로케이션 촬영은,
총 40명이 참가한 서바이벌 생존 게임의 최종 우승자가 가려지는 장면이었다.
“카메라 스탠바이, 레디, 액션!”
- 탁
익숙한 슬레이트 소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영화 촬영이 시작되었다.
------
날이 밝기가 무섭게,
수많은 인파가 도심 중앙에 위치한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온갖 장신구와 화려한 옷으로 치장을 한 로열 계층들이었다.
이들의 시선은 온통 광장 한가운데 세워진 대형 전광판으로 향해 있었는데,
그 이유는 오늘이 서바이벌 생존 게임 ‘배틀 필드’의 최종 우승자가 가려지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노멀 계층이 거주하는 20개의 격리지역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은혜로운 분’의 특별한 배려로 노멀 계층도 오늘 하루만큼은 노동을 멈추고 경기를 지켜볼 수 있는 특혜가 주어졌고, 이에 노멀 계층들도 마을 광장에 세워진 모니터나 집안의 TV를 통해 숨죽이며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 스윽!
생존자 두 명 가운데 하나가 손에 든 칼을 들어 올렸다.
여주인공 ‘니즈’였다.
뒤이어 또 한 명의 생존자가 쌍검을 쥔 양손에 힘을 주었다.
남주인공 ‘워렌’이었다.
운명의 신은 가혹하게도,
한때 사랑했던 두 연인이 서로 칼을 겨누게 만든 것이다.
“이제 한 명 남았네.”
니즈가 워렌을 향해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제 나 하나만 죽이면 워렌 네가 그토록 바라던 로열 계층으로 신분 상승이 이루어지게 되겠구나.”
“......”
“어때? 한때 사랑했던 사람의 심장에 칼을 찔러 넣어야 하는 심정이.”
“......애초부터 우리 같은 노멀들에게는 사랑 같은 감정은 사치에 불과했어. 봐, 결국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상황이 이렇게 돼버렸잖아.”
“이제라도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 워렌. 덕분에 아무 죄책감 없이 편하게 널 죽일 수 있게 됐으니까.”
“훗, 네가 날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니즈?”
“글쎄,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알아 둬. 난 절대 워렌 너 같은 쓰레기의 손에 죽지 않을 거란 사실을.”
두 사람이 서로를 잔뜩 경계하며 거리를 좁혀가기 시작했다.
언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를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장면을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뉴월드(New World)의 창시자이자,
이 세계의 체제 유지를 위해 ‘배틀 필드’라는 비인간적인 게임을 만들어낸 ‘은혜로운 분’ 고든 이었다.
“흐흐. 내가 원했던 것이 바로 이런 그림이지. 한때는 서로 사랑했던 사이였지만 한 명은 탐욕 때문에, 그리고 또 한 명은 배신감 때문에 서로를 죽고 죽이는 상황. 이는 결국 노멀 계층이 서로를 불신하고 분열하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야.”
“그래서......”
로열 계층의 지도자 카멜이 고든에게 물었다.
“일부러 몰래 게임에 개입하신 것입니까?”
“물론이지. 각본 없는 드라마에서 극적인 연출을 기대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운 일이니까.”
“만에 하나 노멀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요? 공정한 게임이라고 생각했던 ‘배틀 필드’에 조작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저들이 가만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고든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공정한 게임이라는 것은 없어. 사람은 태생부터 불공정한 게임 속에 던져지는 법이지. 집안, 부모, 타고난 지능이나 재능에 따라 모두 다른 출발선에서 시작하게 된다는 뜻이야.”
“역시......”
카멜 역시 고든과 똑같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고든님의 혜안은 남다르십니다. 가히 이 세계의 창조주답습니다.”
“오, 이제 드디어 우승자가 가려진 모양이군.”
“역시나 우승자는 워렌이군요. 아, 설마 혹시 그것까지 예상하신 것입니까?”
“물론이지. 워렌 저 녀석은 참가자 가운데 가장 동기가 뚜렷한 놈이니까. 40명의 참가자 가운데 유일하게 이번 게임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놈은 저놈 한 놈뿐이거든, 흐흐흐.”
고든과 카멜의 시선이 머문 대형 모니터.
그 속에는 니즈의 심장 깊숙이 칼을 박아 넣은 워렌의 모습이 줌인(Zoom-In) 되어 나타나 있었다.
------
“컷, 오케이!”
메가폰을 타고 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 그럼 현장 정리하고, 곧바로 스튜디오로 이동합니다. 이제 마지막 씬 하나만 남겨두고 있으니, 다들 힘들어도 조금만 힘을 내도록 합시다.”
***
이어진 스튜디오 촬영 현장.
이곳에서 촬영될 마지막 씬은 우승자인 워렌이 ‘은혜로운 분’으로부터 영광스러운 신분 상승의 표식을 받게 되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이 마지막 장면에는 관객들이 미처 눈치채지 못한 반전 내용이 하나 숨겨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 준비 다 됐으면 곧바로 촬영 시작합니다.”
“카메라 스탠바이, 레디, 액션!”
메가폰을 타고 나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드디어 영화의 마지막 장면 촬영이 시작됐다.
------
- 저벅, 저벅!
총천연색으로 염색된 머리.
몸 곳곳에 치렁치렁 늘어진 장신구.
여기에 황금빛의 화려한 의복까지 갖춰 입은 남자 하나가 긴 통로를 걸어오고 있었다.
‘배틀 필드’의 최종 우승자인 워렌이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마찬가지로 화려한 옷차림과 장식을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뉴월드(New World)의 창시자, ‘은혜로운 분’ 고든이었다.
사실 뉴월드에는 엄격한 법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7명의 로열 계층의 지도자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은혜로운 분’을 독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배틀 필드’의 최종 우승자인 워렌에게는 한시적으로 이 법이 예외적으로 적용됐다.
물론 이 또한 노멀 계층을 회유하고, 선전하는 하나의 방편이었고.
- 털썩.
고든의 앞에 도착한 워렌이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이제 몇 가지의 의식만 끝나면,
워렌은 미천한 노멀 신분에서 벗어나 사회의 모든 것은 향유하는 고귀한 로열 계층으로의 신분 상승이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 이런 배은 망덕한......”
갑자기 고든이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 앞에는 품 안에 숨겨둔 단도를 손에 쥔 워렌이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고든의 사망을 시작으로 노멀 계층이 거주하는 20개 격리 지역에서 일제히 대규모의 폭동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랬다.
이 모든 상황은 처음부터 계획되어 있던 것이었다.
즉, 원래 워렌은 반군(反軍)의 지령을 받아 우승자의 자격으로 ‘은혜로운 분’ 고든을 암살하기 위해 이 게임에 참여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니즈 또한 이 사실을 모르고 게임에 참여하게 된다.
아니 애초부터 니즈의 게임 참여는 반군과 워렌의 계획에는 없던 일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워렌은 연인인 니즈의 차가운 태도도, 쏟아지는 경멸과 저주의 말도 혼자 감내해야만 했다.
하지만 경기 도중에 다친 워렌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니즈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워렌에 몸에 새겨진 작은 문신이었다.
‘자유’를 상징하는 독수리 모양의 문신.
이는 워렌이 반군(反軍)에 소속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표식이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