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 반전 영화 (7) >
113.
영화사 Film Kim.
모처럼 만에 사무실이 한가했다.
오늘은 촬영이 없는 날이라 스태프 대부분이 출근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려 5개월간 강행군으로 진행된 촬영 일정에 스태프들도 많이 지쳐있을 테지. 그러니 며칠 정도 쉬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어차피 이제 영화는 몇 개의 엔딩 씬만 남은 상태니까 말이야.’
“사장님도 좀 쉬지 그러셨어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잔을 내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이레나가 말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내가 대답했다.
“밀린 업무가 많아서요.”
“그 많은 직원은 뒀다 어디 쓰시게요?”
“다른 건 몰라도 우리 회사가 투자할 영화 선정은 제가 해야 한다는 거, 이레나도 잘 알잖아요?”
“하긴. 사장님의 영화 고르는 안목이야, 이곳 할리우드에 소문이 나 있으니까. 가만 보면 사장님은 완전 영화계의 노스트라다무스예요. 손대는 영화마다 족족 성공을 거두니까요. 도대체 비결이 뭐예요?”
“비결 같은 거 없어요. 그냥 시나리오를 꼼꼼히 살펴보고 재밌을 것 같은 영화를 골라 투자하는 거, 그게 다죠, 뭐.”
늘 하는 핑계였다.
그렇다고 전생에서 보고 온 영화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럼 전 이만 나가볼게요. 혹시 또 시키실 일 있으시면 부르시고요.”
“그래요, 이레나. 아, 커피 고마워요.”
“뭘요.”
이레나가 사무실을 나가기가 무섭게,
내가 책상 위에 올려진 영화 시나리오들을 집어 들었다.
모두 우리 회사로부터 투자받기를 희망하는 영화들이었다.
할리우드에서는 한해에 수백 편의 영화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이 가운데 흥행에 성공하는 영화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그 때문에 제작자나 투자사들은 마치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는 심정으로 하루에도 수십 편씩 보내오는 영화 시나리오들을 뒤지고 또 뒤진다.
그러다 운 좋게 대박이 터지면 그동안의 손해를 만회하는 식이다.
‘하지만 나는 다르지. 전생의 기억 덕분에 나는 영화 시나리오를 고르는 일이 땅 짚고 헤엄치는 일보다 더 쉬운 일이 돼버렸으니까.’
그렇게,
한동안 시나리오를 뒤적이던 나는 눈이 번쩍 뜨이는 시나리오 한편을 발견하게 되었다.
< 탑건 >
‘오, 이런 세상에! 영화 <탑건>의 시나리오라니.’
1920년대 할리우드 영화 산업이 시작된 이래 수많은 영화가 만들어졌다.
그 가운데는 후대에까지 널리 회자되는 소위 ‘명작 영화’들도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탑건>이라는 영화였다.
‘최고의 전투기 조종사를 뜻하는 제목의 영화 <탑건>은 할리우드 최고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영화 가운데 하나이지. 게다가 이 작품을 통해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배우 톰 크루즈가 발굴되기도 했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1,500만 달러라는 비교적 적은 제작비로 무려 3억 달러가 넘는 흥행 수익을 올렸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만약 우리 회사가 이 영화의 투자에 참여하게 된다면 상당한 금액의 수익을 올릴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또 하나 눈에 띄는 시나리오가 있군.’
내가 수많은 시나리오 사이에서 또 다른 영화 시나리오 하나를 집어 들었다.
< 비버리 힐스 캅 >
마틴 브레스트 감독이 연출을 맡은 이 영화는 코미디언 출신의 영화배우인 에디 머피가 출연해 일명 ‘코믹 액션’이라는 참신한 장르를 선보이며 대중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흥행 면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어 북미 시장에서만 2억 달러, 세계적으로는 3억 달러가 넘는 수익을 올렸다.
‘오늘은 꽤 운이 좋은 날이군. <탑건>과 <비버리 힐스 캅>이라는 대작 영화의 시나리오를 발견했으니 말이야.’
사실 이는 매우 드문 경우였다.
보통의 경우는 이런 영화가 있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낯선 제목과 내용의 시나리오가 대부분이었다.
‘벌써부터 회사 자산이 늘어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군. 이 두 편의 영화 투자로 최소 2억 달러 이상의 수익은 올릴 수가 있을 테니 말이야, 흐흐.’
“뭘 그렇게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어요?”
때마침 레이첼이 사장실로 들어오며 물었다.
“아, 레이첼.”
“뭐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예요?”
“오래간만에 괜찮은 영화 시나리오를 발견해서요.”
“그래요? 그럼 내친김에 이것도 한번 봐주세요, 킴.”
레이첼이 나에게 시나리오 한편을 내밀었다.
일전에 내가 소스를 준,
NASA 최초의 흑인 여성 엔지니어 메리 잭슨의 일화를 다룬 영화였다.
< Get Over(겟 오버) >
“제목이 의미심장하네요?”
“아무래도 이번 영화가 NASA의 극심한 인종차별을 극복하고 결국 한 사람의 훌륭한 수학자로 인정받은 한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잖아요. 그래서 그런 제목을 한번 붙여봤는데, 좀 안 어울리는 편인가요?”
“전혀요. 내가 보기에 제목과 내용이 아주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다행이네요, 호호.”
영화 의 줄거리는 대략 이러했다.
냉전(冷戰)이 한창 진행되던 1960년대,
미국과 러시아 두 나라는 치열한 우주 개발 경쟁으로 보이지 않는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동시에 이 시기는 흑인의 인권이 존재하지 않던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 미국은 인종과 성, 특히 피부색에 따른 차별이 너무나 당연시되는 사회였다.
따라서 흑인 여성 신분으로 NASA에 입사한 주인공도 회사 생활에서 다양한 차별을 겪게 된다.
사무실에서 몇백 미터 떨어진 유색인종 전용 화장실을 사용해야 하는 것은 물론,
도서관이나 버스를 이용할 때도,
심지어 물 한잔을 마실 때도 오로지 ‘Colored Only’라는 팻말이 있는 곳만 사용해야 할 정도로 심한 제약이 가해졌던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은 오롯이 자신의 능력으로 이 같은 차별을 극복해나간다.
이 과정에서 NASA의 백인 직원들도 결국 그녀를 인정하고 같은 동료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번 영화의 핵심은 NASA라는 특수한 공간 속에서 흑인 여성 신분의 주인공이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사회적 차별을 극복해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또 감동적으로 그려내야 한다는 것이지. 무엇보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관객들에게 더 큰 감동과 공감을 느끼게 할 수 있을 테고.’
“내 생각에......”
내가 레이첼을 향해 말했다.
“영화의 분위기는 어둡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네? 그게 무슨 말이죠?”
“이 영화가 비록 인종차별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이전 영화 와 달리 시종일관 밝은 분위기로 영화의 전체적인 연출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뜻이에요.”
“일종의 역설적인 표현 방법인가요?”
“이를 테면요. 가령 영화 가 극심한 인종차별에 대한 사회적 분노를 표출했다면 이번 영화 의 경우는 이 문제를 보다 유쾌한 방식으로 풀어내는 거죠.”
“흠. 듣고 보니 킴의 말이 맞는 것 같네요. 역시 킴이예요.”
레치첼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근데 킴. 혹시 그거 알아요?”
“뭘요?”
“킴이랑 영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 꼭 정답지를 보면서 문제를 푸는 기분이 든다는 거.”
“설마요.”
“정말이에요. 전 그래서 너무 좋아요. 킴 덕분에 꽉 막혀 있던 뭔가가 풀리는 것 같아서요.”
“그럼 나도 한 가지 물어볼게요, 레이첼.”
“뭐든지요.”
“내가 너무 영화 일에만 빠져 지내서, 혹시 레이첼이 섭섭하거나 그렇지는 않아요?”
조지 루이스의 일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우리 두 사람이 연인 사이가 된 이상 어쩌면 우리도 이와 똑같은 일을 겪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눈치 빠른 레이첼도 물론 이를 알고 있었고.
“루이스 씨 일 때문에 그러는구나?”
“아니라면 거짓말이죠.”
“걱정하지 말아요, 킴. 전 킴이 지금처럼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너무 좋으니까요. 사실 제가 킴에게 호감을 느낀 것도 바로 이런 점 때문이고요.”
“지금 그 말 앞으로 절대 바뀌지 않을 자신 있죠?”
“물론이죠. 대신 가끔 영화 작업 끝날 때마다 저랑 여행 정도 가주는 정도면 충분해요.”
내가 레이첼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 안으며 말했다.
“그럼 말 나온 김에 우리 어디 분위기 좋은데 가서 밥이나 먹고 오자고요. 오늘 모처럼 다들 쉬는 날인데, 나만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으려니, 왠지 갑자기 억울한 생각이 들어서요.”
“호호, 그래요. 킴.”
114.
내가 연출을 맡은 네 번째 영화,
도 어느덧 마지막 엔딩 씬 촬영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런데.
이전과는 다르게 이번 엔딩 씬 촬영은 어딘가 모르게 이상한 점이 있었다.
촬영장 세팅이 끝나기가 무섭게 필수 인력을 제외한 대다수 스태프가 현장에서 철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현장에 남은 스태프들의 숫자는 불과 10여 명 남짓이었다.
“자, 다들 이거 한 장씩 받으세요.”
조감독이 스태프들에게 문서 한 장씩을 내밀었다.
“뭡니까, 이게?”
“비밀 유지 서약서입니다. 오늘 촬영 내용을 외부로 발설할 경우 민형사상의 책임을 모두 져야 한다는 내용이죠.”
살짝 뜨아한 표정을 짓는 스태프들.
하지만 이런 경우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결말이나 반전이 있는 영화의 경우 촬영이 가능한 최소한의 스태프에게 비밀 유지 서약서를 작성하고 촬영에 임하는 경우는 종종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스태프들도 별다른 불만 없이 서약서에 서명을 진행했다.
그리고 드디어 공개된 영화의 마지막 대본.
이는 촬영에 참여하고 스태프들조차도 놀랄 정도로 참신한 반전 내용을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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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소년 토미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아내 소피아가 보인 행동이 결코 정신병적 증세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닉(Nick).
이에 그는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갔다.
소피아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함께 새 출발을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목격한 것은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죽어가는 아내의 모습이었다.
“안 돼, 소피아! 절대 이대로 죽으면 안 돼!”
절규에 가까운 외침을 내뱉으며 닉이 소피아를 안아 올렸다.
빨리 병원 응급실로 데려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닉의 손이 소피아의 몸을 그대로 관통해버린 것이다.
“이, 이게 무슨......”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현상에,
닉이 자신의 몸을 황급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
닉은 또 한 번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코트 속에 감춰져 있어서 보이지 않았던 커다란 총상을 자신의 배 한가운데서 발견한 것이다.
그 순간,
닉의 머릿속에는 그동안 토미가 해준 말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제 눈에는 유령이 보여요.’
‘유령들은 자기가 죽은 걸 몰라요. 다른 유령을 볼 수도 없고요.’
‘유령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어요.’
털썩-
닉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여태 그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1년 전,
자신의 환자 패트릭이 쏜 총에 자신이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을.
그래서 자신도 유령이 됐다는 사실을.
“유, 유령은 자신이 죽은 것을 모르니까.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니까, 흑흑흑......”
흐느끼는 닉.
아내의 손을 잡아보려 했지만,
잡을 수조차 없는 상황이 그를 더욱 비통하게 만들고 있었다.
장면이 바뀌고,
닉이 토미와 마주 보고 있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 듯한 표정의 닉이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어, 토미. 그래서 다시 널 찾아온 거야.”
“......뭔데요?”
“혹시 그동안 널 찾아온 유령 가운데 물에 젖은 어린 소년도 있었니? 아마 나이는 토미 너랑 비슷할 텐데.”
“있었어요. 그런 아이가.”
치솟아 오르는 슬픔을 억누르며 닉이 다시 물었다.
“혹시 기억나니? 그 아이가 너에게 뭐라고 했는지.”
“아빠가 깊은 곳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는데, 아빠 말을 듣지 않아서 자신이 그렇게 된 거래요. 그날 자기 생일이라 모처럼 아빠도 같이 수영하러 가기로 했는데, 갑자기 급한 일이 생기는 바람에 아빠가 약속을 못 지키셨대요. 그래서 홧김에 아빠 말을 안 듣고, 깊은 데까지 들어가서, 그래서 그렇게 됐대요.”
입술을 깨무는 닉.
그런 그에게 토미가 다시 말했다.
“아빠에게 꼭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했어요. 아빠 말을 듣지 않아서 자신이 엄마와 아빠를 슬프게 만들었다고. 그래서 꼭 미안하다는 말을 저에게 전해달라고 했어요.”
그제야 비로소 닉은 깨달았다.
모든 것이 자신의 이기적인 행동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아들인 해리, 아내인 소피아, 환자인 패트릭의 불행들이 모두 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지금까지 자신이 토미를 도와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토미가 자신을 도와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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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컷, 오케이, 좋았어요.”
메가폰을 타고 나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로써 모든 영화 촬영이 끝이 났다.
“자, 다들 그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조감독은 스태프들 다시 불러서 현장 정리 시작하시고요.”
“예, 감독님. 감독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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