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머리 감독의 할리우드 정복기-82화 (82/145)

# 82 <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 (1) >

136.

LA 중심가의 고급 호텔 바(Bar).

레이첼과 내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킴. 아까 그 남자 누구였어요?”

“남자?”

“행사 끝 무렵에 아버님 소개로 킴이랑 같이 이야기 하던 중년 남자 말이에요. 얼핏 보니 킴과 같은 한국 사람인 것 같던데.”

“아, 박 대사님 말이군요.”

“대사? 대사라면 주미 한국 대사를 말하는 거예요?”

“네. 그 사람 말에 따르면 지금 한국 정부에서 저를 정식으로 초청하고 싶어 한다네요. 아버지와 함께 말이죠.”

“갑자기 킴을 왜요?”

“그야 내가 한국인이라서 그렇죠. 같은 한국인이 세계 영화의 중심지인 할리우드에서 유명세를 떨치고 있으니, 본의 아니게 국위선양 뭐, 그런 거에 일조한 셈이 된 거죠. 그래서 정부에서 감사패라도 하나 주려는 것일 테고요.”

“아......”

“한국 정부 입장에서도 나 같은 사람이 와주면 위신도 살고 좋잖아요. 그 때문에 주미 대사가 직접 이번 행사에 부랴부랴 참석한 것 같더라고요.”

전생에서도 그랬다.

그때도 한국계 외국인이 해외에서 큰 성공을 거두면 정부나 언론이 직접 나서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하곤 했다.

그 대상이 미국과 같은 선진국인 경우에는 더욱더.

“그래서 킴은 어쩔 생각이에요?”

“일단 지금은 일이 바빠서 힘들다고 했어요. 나중에 여유 생기며 그때 다시 한번 생각해보려고요.”

“그랬군요.”

레이첼이 다시 나에게 물었다.

“근데 한 번쯤은 가보고 싶지 않아요?”

“한국요?”

“네. 킴이 미국 시민권자이긴 하지만 그래도 고국이잖아요.”

한국이라.

물론 나도 전혀 가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전생에서 좋지 않은 기억만 잔뜩 남긴 곳이긴 했지만 그래도 내가 50년 넘는 세월을 보냈던 곳이니까.

“아까도 말했듯이 나중에 여유 생기면 한번 가보죠, 뭐. 지금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요.”

“그럼 그때는 나도 함께 데리고 가요.”

“레이첼도요?”

“네. 저도 킴의 고국인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궁금해서요.”

“그래요, 그럼. 언제가 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칵테일 한 잔을 들이킨 내가 다시 레이첼을 향해 말했다.

“그보다, 레이첼.”

“네.”

“아까 내가 연회장에서 했던 이야기 말인데요.”

“콜롬비아 픽처스 인수 건 말이에요?”

“네. 내 생각에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콜롬비아 픽처스를 우리가 인수했으면 하는데. 전에도 말했듯이 콜롬비아 픽처스의 인수는 우리 회사의 사업을 다각화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테니까요.”

“물론 저도 그렇게 할 수만 있으면 좋죠. 다만 인수 자금 문제가 걸림돌이라서 그렇죠.”

“우리 회사가 이번에 제작한 세 편의 영화 성공으로 꽤 많은 돈을 벌게 되었잖아요. 거기에 앞서 투자한 영화들도 웬만큼은 다 성공을 거두었고.”

“아무리 그래도 20억 달러 이상은 마련하기 힘들 거예요. 그 이상 무리를 했다가는 오히려 우리 회사 재정 상황이 힘들어질 수 있을 테니까요.”

“20억 달러라......”

내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요.”

“네?”

“운이 좋으면 20억 달러로도 충분히 콜롬비아 픽처스를 인수할 수 있을 것 같다고요.”

“말도 안 돼요. 전에 킴의 말을 듣고 제가 여기저기 좀 알아봤는데, 지금 콜롬비아 픽처스의 모회사인 코카콜라 쪽에서는 못해도 30억 달러, 많게는 40억 달러까지도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어떻게 킴은 그 절반밖에 안 되는 돈으로 인수를 하겠다는 것인지......”

레이첼이 다소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지금 재정 상황이 어렵다고는 하지만,

콜롬비아 픽처스는 그래도 할리우드 빅식스(Big Six) 영화사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도 무려 50년이 넘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이에 보유하고 있는 영화 판권도, 진행하고 있는 영화 관련 사업의 숫자도 어마어마했다.

‘레이첼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콜롬비아 픽처스는 생각보다 규모가 상당한 회사이니까. 전생에서 실제 콜롬비아 픽처스를 인수한 일본계 회사 소니(SONY)도 무려 30억 달러가 훨씬 넘는 거금을 주고 이 회사의 주인이 될 수 있었지. 하지만......’

“있잖아요, 레이첼.”

“네.”

“물건이라는 것은 말이죠, 늘 일정한 가격에 거래되는 것은 아니죠. 상황에 따라서는 가격이 오르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는 법이죠.”

“물론 그건 맞지만......”

레이첼이 살짝 놀란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설마 지금 킴은 콜롬비아 픽처스가 지금보다 훨씬 싼 가격에 팔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뜻이에요?”

“이를 테면요.”

“도대체 그게 어떤 상황인데요?”

“글쎄요, 그건 신이 아닌 이상 저도 잘 모르겠네요. 다만 전 언제 우리에게 기회가 올지 모르니 미리 준비를 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뜻이에요.”

라고 말은 했지만,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불과 1년 후면 미국 사회 전체를 뒤흔들 엄청난 경제 위기가 찾아오고, 그 결과 웬만한 회사의 가치가 기존의 3분의 1 이상 하락하게 된다는 것을.

‘블랙 먼데이. 1980년대 후반 미국 사회를 강타한 최악의 경제 위기이지. 내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전생에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영화 가운데 하나인 <첨밀밀>의 배경이 바로 그 시대였기 때문이고.’

천커신 감독이 만든 영화 <첨밀밀>은 청운의 꿈을 안고 홍콩으로 넘어온 중국 출신 두 남녀의 질긴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당시 뉴욕발 블랙 먼데이는 두 사람의 인생을 크게 변화시킨다.

주가 폭락으로 그동안 애써 모은 돈이 하루아침에 허공으로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자본주의에 배신당한 이들은 결국 너무나도 자본주의적인 방법으로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서게 되고, 이로 인해 두 사람의 사랑도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다.

‘블랙 먼데이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이 영화뿐만이 아니지.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만든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라는 영화 또한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였어.’

오로지 영화밖에 모르는 내가,

경제나 주식에 관해서는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내가,

블랙 먼데이라는 사건을 기억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전생에 내가 본 많은 영화에 이 사건이 심심찮게 등장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를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내가 레이첼에게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고 그냥 적당히 얼버무린 것이다.

“알겠어요, 킴. 어떤 경우든 킴의 의견을 따를게요. 저는 킴의 안목을 전적으로 신뢰하니까요.”

“고마워요, 레이첼.”

“대신에 다음 제 영화 제작도 킴이 도와주는 거죠?”

“그야 물론이죠. 내가 레이첼에게 꼭 맞는 영화 시나리오를 준비할게요.”

“호호, 역시 킴이에요.”

137.

1987년 봄.

제59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개최되었다.

미국 최대의 영화 축제인 만큼 시상식장에는 할리우드의 내로라하는 배우와 영화감독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언제봐도 신기하군. 한때 할리우드를 풍미했던 명감독과 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으니까 말이야. 전생에서는 TV나 영화 관련 잡지들을 통해서만 간간이 볼 수 있었는데.’

그동안 쌓아온 영화감독으로서의 나의 명성 덕분인지,

본격적인 시상식에 앞서 많은 배우들이 나에게 아는 척을 해왔다.

이들은 대부분 앞서 나와 영화 작업을 함께한 사람들이었다.

“Ladies and Gentlemen, 지금부터 제59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화려한 막을 올립니다.”

사회자의 멘트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세계 영화산업의 메카라 불리는 할리우드답게 올해도 이곳에서는 수많은 유명 영화들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올해 우리 Film Kim이 만든 영화만큼 크게 주목을 받은 영화는 드물지. 기껏해야 시드니 폴락 감독의 <아웃 오브 아프리카>,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백 투 더 퓨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컬러 퍼플> 정도가 경쟁 상대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이고.’

그래서인지,

올해 Film Kim이 만든 영화는 아카데미의 여러 부문에 수상 후보로 오를 수 있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레이첼의 영화 가 각본상과 미술상에,

제임스 카메룬의 <터미네이터2>가 작품상, 음향상, 분장상, 특수효과상에,

나의 가 감독상, 각본상, 촬영상, 음향상에 각각 노미네이트된 것이다.

사실 내가 제작한 영화가,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로 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영화 <레이더스>의 연출로 아카데미에 처음 초청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나는 꾸준히 시상식 후보에 이름을 올려왔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 수상으로 이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기껏해야 <터미네이터> 1편이 특수효과상을 받은 것이 전부였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내가 백인이 아닌 동양인이기 때문이지. 전통적으로 아카데미는 백인들 위주로 수상이 이루어졌고, 반면에 유색인종이 상을 받는 경우는 인색할 정도로 드문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근 10년 가까이,

내가 꾸준히 아카데미의 문을 두드린 결과가 드디어 결실을 맺기 시작한 것이다.

그 시작은 영화 에서부터였다.

“제59회 아카데미 시상식 각본상은...... 레이첼 도나 감독이 연출을 맡은 영화 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와 함께 레이첼이 단상에 올랐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레이첼이 떨리는 목소리로 수상 소감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감 내용보다 더 사람들의 이목을 끈 것은 레이첼의 미모였다.

무대 위에 선 레이첼의 미모는 시상식장에 모여 있는 할리우드의 유명 여배우들조차도 감탄할 정도로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그 덕분에 나의 어깨도 조금 으쓱해졌다.

레이첼과 내가 교제 중이라는 사실은 할리우드 내에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레이첼의 수상 소감이 끝나고,

뒤이어 또 하나의 성과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제59회 아카데미 시상식 특수효과상은...... 영화 <터미네이터>입니다. 앞선 분장상 수상에 이어, 또 한 번 상을 받게 되는군요. 축하합니다.”

또다시 시상식장에 울려 퍼지는 박수 소리와 함께,

제임스 카메룬과 벤자민 파웰을 중심으로 한 ILM 스태프들이 단상 위에 올랐다.

사실 <터미네이터2>의 특수효과상 수상은 어느 정도 예견된 사실이었다.

<터미네이터2>에 사용된 CG 기술은 기존의 할리우드 영화에서 사용되던 시각 효과를 한층 업그레이드시킨 혁명적인 기술이었기 때문이었다.

‘영화 <터미네이터2>를 계기로 할리우드 영화계에서는 CG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겠군. 그렇게 되면 이 분야에 독보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는 ILM의 수익 또한 눈덩이처럼 불어나겠지. 대다수 영화가 우리 ILM에 CG 작업을 의뢰해올 테니까 말이야.’

지난 10년 가까이,

ILM에 꾸준한 투자를 해온 나의 노력이 드디어 빛을 발휘하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고마워요, 킴.”

수상을 마치고 다시 내 옆자리로 돌아온 레이첼이 나에게 귓속말을 해왔다.

“뭐가요?”

“킴 덕분에 제가 꿈에도 그리던 아카데미 시상식 단상에 오르게 됐잖아요.”

“그게 왜 내 덕분이에요? 이번 영화는 레이첼이 직접 발로 뛰며 자료를 조사해서 쓴 각본으로 만든 영화잖아요? 그러니 당연히 수상의 영광은 레이첼의 몫이죠.”

“그래도 처음 아이디어를 준 것은 킴이잖아요.”

“뭘요.”

“그나저나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는 반드시 킴이 감독상을 받아야 할 텐데......”

“굳이 그렇게까지 욕심부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내가 만든 영화 가 벌써 3개 부문에서 수상을 했으니까요. 그 정도면 충분히 만족할 만한 성과이죠.”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은,

내가 만든 영화 의 독무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매 부문 후보 작품이 발표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한 것이 바로 이 영화였기 때문이었다.

실제 작품상과 촬영상, 여기에 음향상까지 수상하게 됐고.

“그래도 영화 감독에게는 감독상만큼 의미 있는 상도 없잖아요. 많은 영화감독이 일생토록 꿈꾸는 상이기도 하고요.”

“그렇긴 하죠.”

“특히 이번에는 기대해도 좋은 것이 영화 가 이미 작품상을 받았다는 거예요. 감독상이 올해 가장 뛰어난 영화를 만든 감독에게 주어지는 상인 만큼 작품상을 받은 영화의 감독이 수상할 확률이 매우 높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

“어머, 이제 곧 감독상 발표가 시작되려나 봐요. 휴, 내 이름 발표되기 전보다 심장이 더 떨리는 것 같네.”

레이첼이 잔뜩 기대에 찬 얼굴로 시상식 무대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사회자가 수상자의 이름이 적힌 봉투를 열었다.

“제59회 아카데미 시상식, 영광의 감독상을 받게 될 이는......”

- 두구두구두두구!

“축하합니다. 영화 를 연출한 제임스 킴 감독입니다.”

“!!!”

작품상, 촬영상, 음향상에 이어 감독상까지,

영화 가 무려 아카데미 4관왕을 달성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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