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 또 한번의 트리플 크라운 (1) >
129.
브리티시 컬럼비아 영화 촬영 현장.
스태프들이 분주히 오가며 촬영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흐린 날씨’라는 제한된 촬영 여건으로 인해 촬영 가능한 날이 되면 스태프들은 보통의 영화 촬영 현장보다 몇 배는 바쁘게 움직여야만 했다.
가장 먼저 촬영할 장면은,
주인공인 다니엘 중사와 브라이언 상병이 참호를 떠나 무인지대로 접어드는 장면이었다.
‘일명 ‘죽음의 땅’이라 불리는 무인 지대는 아군 참호와 적군 참호 사이의 비어있는 땅을 가리키는 말이지.’
참호의 기본 컨셉이 ‘참혹함’이었다면, 무인 지대의 기본 설정은 ‘공포’ 내지는 ‘죽음’이었다.
이에 무인 지대는 참호와 더불어 미술팀이 무척이나 공을 들여 만든 공간이었다.
포격을 맞아 쓰러진 나무들.
가는 곳곳마다 즐비하게 늘어진 병사들의 시체.
그리고 이를 파먹기 위해 돌아다니는 쥐 떼와 벌레들.
그야말로 현세의 지옥이나 다름없는 곳,
그곳이 바로 무인 지대(No Man′s Land)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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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하다 못해 참담하기까지 하군.”
아군 참호 앞에 설치된 철조망을 넘어 무인 지대에 도착한 다니엘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전사자들을 묻어줄 여유조차 없는 건가?”
브라이언이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묻어줘봤자 내일이 되면 또 이만큼 쌓일 텐데요, 뭐. 그래서 사람들이 이곳 상황을 지옥의 도돌이표라고 부릅니다.”
“지옥의 도돌이표?”
“예. 매일 치열한 전투와 죽음의 순간이 반복되기 때문이죠.”
마른 전투 이후 무려 4년 가까이 진행된 참호전은,
무의미한 전투와 살육의 연속이었다.
방어선 건설, 대규모 포격, 일제 돌격 및 맞돌격의 패턴이 무한 반복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숫자의 병사들이 죽어 나갔는데, 1차 솜 전투 당시 하루 만에 무려 6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본부에 있는 지휘관들은 아마 짐작하기 어려울 겁니다. 지금 이곳에서 어떤 지옥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그분들은 한 번도 이곳에 와본 일이 없으니까요.”
“......”
1차 세계대전 당시,
군 수뇌부들은 참호전의 참상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당시 전신과 같은 통신 수단의 발달로 지휘관들은 대부분 참호로부터 몇 Km 떨어진 곳에 있는 지하 벙커에서 지도만 보며 작전을 지시했다.
전선이 급격하게 변하지 않는 참호전의 특성상 굳이 지휘관이 참호가 있는 최전선까지 나갈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본부 소속의 다니엘 또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브라이언의 다소 원망 섞인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하나만 묻지.”
“말씀하십시오.”
“왜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따라나선 거지?”
“명령이니까요.”
“아무리 지휘관의 명령이라도 본인의 의지에 따라 거절할 수도 있지 않았나?”
“......”
잠시 말이 없던 브라이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동생이 거기 있습니다.”
“동생?”
“예. 제 친동생도 저와 함께 이번 전쟁에 참여했는데, 지금 최전방에 있는 2대대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임무에 중사님을 따라 나서기로 한 것입니다.”
“......그랬었군.”
“그러는 중사님은 왜 굳이 이런 위험한 곳까지 자원해서 오신 것입니까?”
“글쎄, 그건 나도 잘 모르겠군. 항공 사진을 통해 아군 병력이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머릿속에는 빨리 그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더군.”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브라이언이 대답했다.
“중사님은 꽤 훌륭한 군인이신가 보군요. 그런 책임감도 다 가지고 계시고.”
“자네는 나보다 더 훌륭한 군인이야, 브라이언 상병. 최전방 참호에서 적들과 용감하게 맞서 싸우고 있으니 말이야.”
“처음에는 그랬겠죠. 저를 포함한 여기 있는 병사들 모두 다 조국을 위해 싸운다는 신념을 가지고 전쟁에 참여했었죠. 그런데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왜 싸우는 것인지, 누굴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인지, 우리가 옳은 것인지 독일군이 옳은 것인지, 이제는 판단조차 서지 않습니다.”
“......”
“혹시 중사님은 알고 계십니까?”
“물론이지.”
“누굽니까? 독일군과 우리 중에 누가 정의의 편에 서서 싸우고 있는 겁니까?”
“전쟁에선......”
다니엘이 브라이언의 앞을 성큼성큼 앞질러 가며 말했다.
“결국 이기는 쪽이 옳은 거야. 이기는 쪽이 정의고, 진 쪽이 나쁜 놈이 되는 거지.”
“......”
두 사람 사이에 긴 침묵이 흘렀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긴 전쟁.
그 안에서 병사들은 자신들이 무엇 때문에 싸우고 있는지, 그 근본적인 의미조차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을 일으킨 동맹국 병사들도, 이에 대항하는 연합국 병사들도 모두 다.
“뛰어!”
앞서가던 다니엘이 갑자기 큰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멀리서 날아오는 적군의 정찰기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 다다다다다!
황급히 달려가던 두 사람이 언덕 아래에 있는 개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첨벙’하는 소리와 함께 물줄기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바로 이곳이,
영화의 두 번째 편집 지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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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컷!”
메가폰을 타고 나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스태프들이 담요를 들고 주연 배우 두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에 물에 뛰어든 배우들이 혹시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화면은 잘 나왔습니까?”
나의 물음에 촬영 감독 로저 디킨스가 대답했다.
“촬영할 때는 별문제가 없어 보였는데, 다시 한번 천천히 모니터하면서 점검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죠.”
로저 디킨스와 내가 방금 촬영을 끝낸 10분 정도 분량의 영상을 다시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이번 씬은 단 한 번의 촬영으로도 ‘오케이’가 떨어졌다.
***
촬영장 인근의 숙소.
로저 디킨슨과 내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킴. 이번에 브라이언 역을 맡은 배우 말이에요. 신인치고는 꽤 연기가 좋은 것 같은데요?”
로저 디킨스의 말에 내가 속으로 빙긋 웃음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톰 크루즈와 더불어 이번 영화의 또 다른 주연을 맡은 이는 바로 앞으로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남자 배우로 성장하게 될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브래드 피트. 타고난 외모와 연기력을 바탕으로 <가을의 전설>, <세븐>, <오션스 일레븐>, <월드워Z> 등의 수많은 히트 영화에 출연한 할리우드의 명배우이지. 물론 아직까지는 단역을 전전하는 무명 배우에 불과하지만.’
실제 브래드 피트가 영화 배우로 이름을 알리게 되는 영화는 <가을의 전설>이었다.
이 영화를 통해 그는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하지만 이번 생은 다르지. 이번 영화가 성공하면 그는 전생에서보다 훨씬 빨리 영화 배우로서 이름을 알리게 될 테니까. 게다가 이같이 뛰어난 배우를 처음 발굴해 낸 영화감독으로서의 나의 안목도 세간의 큰 주목을 받게 될 것이고.’
속마음을 감추며 내가 로저 디킨스를 향해 말했다.
“로저의 눈에도 괜찮아 보이는 모양이군요.”
“예. 다른 영화들과는 전혀 다른 촬영 방식인데, 여기에 빨리 적응하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상대역이 톰 크루즈라는 인기 배우라서 부담을 느낄 법도 한데, 자신만의 색깔로 연기를 잘 소화해내는 것 같더라고요. 킴은 매번 영화 제작 때마다 이런 뛰어난 배우들을 어떻게 발탁해내는 것입니까? 보면 볼수록 정말 신기합니다. 이건 저뿐만이 아니라 다른 할리우드의 영화 제작자들도 한결같이 입을 모아서 하는 말이에요.”
“운이 좋았다고 하면......”
내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안 믿을 거죠?”
“운도 한두 번이라야 말이죠. 제가 볼 때 이건 단순한 운이 아니라 킴이 배우를 보는 안목을 선천적으로 타고났기 때문입니다.”
순전히 전생의 기억 때문인데.
아마 진실을 알게 되면,
로저 디킨스도 그렇고, 조지 루이스도 그렇고, 다들 내 목을 조르려고 들겠지?
“그보다 이번 기회에 로저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네요.”
“예? 갑자기 그게 무슨......”
“이번 촬영, 쉽지 않은 촬영인데 흔쾌히 동참해주신 점, 그리고 촬영 중간에도 별다른 이견 없이 제 의견을 잘 따라 주신 점이 감사하다는 뜻이에요.”
“별말씀을요. 오히려 전 이런 좋은 영화에 참여할 기회를 준 킴이 더 고마운걸요.”
“그럼 우리 끝까지 최선을 다해 한번 촬영해봅시다, 로저.”
“물론입니다, 킴.”
130.
영화 의 촬영이 시작된 지도 벌써 석 달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이 기간 동안은 오직 세트 제작, 리허설, 촬영 이 세 작업만이 무한 반복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이제 영화 촬영도 거의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번 영화는 내가 각본, 제작, 연출 모두를 담당한 영화였다.
하지만 실제 촬영 현장에서는 로저 디킨스 감독의 역할이 8할 이상을 차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의 뛰어난 촬영 기술이 없었다면 이번 영화를 만드는 일이 몇 배는 더 힘들었을 것이다.
‘로저 디킨슨 감독이 할리우드 최고의 촬영 감독으로 불리는 이유는 촬영 기술도 기술이지만, 조명을 다루는 능력이 그 누구보다 뛰어나기 때문이지. 그의 이런 능력이 가장 잘 표현된 장면이 바로 오늘 촬영하게 될 씬이고.’
“자, 준비됐으면 바로 촬영 시작합니다. 3, 2, 1, 레디, 액션!”
- 탁!
둔탁한 슬레이트 소리를 시작으로,
오늘분의 촬영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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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들의 시체가 즐비한 무인 지대를 지나,
거의 폐허가 된 마을에 도착하게 된 다니엘과 브라이언.
밤늦은 시간이라 그들의 주변은 이미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다니엘 중사님. 저기 좀 보십시오. 우물입니다, 우물.”
“오! 드디어 마실 물을 구할 수 있게 되었군.”
황급히 우물로 달려간 두 사람이,
이미 오래전에 떨어진 수통에 물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쉿!”
다니엘이 황급히 무너진 건물 잔해더미 뒤로 몸을 숨겼다.
멀리서 인기척이 느껴진 탓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그들의 눈앞에 한 무리의 군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연유에선지 아직 이곳에서 철수하지 않고 남아있는 독일군 병사들이었다.
“큰일 났군.”
“어떡하죠, 중사님? 놈들에게 발각되면 우린 완전 죽은 목숨인데.”
“일단 여기 숨어서 놈들의 동태를 살펴보자.”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춘 채로,
적군의 동태를 살피기 시작하는 두 사람.
그런데.
독일군의 모습이 어딘지 수상해 보였다.
전쟁터 한가운데 있는 군인답지 않게 과장된 몸집과 흥분된 목소리로 떠들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저놈들 혹시 취한 거 아니야?”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요?”
“저놈들도 식량이나 물을 구하러 이곳에 들어왔다가 술을 발견하고는 참지 못하고 그냥 마신 모양이군.”
다니엘이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내 말 잘 들어, 브라이언 상병. 잠시 후에 내가 신호를 보내면 무조건 앞만 보고 뛰는 거야.”
“예?”
“주변이 많이 어둡고, 또 놈들은 지금 술에 취해있는 상태라 우릴 쉽게 쫓아오지 못할 거야. 이 틈을 타서 얼른 이곳을 빠져나가야 해. 중간중간 서로 엄호 사격을 해주면서 말이야.”
“하지만 중사님. 저들 말고 또 따른 병력이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여기서 무한정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겠는가? 지금 우리 두 사람 손에 천 명이 넘는 아군 병사들이 목숨이 달려 있는데.”
“......”
“내가 신호하면 즉시 놈들이 있는 반대 방향으로 달려 가는 거야. 알았지?”
브라이언 상병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
“지금이야, 뛰어!”
다니엘의 엄호 사격을 시작으로,
두 사람이 독일군을 피해 어둠 속을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 탕!
- 타당!
- 타다당!
두 사람을 발견한 독일군이 사격을 개시했다.
뒤이어,
하늘 위로 여러 발의 조명탄이 터지기 시작했다.
- 펑!
- 퍼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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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마을에서 벌어지는 이 총격씬은,
나와 로저 디킨스 촬영 감독이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만들어낸 아이디어로 촬영된 장면이었다.
처음 계획과는 달리 막상 촬영을 하고 보니,
이번 씬의 배경이 되는 마을과 주인공의 모습이 너무 어둡게 화면에 잡힌다는 문제점이 생겼고,
이에 우리 두 사람은 조명탄을 터트려 이 장면을 살린다는 새로운 계획을 세운 것이다.
‘물론 실제 현장에서는 진짜 조명탄에서 나오는 빛을 이용해서 촬영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로저 디킨스 감독이 미리 준비한 하이 콘트라스트 조명을 이용해서 촬영한 것이지.’
하이 콘트라스트는 극적인 명암 대비를 통해 화면을 연출하는 조명 기법을 말한다.
특히 로저 디킨스는 기존보다 더욱 강한 콘트라스트, 더불어 여기서 파생되는 빛과 그림자를 적절하게 이용해 그야말로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연출해 냈다.
‘정말 멋지군! 역시 영상의 마술사라 불리는 로저 디킨스 감독다워.’
촬영된 영상을 모니터하던 내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난 영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너무나도 우연히 만들어진 이 장면이,
나중에 관객과 평론가들에 의해 이번 영화에서 가장 뛰어난 장면으로 선정되면서 세간의 큰 화제를 몰고 오게 될 줄은 촬영 당시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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