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머리 감독의 할리우드 정복기-66화 (66/145)

# 66 < 반전 영화 (4) >

108.

할리우드의 한 고급 레스토랑.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간 자리에는 멋들어진 콧수염을 기른 중년의 남자 하나가 앉아 있었다.

레이첼의 아버지이자, 월가의 유명한 금융가인 헨리 도나 골드버그였다.

오늘 내가 그를 만나려는 이유는 간단했다.

영화 제작사인 Film Kim과 투자배급사인 유니온 픽처스의 합병을 위해서는 최대 주주인 그의 동의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현재 할리우드 영화 산업의 가장 큰 특징은 관련 산업의 수직적 통합, 다시 말해 거대 영화사가 영화의 투자, 제작, 배급, 상영에 이르는 전 과정을 통할 하는 것이지. 따라서 우리 Film Kim이 빅식스(Big Six)영화사에 버금가는 세계적인 영화사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투자, 배급 능력을 가지고 있는 유니온 픽처스와의 합병이 반드시 필요해.’

“킴?”

헨리 도나가 내민 손을 맞잡으며 내가 대답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임스 킴입니다.”

“헨리 도나 골드버그일세. 그냥 편하게 헨리라고 부르면 되고.”

“알겠습니다, 헨리 씨.”

“식사는?”

“전 그냥 따뜻한 차 한잔이면 충분합니다.”

“그렇게 하세. 초면에 식사는 서로 조금 불편할 수도 있으니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사이에 두고 우리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레이첼에게 들었네. 킴이 유니온 픽처스와 Film Kim 두 회사의 합병을 제안했다고?”

“그렇습니다.”

“사실 내 딸 레이첼이 말이야, 살면서 뭔가를 갖고 싶다고 이야기한 적이 없는 아이일세. 뭐, 워낙 풍족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아쉬울 것이 없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저도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골드버그 가문이 꽤 명문 가문이라는 것을요. 특히 금융업 쪽으로요.”

“하하. 그것도 다 옛말이네. 요즘은 경기가 경기다 보니, 겨우 은행 몇 개 굴리는 정도에 불과해.”

‘겨우’ 은행 몇 개라니.

그것도 세계 금융의 중심지라 불리는 미국 월가에 있는 은행인데.

“어쨌든 그런 레이첼이 처음으로 나에게 뭔가를 달라고 했어. 그게 바로 지금 자네가 합병을 계획하고 있는 영화사 유니온 픽처스이고.”

“......”

“사실 어차피 나도 그 회사는 언젠가 레이첼에게 넘겨줄 생각을 하고 있었어. 생각보다 그 시기가 너무 빨라서, 그것도 레이첼이 직접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해 내가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말이야. 내 생각에는 레이첼이 그런 말을 한 가장 큰 이유가 이번 두 회사의 합병 건 때문인 것 같은데......”

차 한 모금을 들이킨 헨리 도나가 다시 말을 이었다.

“자, 그럼 한번 이야기해보게. 킴이 무슨 이유로 이번 합병을 추진하려고 하는지를. 레이첼이 아무리 내 딸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중요한 문제를 전적으로 그 애의 말만 듣고 결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래서 오늘 내가 직접 킴을 만나자고 한 걸세.”

“제가 레이첼에게 회사 합병을 제의한 것은 이번 합병이 아직은 중견 영화사에 불과한 유니온 픽처스와 Film Kim이 재도약 할 수 있는 좋을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뭔가?”

“그건......”

내가 헨리 도나에게 회사 합병을 추진하는 이유와 그로 인해 Film Kim과 유니온 픽처스가 얻게 될 이점들을 상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내 설명을 듣고 있던 헨리 도나가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자네의 말은 한마디로 점점 대형화되어 가고 있는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발전 가능성이 있는 회사들끼리 통합해서 역량을 키울 필요가 있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제가 알기로 지금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이른바 ‘빅식스(Big six)라 불리는 영화사들도 모두 그런 과정을 거쳐 성장한 회사들이니까요.”

“흐음.”

헨리 도나가 팔짱을 낀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업적으로는 잔뼈가 굵은 헨리 도나도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요즘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받는 Film Kim과 같은 영화사와의 합병은 중견 영화사에 불과한 유니온 픽처스가 메이저 영화사로 성장할 수 있는 좋을 기회라는 사실을.

무엇보다 이번 합병으로 영화사 Film Kim이 가지고 있는 영화 제작 능력과 유니온 픽처스가 가지고 있는 투자 배급 능력이 합쳐지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자네의 사업적 비전(Vision)은 충분히 잘 들었으니, 이번에는 조건을 좀 들어보고 싶네. 자네가 생각하는 합병 조건은 무엇인가?”

“일단 지분 비율은 50대 50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50대 50?”

헨리 도나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건 좀 무리한 조건 아닌가? 내가 알기로 유니온 픽처스의 자본금은 Film Kim보다 몇 배는 더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단순히 산술적인 계산만으로는 그렇지요. 하지만 앞으로 발전 가능성을 놓고 본다면 우리 Film Kim의 가치는 지금보다 몇 배는 더 높게 평가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전 헨리 씨께서 그 점을 고려해주셨으면 하는 거고요.”

“발전 가능성이라......”

헨리 도나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우리 Film Kim은 제작하는 영화마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그 덕분에 불과 10년도 채 안 되는 회사가 영화 제작 분야에서만큼은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들과 나란히 경쟁할 수 있을 정도로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따라서 발전 가능성만 놓고 볼 때, Film Kim은 엄청난 가치를 가지고 있는 회사라는 것은 누가 봐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투자라는 것은 원래 회사의 미래 가치를 보고 하는 것이지. 특히 레이첼의 아버지는 금융가로 오래 일해온 사람인 만큼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지.’

“그리고 또 한 가지, 회사의 의사 결정권은 전적으로 저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어떤 영화를 제작할지, 어떤 영화에 투자할지는 모두 제가 결정한다는 뜻입니다.”

“......그것 말고도 또 있나?”

“마지막으로 이건 제 개인적인 이유이긴 합니다만, 합병 이후 회사명은 그대로 ‘Film Kim’이란 이름을 유지하고 싶습니다.”

“하나 같이......”

헨리 도나가 또 한 번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자네 회사에만 유리한 조건이군. 그런데도 킴은 내가 이 조건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나?”

“아마 지금은 헨리 씨께서도 저의 조건에 다소 수긍하기 힘든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조금만 더 지켜보시면 이번 결정이 얼마나 최선의 선택이었는지를 눈으로 확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후후. 놀랄 만큼 대단한 자신감이군.”

잠시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던 헨리 도나가 다시 말을 이었다.

“만약에 내가 킴이 만든 영화들을 보지 못했다며 아마 난 단숨에 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것일세. 지금까지 사업을 하면서 난 단 한 번도 나에게 불리한 조건의 계약을 한 적이 없으니까.”

“......”

“하지만 이번만큼은 내가 양보하기로 하지. 자네의 말마따나 Film Kim은 앞으로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회사이니까 말이야.”

“그게 정말이십니까?”

“그래. 대신에 지금처럼 훌륭한 영화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낼 수 있겠나? <레이더스>나 <체이스 오브 리벤지> 시리즈를 능가하는 영화 말이야. 아, 물론 이건 유니온 픽처스의 대주주로서가 아니라 자네의 영화를 좋아하는 한 사람의 영화팬으로서 하는 말이기도 하네.”

당연하지.

내가 가진 ‘전생의 기억’이면 지금까지 만든 영화보다 훨씬 더 흥행에 성공할 수 있는 대작 영화들을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을 테니까.

내가 헨리 도나를 향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헨리 씨.”

“좋아. 그럼 구체적인 회사 합병 문제는 킴이 레이첼과 상의해서 진행하는 걸로 하게.”

이로써,

Film Kim과 유니온 픽처스의 합병이 본격적으로 진행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할리우드 빅식스(Bix Six) 영화사에 버금가는 새로운 대형 영화사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

헨리 도나와의 만남을 끝내고,

내가 레이첼이 기다리고 있는 바(Bar)를 향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화려한 드레스 차림의 레이첼이 홀로 앉아 칵테일을 마시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카데미 시상식이 끝나고 곧장 이곳으로 오는 바람에 미처 옷을 갈아입을 시간조차 없었던 것이다.

‘꼭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군. 저 정도 미모에 화려한 드레스까지 걸치고 있으니 말이야.’

“아, 킴.”

내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레이첼이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우리 아버지 만난 건?”

“잘 된 것 같아요. 레이첼 아버지가 앞으로 우리 둘이서 구체적인 회사 합병 문제를 진행하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요? 그거 참 잘됐네요.”

레이첼이 무척이나 기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 킴, 우리 오늘 축하주 한잔 해야죠?”

“축하주요?”

“네. 앞으로 할리우드, 아니 세계 영화계를 뒤흔들게 될 새로운 영화사의 탄생을 축하하는 의미로 말이죠.”

내가 레이첼을 향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그래야죠, 하하.”

109.

창문 사이로 비치는 눈 부신 햇살.

그 덕분에 내가 일찌감치 잠에서 깼다.

사실 원래 아침잠이 별로 없는 체질이기도 하고.

그런데.

‘!!!’

낯선 호텔 방,

여기저기 널브러진 옷가지들,

그리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내 옆에 엎드린 채 잠을 자고 있는......

‘레이첼?’

순간 어젯밤에 있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로맨스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장면들.

동시에 엊그제 아버지가 지나가는 투로 나에게 했던 말도 떠올랐다.

- 흠. 요즘 합병은 회사 오너끼리 서로 부둥켜안고 하나 보지?

“깼어요, 킴?”

레이첼이 졸린 눈을 비비며 나를 향해 말했다.

“아, 레이첼, 회사에 좀 나가봐야 할 것 같아서요.”

“벌써요?”

“네. 곧 다음 영화 프리 들어가잖아요. 레이첼은요?”

“저도 일어나야죠. 오늘 오전에 이번 영화의 모델인 메리 잭슨 씨와 인터뷰 약속이 있거든요.”

“그럼 우리 씻고 준비해서 같이 아침 먹고 가죠.”

“그래요, 킴.”

찍어야 할 다음 영화는 ‘스릴러’인데,

현실은 ‘로맨스’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

“아, 킴.”

사무실에 들어서자, 제임스 카메룬이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나를 맞았다.

“일찍 나왔네요, 지미.”

“일이 좀 있어서요.”

“근데 뭐 좋은 일 있어요? 기분이 꽤 좋아 보이는데?”

“영화 <터미네이터>가 흥행에 성공한 것도 모자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상까지 받았는데, 제가 어찌 기분이 좋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하.”

어제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터미네이터>는 최우수 시각 효과상을 받았다.

영화에 사용된 특수 효과, 특히 오프닝에 들어간 CG 전투 장면이 관계자들의 엄청난 호평을 받으며 큰 화제를 몰고 왔기 때문이었다.

‘역시 명불허전이군. 단 한 편의 영화로 제임스 카메룬은 거의 스타 감독의 반열에 올라서게 되었으니 말이야.’

제임스 카메룬이 나를 향해 물었다.

“그나저나 킴. 이번에 새 영화 들어가신다면서요?”

“예. 이라는 제목의 스릴러 영화인데, 조지 루이스가 제작을 맡고, 제가 연출을 맡기로 했어요.”

“와우! 그럼 영화 <레이더스> 이후에 두 분이 다시 손을 잡고 만드는 두 번째 영화가 되겠군요.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의 기대가 무척 크겠는데요?”

“그래서 조금 걱정이 되기는 해요. 원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니까.”

“킴이야 뭐, 할리우드 최고의 흥행 감독이니 이번에도 좋은 작품이 만들어지겠죠.”

“지미는 어때요? 이제 슬슬 <터미네이터> 속편도 한번 생각해봐야죠?”

“그렇긴 한데......”

제임스 카메룬이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전편이 워낙 큰 성공을 거두어서 그런지 속편 시나리오를 쓰기가 좀 부담스럽네요. 킴이 방금 말했듯이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잖아요.”

“너무 부담 갖지 말고 한번 써봐요. 전에도 잠깐 이야기했다시피 속편은 인공지능 스카이넷이 존 코너를 직접 암살할 목적으로 터미네이터를 다시 과거로 보낸다는 줄거리면 충분할 테니까요.”

“스토리야 그렇다 치더라도, 영화 핵심 캐릭터인 터미네이터의 설정과 특수 효과를 어떻게 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 같아요. 게다가......”

제임스 카메룬이 이런저런 걱정들을 늘어놓았다.

<터미네이터> 1편이 워낙 큰 흥행 성적을 기록했는지라, 속편 제작에 대한 부담도 그만큼 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혀 걱정할 필요 없어요, 지미. 머잖아 당신이 만들게 될 영화 <터미네이터2>는 전작보다 나은 속편은 없다는 영화계의 속설을 보기 좋게 비웃으며 영화 사상 최고의 SF 액션 영화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것은 물론 흥행에도 큰 성공을 하게 될 테니까.’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