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 최초의 생존 게임 영화 <배틀 필드> (4) >
211.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서부의 애쉬빌(Asheville) 숲.
영화 <배틀 필드>의 주 촬영지였다.
사실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는 애쉬빌 숲 외에도 많은 장소가 물망에 올랐다.
하지만 직접 현장을 방문한 나는 곧바로 이곳을 이번 영화의 주 촬영지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넓은 숲과 폭포, 계곡, 동굴 등이 산재해 있어 ‘서바이벌 생존 게임’이라는 이번 영화의 주제와 아주 잘 어울리는 장소이기 때문이지.’
이번 영화는 액션 장면이 유독 많은 영화였다.
20개의 격리지역에서 참가한 총 40여 명의 참가자가 생존을 위해 서로 사투를 벌이는 장면이 영화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주연 배우들은 말할 것도 없고, 조연 배우들도 하루에 수 킬로미터를 뛰고 구르는 일을 반복해야 했다.
덕분에 배우들도 촬영 내내 크고 작은 부상을 달고 살다시피 할 정도로 많은 고생을 해야만 했고.
“자, 그럼 촬영 시작합니다.”
“씬 넘버(No.) 47, 카메라 스탠바이, 레디, 액션!”
메가폰을 타고 나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 첨벙, 첨벙!
물을 잔뜩 머금어 20파운드는 족히 나가는 장비를 둘러맨 안젤리나 졸리가 계곡을 가로질러 뛰기 시작했다.
그녀의 뒤로는 핸드헬드 카메라를 든 촬영팀이 뒤따르고 있었다.
현장감 있는 화면 연출을 위해 이번 영화의 액션과 추격 장면은 대부분 핸드헬드 카메라로 촬영되고 있었다.
더불어 후반 편집에서는 빠른 장면 전환으로 영화의 속도감도 부여할 예정이었다.
‘이번 영화의 원활한 촬영을 위해 출연 배우들은 모두 무려 8주에 걸친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아야 했지. 등반 훈련은 물론 다양한 형태의 무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트레이닝을 했고, 이런 배우들의 치열한 노력의 과정이 화면에 고스란히 드러나면서 관객들은 리얼하면서도 긴장감 넘치는 액션 장면이 주는 쾌감을 느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배우들에게 강조한 것은 내면 연기와 감정선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다수 액션 장면이 스턴트 대역 없이 진행됐고, 이렇게 만들어진 배우들의 과장되지 않은 사실적인 액션과 움직임은 관객들의 영화 몰입도를 높일 수 있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었다.
“컷, 오케이.”
뒤이어 여러 전투 씬 촬영이 진행됐다.
이번 영화의 액션 장면 촬영에는 할리우드의 유명 스턴트 코디네이터(무술 감독)가 여럿 참여하고 있었다.
유명 스턴트맨 출신인 이들은 이번 영화의 액션 장면 전반의 설계, 다시 말해 배우들의 동선과 무기 선별은 물론 와이어 등과 같은 장비의 설치까지 모두 전담하고 있었다.
덕분에 영화의 액션 장면도 이전보다 훨씬 풍부하고 다이나믹 해질 수 있었다.
배우들의 연기를 지켜보며,
내가 이번 영화의 완성된 장면을 머릿속으로 떠올려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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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4, 3......
‘배틀 필드’에 참가한 40명의 참가자 머리 위로,
홀로그램으로 표시된 숫자가 빠르게 지나가기 시작했다.
카운트가 ‘0’이 되는 순간,
이들은 본격적으로 서로를 죽고 죽이는 살육전을 벌이게 될 것이었다.
본격적인 게임 시작을 앞두고,
주인공 워렌과 니즈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일단 초반 전투는 피하고 최대한 오래 버티는 것,
그것이 전투에 참가하기 전 그들이 함께 세운 계획이었다.
뒤이어 숫자가 ‘0’으로 바뀌자,
주변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빠르게 무기를 손에 넣은 참가자들은 미처 무기를 챙기지 못한 참가자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기 시작한 것이다.
“커억!”
“으악!”
피와 살이 튀는 격전의 현장.
니즈와 워렌의 판단은 빨랐다.
잽싸게 가방과 무기를 챙겨 든 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울창한 숲 한가운데로 몸을 감추었다.
그런 그들의 뒤로,
사망자의 정보가 담긴 홀로그램 창이 연달아 떠오르고 있었다.
- 4구역 팀 로빈슨 사망.
- 10구역 제이미 도슨 사망.
- 18구역 티나 데이비스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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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내가 살던 전생에서는,
‘서바이벌 생존’이라는 용어는 그리 생소한 개념이 아니었다.
이를 소재로 한 많은 영화나 드라마, 심지어 TV 오디션 프로그램에서조차 이 서바이벌 생존 방식을 채택해 단 한 명의 우승자를 뽑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1990년대 초, 이 시대에는 서바이벌 생존 게임이라는 개념이 전무 했던 시대이지. 기껏해야 군대에서 군사적인 용도로만 한정적으로 사용됐을 뿐이니까.’
그런데 이번 영화 <배틀 필드>에서는 실제 현실 사회에 서바이벌 생존이라는 룰을 도입하고 있다.
그것도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옆에 있는 사람을 죽여야 하는 몹시도 잔혹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더군다나 게임이 진행되어 갈수록 살인을 마치 유희처럼 즐기는 무리까지 등장하게 된다.
‘전생에서 영화 <배틀로얄>이나 <헝거게임>이 역대 가장 충격적인 영화로 꼽힌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지. 관객들은 10대 청소년들이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잔인하게 죽이고, 이 과정에서 점차 살인 병기로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으니까 말이야.’
뒤이어 촬영된 장면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도덕성이나 인간성을 상실한 채 오로지 인간 사냥에 몰두하는 참가자들의 잔혹한 모습들이 계속해서 이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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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구역 참가자 짐 할렌.
압도적인 피지컬을 바탕으로 훈련 기간 동안 가장 높은 성적을 올리며 유력한 우승 후보로 손꼽혔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 1구역 짐 할렌 사망.
경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의 머리 위에 나타난 홀로그램을 본 참가자들이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가 너무나도 쉽게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짐 할렌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대략 이랬다.
- 저벅, 저벅!
최초 전투에서 손에 든 칼로 무려 5명을 죽인 짐 할렌.
칼날에 묻은 피를 혀로 핥으며 수풀로 들어서는 그의 모습은 살인귀나 다름없었다.
“흐흐.”
갑자기 걸음을 멈춘 짐 할렌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풀숲 사이에 죽어있는 어린 여성의 시체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이런 약골들은 절대 이곳에서 살아남지 못하게 돼 있지.”
짐 할렌이 죽은 여성의 옆에 떨어져 있는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전투력 못지않게 배틀 필드에서 살아남기 위해 중요한 것은 물과 식량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 팟!
죽어있던 여성이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뒤이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여성이 손에 감추고 있던 도끼를 짐 할렌의 머리에 내리꽂았다.
“커헉!”
외마디 비명과 함께 자리에 풀썩 쓰러지는 짐 할렌.
그랬다.
여성은 진짜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척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파 놓은 함정에 누군가 걸려들기를 기다리며.
“후후, 훈련 성적 1등도 별거 아니네.”
죽은 짐 할렌을 비웃듯이 내려다보며 여성이 말을 이었다.
“인생은 실전이야, 멍청아.”
짐 할렌의 머리에서 다시 도끼를 뽑아 든 여성이 유유히 풀숲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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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컷, 오케이. 좋았어요.”
메가폰을 타고 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전 일찍부터 시작된 촬영 현장은 이미 해가 저물어 어두워지고 있었다.
“오늘 촬영은 여기까지 합니다. 현장 정리되는 대로 다들 숙소로 복귀하세요.”
212.
영화사 Film Kim.
조지 루이스와 내가 영화 <배틀 필드>의 촬영본을 세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현장 촬영이 없는 날이면 우리 두 사람은 지금처럼 한자리에 모여 여태까지 촬영된 장면들에 대해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곤 했다.
“어때요, 조지? 별다른 문제 없어 보여요?”
나의 물음에 조지 루이스가 대답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이번 영화는 소재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큰 흥행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아. 특히 전투 씬들은 하나하나가 다 충격 그 자체군.”
“지금까지 서바이벌 생존 게임을 소재로 한 영화는 단 한 번도 만들어진 적이 없으니까요.”
“도대체 킴은 어떻게 이런 기발한 소재의 영화를 다 생각해냈는지 참으로 감탄스럽기 짝이 없군. 정말 대단해.”
조지 루이스가 연신 감탄을 쏟아냈다.
사실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서바이벌 생존 게임을 소재로 한 최초의 영화 <배틀로얄>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 일본뿐만이 아니라 할리우드의 유명 영화감독들도 그 소재의 기발함에 감탄을 금치 못했지. 특히 영화 <저수지의 개>와 <킬빌>이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당대에 나온 영화 가운데 가장 독보적인 1위로 <배틀로얄>을 꼽으며, 자신이 만들었으면 좋았을 영화가 있다면 바로 이 영화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번 영화는 <배틀로얄>의 참신함에 더해,
같은 종류의 영화인 <헝거 게임>의 화려한 화면 연출과 액션, 그리고 사회 비판적인 성격이 가미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번 영화가 실제 극장에서 본격적인 상영을 시작하게 되면 그 충격은 전생의 두 영화보다 훨씬 클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서바이벌 생존 게임 영화의 선두 주자 격인 두 영화의 장점만을 모두 모아 만든 영화가 바로 <배틀 필드>니까.’
“근데 말이야, 킴.”
조지 루이스가 나를 향해 말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어.”
“아쉬운 점요?”
“그래.”
“뭔데요, 그게?”
“영화에 잘 생기고 예쁜 남녀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둘 사이에 로맨스 적인 요소가 거의 없다는 거지. 할리우드 영화는 장르 불문하고 주인공의 로맨스가 필수 아니겠어? 특히나 여성 관객들의 입장에서는 말이야.”
“오! 조지.”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전에 각본 제작할 때도 말했잖아요. 이번 영화에는 절대 남녀의 로맨스를 넣지 않을 생각이라고요.”
“왜?”
“이번 영화는 처절한 ‘생존 게임’과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현실 사회 비판’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핵심인 영화이니까요. 그런데 괜히 로맨스적인 요소를 넣었다가 후반부에 가서 신파극이 돼서 이런 메시지가 흐려지면 곤란하니까요.”
전생의 경험을 토대로 한 말이었다.
지금 내가 조지 루이스에게 한 말은.
‘서바이벌 생존 게임 영화의 시초인 <배틀로얄>이 그랬었지. 무척이나 참신하고 충격적이었던 도입부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후반으로 갈수록 남녀의 연애 이야기나 낯간지러운 우정으로 영화의 내용을 포장하는 바람에 관객들의 기대감을 실망감으로 바꾸어버렸으니까 말이야.’
영화 <배틀로얄>은 충격적인 소재만큼이나 초반에 관객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데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이 죽음을 앞두고 사랑 고백을 하기 일쑤였고, 이로 인해 목숨을 건 생존 게임의 긴장감이 점점 사라지게 된다.
영화 내용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롭게 끌고 갈 수 있는 다양한 요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가장 최악인 생존 게임과 로맨스의 조합을 선택하면서 영화의 전개가 점점 산으로 흘러가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는 뒤이어 만들어진 영화 <헝거 게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주인공 남녀의 이성적인 감정 변화에 무게를 두게 됨에 따라 영화의 핵심 메시지 전체가 흔들리게 되는 아쉬움을 남기게 된다.
‘내가 이번 영화 <배틀 필드>에 로맨스적인 요소를 배제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지. 전생에서 본 두 영화와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하지만 제작자의 입장에서는 영화에 로맨스를 배제하는 것이 쉬운 선택은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랑’만큼 관객을 매료시킬 수 있는 주제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조지 루이스가 연신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실 나도 작품 주제만 놓고 보면 로맨스가 없는 것이 훨씬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흥행의 측면에서 보면 확실히 로맨스가 필요하기는 해. 많은 영화투자사나 제작자들이 감독의 의도와는 다르게 영화에 로맨스적 요소를 고집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고.”
“그런 점은 참 다행이네요. 이번 영화는 내가 투자자고, 조지로 제작자이니 그런 압박은 받지 않아도 되니까요.”
“끙. 그건 그렇긴 하지. 근데......”
조지 루이스가 빙긋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내 생각에는 킴이 로맨스 쪽에는 영 소질이 없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한데? 가만 보면 지금까지 킴은 로맨스 영화는 단 한 번도 만든 적이 없잖아, 흐흐.”
“설마요, 하하.”
조지 루이스는 아마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로맨스 영화를 ‘못’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안’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내가 마음만 먹으면 관객들의 눈물 콧물을 쏙 빼놓을 정도로 완벽한 영화를 만들 수도 있지. 전생에 최고의 로맨스 영화로 손꼽히며 무려 4억 달러가 넘는 흥행 성적을 올린 <라라랜드>나 <스타 이즈 본> 같은 영화 말이야,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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