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 재난 영화 <프로스트(Frost)> (2) >
170.
1989년 가을.
나의 7번째 연출작이 될 영화 <프로스트>가 프리 프로덕션에 들어갔다.
덕분에 나의 일상도 다시 바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실무는 감독급 스태프들의 지휘하에 각 팀별로 이루어지긴 하지만,
최종 결정은 어디까지나 감독 겸 제작자인 나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감독님, 27씬 스토리 보드 여기 두고 가겠습니다. 확인해주세요.”
“감독님, 의상팀과 소품팀에서 배우들 의상과 장비 최종 시안을 보내왔는데, 한번 확인해보시겠어요?”
“감독님, 로케이션 현장 사진 확인 부탁드려요.”
“감독님, 최종 예산안 작성이 완료됐는데, 살펴보시고 이상 없으면 결재 부탁드릴게요.”
잠시도 쉴 틈 없이 쏟아지는 업무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촬영 감독인 로저 디킨스, 그래픽 디자이너인 랄프 맥쿼리, 각본가 로런스 캐스던, 음악감독인 존 윌리엄스 등 일명 ‘제임스 킴 사단’이라 불리는 스태프들이 이번 영화 제작에 대거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웬만한 업무들은 큰 수정 지시 없이 한결 수월하게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일은 다 유능한 감독급 스태프들에게 맡겨도 주연 배우 캐스팅만큼은 예전처럼 내가 직접 나설 필요가 있어. 왜냐하면 할리우드 배우들의 능력과 발전 가능성을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도 없을 테니까 말이야.’
생각을 마친 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오후에,
이번 영화 <프로스트>의 주연을 맡을 배우와의 미팅 약속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
Film Kim 회의실.
내가 한 남자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남자의 정체는 바로,
‘케빈 코스트너. 1990년대 자신이 출연한 <늑대와 춤을>과 <보디가드> 두 영화가 연달아 흥행에 큰 성공을 거두게 되면서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명배우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인물이지.’
내가 이번 영화 <프로스트>의 주인공인 발머 박사 역에 케빈 코스트너를 캐스팅하려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그의 뛰어난 연기력이었다.
1980년대 초, 단역 배우로 연기 생활을 시작한 케빈 코스트너는 여러 편의 영화에 꾸준히 출연하면서 연기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특히 최근 그가 출연한 영화 <언터처블>에서는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연기파 배우인 숀 코너리와 로버트 드 니로와의 연기 대결에서도 밀리지 않았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연기력을 선보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케빈 코스트너 특유의 온화함과 반듯한 이미지가 아들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내걸고 폭풍 속으로 뛰어드는 부정(父情)을 보여주는 이번 영화의 주인공 발머 박사의 역할과 아주 잘 어울린다는 점이지.’
그런데.
내가 이번 영화의 주인공으로 케빈 코스트너를 캐스팅하려는 이유는 또 한 가지가 더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영화 배우로서의 능력 뿐만이 아니라 영화 제작자로서도 무척이나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케빈 코스트너를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명배우로 만들어준 영화 <늑대와 춤을>과 <보디가드>, 이 두 편의 영화는 놀랍게도 그가 직접 제작, 연출, 주연을 맡은 영화이지. 따라서 내가 만약 지금 그와 인연을 맺어준다면 1990년대를 대표하는 이 두 영화를 모두 우리 Film Kim의 이름으로 만들어 낼 수 있을 거야.’
이런 내 생각을 알 리 없는 케빈 코스트너가 무척이나 의외라는 표정으로 나를 향해 말했다.
“듣고도 믿지 않았는데, 이렇게 직접 눈으로 보니 그 소문이 정말 사실이었던 모양이군요.”
“소문이라면?”
“제임스 킴 감독님은 본인이 제작하는 영화의 주연 배우들을 대부분 직접 캐스팅한다는 소문 말입니다. 그리고 감독님의 컨택을 받아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은 여지없이 모두 큰 성공을 거두었고요.”
“훌륭한 배우와 완성도 있는 각본은 영화의 성공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니까요. 그래서 저는 다른 건 몰라도 시나리오 선정과 주연 배우 캐스팅만큼은 제가 직접 하는 편이지요.”
“감독님이......”
케빈 코스트너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왜 할리우드의 대세 감독인지 알 것 같습니다. 영화에 대한 열정이 이 정도로 상당하시니, 매번 영화가 성공을 거둘 수밖에요.”
“별말씀을요. 그보다 제가 보낸 시나리오는 받아 보셨습니까?”
“예. 그것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어봤습니다.”
“그렇다면 이번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잘 알고 계시겠군요.”
“물론입니다.”
“이번 영화에서 제가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기존의 그 어떤 영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스펙터클 한 재난 상황을 영상으로 구현하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자신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위험 속으로 뛰어든 아버지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려내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스펙터클 한 재난 상황은 연출을 맡고 있는 제가 책임지고 만들어낼 것입니다. 그러니 코스트너 씨께서는 감동적인 부정(父情)을 표현하는 데만 집중해주시면 됩니다.”
내가 덧붙여 말했다.
“아, 물론 이건 코스트너 씨가 이번 영화에 출연 승낙을 한다는 가정하에서 드리는 말씀이기는 하지만요.”
“저야 할리우드의 흥행 보증 수표라 불리는 제임스 킴 감독님이 연출하는 영화에 출연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영광이지요.”
흥행 보증 수표.
영화감독이라면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별명일 것이다.
물론 나 또한 마찬가지고.
“그럼 담당자를 불러 곧바로 계약을 체결하는 것으로 하죠. 혹시 영화 촬영 과정에서 코스트너 씨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뭐든 다 담당자에게 이야기하십시오. 배우들이 최적의 컨디션으로 영화 촬영에 임할 수 있도록 우리 Film Kim에서는 최선을 다하는 편이니까요.”
“알겠습니다.”
케빈 코스트너와의 계약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번 영화에서 그가 받을 출연료는 100만 달러 남짓.
<늑대와의 춤을>이란 영화가 성공하고 난 이후 편당 무려 1,500만 달러의 출연료를 받게 되는 대스타가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정도 액수는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할리우드 톱스타들은 영화 출연 계약 시 거액의 출연료와 더불어 일반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까다로운 요구사항을 내걸곤 하지. 가령 예령 들면 유명 할리우드 배우 중의 하나는 촬영장에 차를 마실 수 있는 개인 정원과 농구 코트, 야외 욕조, 그리고 개인용 비치 하우스를 설치해 줄 것을 요구했고, 이 때문에 제작사에서는 별도로 15만 달러의 비용을 더 제작비로 소모해야만 했지.’
하지만 케빈 코스트너는 아직 중견 배우에 불과했고,
그 때문에 이 같은 까다로운 요구 조건 없이 손쉽게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자,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코스트너 씨.”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독님.”
“아, 그리고......”
내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케빈 코스트너를 향해 말했다.
“듣자니 코스트너 씨는 영화 제작이나 연출 쪽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배우 생활을 하는 틈틈이 관련 공부도 하고, 또 시나리오도 써보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 초보 수준에 불과하기는 하지만요, 하하.”
“혹시나 좋은 작품을 구상하게 되면 가장 먼저 저에게 이야기해주세요. 우리 Film Kim이 적극적으로 제작비 지원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감독님.”
이로써,
나는 영화 <프로스트>의 주연 배우 캐스팅은 물론,
1990년대 전 세계를 강타할 두 편의 영화 <늑대와 춤을>과 <보디가드>까지도 선점할 수 있게 되었다.
171.
샌프란시스코의 ILM.
내가 벤자민 파웰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ILM의 CG 기술 개발을 총책임지고 있는 수석 엔지니어인 그는 벌써 여러 편의 영화 작업을 나와 함께 해오고 있었다.
‘주연을 맡은 케빈 코스트너가 이번 영화의 드라마적 요소를 완성할 중요한 인물이라면, 벤자민 파웰은 이번 영화의 기술적인 요소를 책임질 또 다른 중요한 인물이지.’
“재난 영화요?”
“예. 그래서 말인데, 이번 영화도 벤자민이 나를 도와 CG 제작을 좀 맡아줬으면 좋을 것 같아요.”
재난 영화의 성공 여부는 재난 상황을 얼마만큼 스펙타클하게 영상으로 구현해내는가에 달려 있다.
특히 이번 영화 <프로스트>는 영화 러닝타임의 상당 부분을 재난 상황을 표현하는데 할애하고 있다.
‘대형 토네이토의 발생으로 초토화된 LA 도심, 거대한 우박이 떨어져 아수라장으로 변한 일본 도쿄, 초속 7미터의 폭풍이 몰아치는 캐나다의 노바스코샤, 영하 100도가 넘는 강력한 한파로 마치 극지방처럼 변해버린 뉴욕 도심 등이 바로 그것이지.’
한참 동안 내 설명을 듣고 있던 벤자민 파웰이 말했다.
“이번에도 역시 쉽지 않은 작업이 되겠군요. 도심 전체를 얼어붙게 만드는 가공할만한 위력을 가진 폭풍과 한파를 영상으로 구현해 내야 하니까요.”
“내가 매번 벤자민에게 어려운 부탁을 하는 것 같아 미안하군요.”
“뭘요. 제가 해야 할 일이 이런 건데요, 뭐. 오히려 전 이런 새로운 시도를 계속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숙제를 내주는 킴이 고마울 따름입니다, 하하.”
“그럼 이번 영화의 CG 작업도 벤자민만 믿고 있겠습니다.”
“그 부분은 전혀 걱정하지 마시고, 킴은 영화 연출에만 전념하도록 하세요.”
***
저녁 무렵이 되자,
레이첼이 사무실로 나를 찾아왔다.
내가 늦게까지 회사에 남아 업무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안 그녀가 직접 만든 간식거리를 챙겨온 것이었다.
“느낌이 어때요, 킴?”
“무슨 느낌요?”
“이번 영화 말이에요. 흥행에 성공할 것 같은 느낌이 드냐고요.”
“글쎄요, 아직 촬영은 시작도 안 했는데요, 뭐.”
“아마 잘 될 거예요. 이번 영화, 다른 사람도 아닌 킴이 만드는 영화잖아요. 게다가 촬영 스태프들도 오랫동안 함께 손발을 맞춰온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렇게 믿어야죠, 흐흐.”
내가 다시 레이첼에게 말했다.
“아 참, 그보다 내가 일전에 부탁한 건 어떻게 됐어요? 좀 알아봤어요?”
“마블 코믹스에 관한 거 말이에요?”
“네.”
워너 브라더스가 제작한 영화 <배트맨>의 성공 이후,
나는 슈퍼 히어로 영화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전생의 기억 덕분에 나는 앞으로 10년 정도 후면 슈퍼 히어로를 소재로 한 영화가 전 세계 극장가를 거의 점령하다시피 할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슈퍼 히어로 영화가 대중들로부터 본격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한 시기는 앞으로 10년이나 지난 2000년대 초중반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내가 관련 캐릭터의 영화 판권 확보에 나선다면 슈퍼 히어로 영화 제작이 본격화되는 2000년대에 비하면 헐값에 판권을 구입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 중심에 있는 회사가 바로 무려 500개가 넘는 캐릭터를 가지고 있는 마블 코믹스이고.’
“킴의 말을 듣고 제가 마블 코믹스의 상황을 좀 살펴봤는데, 예상대로 회사의 재정 상황이 썩 좋은 편은 아니더라고요.”
“그래요?”
“예. 사실 마블의 수입원이야 뻔하잖아요. 만화와 장난감 판매, 그리고 캐릭터 라이센싱이 마블의 주요 수입원인데, 최근 원작 만화에 대한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다른 수입도 덩달아 낮아지고 있는 형편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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