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 < 재난 영화 <프로스트(Frost)> (3) >
DC와 더불어 미국 코믹북 시장의 양대 산맥인 마블(MARVEL).
하지만 19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면서 마블의 재정 상황은 점점 악화되기 시작한다.
할리우드로 대표되는 영화와 TV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코믹북에 대한 수요가 감소했기 때문이다.
궁여지책으로 마블은 회사가 보유하고 있는 캐릭터 판매를 통해 자금 확보에 나섰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여기에 경영진의 무리한 투자가 겹치면서 결국 1990년대 중반 마블은 법원에 파산 신청을 하게 된다.
하마터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했던 마블이 기사회생할 수 있었던 것은,
장난감 제조회사인 ‘토이 비즈’와의 합병 덕분이었다.
이후 마블은 자체적인 영화 제작 역량을 강화해 본격적인 영화시장 공략에 나섰고, 그 결과 마블 영화의 전성시대가 찾아오게 된 것이다.
‘독자적인 스튜디오 설립 이후 마블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수백 개의 캐릭터를 이용해 지속적인 시리즈 영화를 만들었고, 그 덕분에 해마다 수조 원에 달하는 수익을 올릴 수 있게 되었지. 그런데 만약 지금 내가 마블을 인수하게 된다면......’
앞으로 마블이 벌어들일 엄청난 수익이 모두 우리 Film Kim의 몫이 될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레이첼이 나를 향해 물었다.
“지금 킴은 마블 코믹스를 인수해서 이를 영화화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맞아요. 레이첼도 3년 전에 우리가 콜롬비아 픽처스를 인수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을 거예요.”
“물론이죠.”
“콜롬비아 픽처스의 인수가 우리 회사의 외연을 확장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면, 이번 마블 코믹스의 인수는 회사의 내실을 더욱 튼튼하게 만들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입니다. 현재 마블은 수백 개에 달하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보유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이들을 하나로 연결할 수 있는 거대한 세계관까지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에요.”
“흐음.”
레이첼이 살짝 고개를 갸우뚱했다.
전생에서 마블표 슈퍼 히어로 영화가 전 세계를 휩쓰는 장면을 목격한 나와 달리,
레이첼에게 마블의 코믹북은 그저 마니아층이나 보는 유치한 만화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전 마블 코믹스가 그만한 가치가 있는 회사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전 킴의 판단력을 누구보다 신뢰하는 사람이니 이번에도 킴을 믿고 따르도록 할게요.”
“고마워요, 레이첼.”
“아, 그러고 보니 영화 <프로스트>의 크랭크인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더군요?”
“예. 엊그제 프리 프로덕션이 마무리되었고, 당장 다음 주부터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에요.”
“그럼 이번에도 제가 세컨 유닛 감독을 맡아 킴의 영화 촬영을 좀 도와드릴까요?”
세컨 유닛 감독(Second Unit Director)이란 별도의 촬영팀을 구성해 영화의 부수적인 장면을 주로 촬영하는 역할을 말한다.
<체이스 오브 리벤지> 속편 촬영 때 내가 처음으로 도입한 이 촬영 방식은 현재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를 촬영하는 대다수 감독이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 되었다.
“레이첼이 도와준다면 나야 대환영이죠. 레이첼만큼 나의 연출 의도를 잘 파악하고 있는 감독도 드무니까요, 하하.”
172.
1989년 겨울.
약 3개월 간의 프리 프로덕션 기간을 거쳐,
드디어 영화 <프로스트>가 크랭크 인 됐다.
이번 영화는 재난 영화의 기본 공식에 충실한 영화였다.
최신 컴퓨터 그래픽(CG) 기술로 구현된 대규모의 재난 상황,
정부의 미온적인 대처로 발생한 엄청난 인명피해,
그리고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주인공 집단의 숭고한 휴머니즘 내지는 가족애.
‘만약 전생에서 내가 이런 내용의 재난 영화를 만들었다면 그저 그런 클리셰 영화 취급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지.’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한 실감 나는 재난 현장을 그려낸 영화는 이번이 최초였다.
더불어 막연한 상상에만 의존하던 기존 재난 영화와 달리 이번에 내가 만드는 영화는 지구 온난화와 해류의 움직임 변화라는 비교적 과학적인 근거에 기반한 내용이 들어있어 설득력을 더해주고 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이번 영화의 핵심은 압도적인 스펙터클에 있지. 관객들이 잠시도 스크린에서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대규모의 재난 상황이 영화 상영 내내 지속되고 있으니까 말이야.’
오락 영화에 걸맞는 화려한 볼거리.
이것만으로도 관객은 자신이 지불한 관람료가 절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 것이 분명했다.
“자, 준비 됐으면 바로 촬영 시작합니다.”
메가폰을 타고 나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일순간 촬영 현장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스탠바이, 3, 2, 1, 레디, 액션!”
- 딸깍!
둔탁한 슬레이트 소리를 시작으로,
오늘의 첫 촬영이 시작됐다.
------
- 휘이이잉!
거센 한파와 눈보라를 뚫고,
발머 박사를 중심으로 한 구조대가 뉴욕 시내로 접어들었다.
눈 속에 반쯤 파묻힌 채 얼어붙어 있는 자유의 여신상이 현재 인류가 직면해 있는 위기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 지직. 지지지직!
갑자기 구조대의 발밑에 있던 얼음이 갈라지더니, 일행 중의 한 명이 순식간에 아래로 추락했다.
“카일!”
발머 박사가 황급히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조금만 버텨! 우리가 다 같이 끌어올려 줄 테니까.”
하지만 상황은 여의치가 않았다.
서로의 몸에 묶여 있는 밧줄에 겨우 의지한 채 허공에 겨우 매달려 있는 카일을 당겨 올리기에는 바닥이 너무나 미끄러웠기 때문이다.
- 찌익, 찌이익!
카일의 몸무게로 인해 점점 구멍을 향해 끌려 들어가는 대원들.
이대로 조금만 더 시간을 지체하면 일행 모두가 다 추락해버리고 말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 순간.
“안 돼! 카일! 제발 그러지 마!”
허공에 매달리 카일이 가지고 있던 칼로 자신의 몸에 묶인 밧줄을 끊어내려 한 것이다.
자신의 희생으로 다른 대원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샘을 꼭 구해내게나, 발머.”
이 말을 끝으로,
- 툭!
밧줄을 끊은 카일은 수십 미터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다.
------
사실 이 장면은,
실제 빙판 위에서 촬영된 것이 아니라 정교하게 만들어진 세트장에서 촬영된 것이었다.
카일의 추락 장면 또한,
화면에서는 수십 미터 아래로 추락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불과 몇 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그것도 크로마키 처리된 푹신한 매트가 깔린 바닥으로.
‘하지만 여기에 정교한 CG가 덧입혀지면 정말로 실감 나는 위기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지.’
다른 주요 장면들도 마찬가지였다.
우주정거장에서 내려다보는 거대한 크기의 슈퍼 스톰.
LA 도심을 완전히 초토화한 강력한 허리케인.
뉴욕을 강타한 대규모의 해일.
영화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한파 등등,
컴퓨터 그래픽의 도움이 없었다면 절대 화면으로 구현 불가능한 장면이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 그럼......”
예정된 촬영 일정이 모두 끝나고, 내가 스태프들을 향해 말했다.
“오늘 촬영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현장 정리 끝나는 대로 다들 숙소로 복귀하세요.”
173.
영화 <프로스트>의 촬영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무렵,
주연 배우인 케빈 코스트너가 나를 찾아왔다.
“킴.”
“무슨 일이에요, 케빈?”
“내가 킴에게 상의할 일이 좀 있어서요.”
그동안 영화 촬영을 하며 우리 두 사람은 꽤 친한 사이로 발전했다.
특히 케빈 코스트너와 나의 나이 차는 4살 정도에 불과했고, 이는 우리 둘을 더욱 가깝게 만든 주된 요인이 되었다.
“말해봐요. 상의할 일이 뭔지.”
“듣자니 킴은 영화 시나리오를 보는 안목이 매우 뛰어나다고 하던데......”
케빈 코스트너가 시나리오 책자 하나를 내 앞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혹시 시간 날 때 이거 한 번만 검토해줘요.”
“이건......”
“내가 오래전부터 써오던 영화 시나리오인데, 꼭 한번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어서요. 내 손으로 직접 말이죠.”
내가 케빈 코스트너가 내민 시나리오로 눈길을 돌렸다.
시나리오의 가장 첫 장에는 다음과 같은 제목이 적혀 있었다.
순간 내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는 케빈 코스트너를 일약 할리우드 톱스타 반열에 올려놓은 영화과 동시에 전 세계적으로 무려 4억 달러가 넘는 관람료 수익을 올린 영화이기 때문이었다.
‘후후. 일전에 내가 케빈 코스트너를 처음 만났을 때, 좋은 시나리오를 가져오면 적극적으로 제작비를 지원해주겠다고 말한 효과가 있군. 이렇게 자신의 두 히트 작품 가운데 하나인 영화 <늑대와 춤을> 시나리오를 떡 하니 나에게 가져왔으니 말이야.’
속마음을 감추며 내가 말했다.
“<늑대와 춤을>이라. 굉장히 독특한 영화 제목이네요?”
“그게 말이죠......”
케빈 코스트너가 영화에 관한 대략적인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
미국 남북 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전쟁 영웅이 된 던바 중위는 다음 부임지로 서북 국경지대의 세즈윅 요새를 택하게 된다.
당시 그곳은 원주민인 인디언과 심한 대치 상황이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하지만 던바가 세즈윅에 도착했을 때는 병사들이 모두 요새를 탈주한 상태였다.
이에 던바는 말과 늑대를 친구 삼아 자연과 어우러진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던바는 인근의 수우족 인디언 부족과 접촉하게 되고 점점 이들에게 동화되어 간다.
수우족 인디언들은 사람의 특징을 보고 이름을 짓는 자신들의 전통에 따라 던바에게 ‘늑대와 춤을’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심지어 그곳에 사는 ‘주먹 쥐고 일어서’라는 이름의 백인 여자와 결혼까지 하게 된다.
하지만 이후 백인 병사들의 침략으로 수우족의 전통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원주민이 거주하던 서부 개척지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
“흠. 시나리오 내용은 전반적으로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요?”
“그래요?”
“예. 그동안 만들어진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대부분 백인의 적으로 묘사되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그들을 적이 아닌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 몹시도 신선하고 흥미롭군요. 무엇보다 서부의 대자연을 영상 속에 완벽하게 담아낼 수 있다면 이 영화는 할리우드 영화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인 작품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전생의 내 기억에 따르면,
영화 <늑대와 춤을>의 시나리오는 영화 제작사들로부터 환대를 받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영화를 제작하기는 했지만, 시사회에 참석한 평론가들의 반응 또한 혹평 일색이었다.
하지만 막상 영화가 개봉된 이후에는 상황이 반전됐다.
관객들의 엄청난 관심과 호평을 받으며 흥행에도 큰 성공을 거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알 리 없는 케빈 코스트너는,
시나리오에 대한 나의 긍정적인 반응에 무척이나 기쁜 표정을 지었다.
“역시 킴은 다르군요.”
“다르다니, 뭐가요?”
“사실 일전에 제가 이 시나리오를 들고 영화 제작사 몇 군데를 찾아가 봤는데, 다들 썩 좋지 않은 반응을 보일 뿐이더군요.”
“그야 사람마다 보는 시각이 다르니까요.”
내가 케빈 코스트너를 향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번 영화 촬영이 끝나는 대로 곧바로 이 시나리오로 영화 제작을 시작해요. 제작비는 전액 우리 Film Kim이 대는 것으로 하고요.”
“고마워요, 킴.”
“뭘요. 영화 제작자로서 좋은 시나리오를 보면 당연히 투자를 해야죠. 아, 연출은 케빈이 직접 할 생각이라고 그랬죠?”
“연출뿐만이 아니라 주연까지도 제가 직접 맡아서 할 생각입니다.”
“잘 생각했어요. 내 생각에 케빈만큼 이 영화에 잘 어울리는 배우를 찾기도 힘들 테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