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 반전 영화 (2) - 여기부터 유료입니다. >
미국 대다수 산업이 그렇지만,
특히 할리우드 영화계는 유대 자본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다.
이른바 ‘빅식스(Big Six)’라 불리는 할리우드 대표 영화사들도 모두 유대인들이 대주주인 경우가 많았다.
영화 산업이 돈이 된다는 사실을 간파한 유대인들이 일찌감치 이 분야로 진출한 탓이었다.
‘레이첼이 소유하고 있는 유니온 픽처스도 마찬가지이지. 유니온 픽처스가 단기간에 중견 영화사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Film Kim이 만든 영화 대다수를 배급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막대한 유대 자본의 지원을 받고 있기 때문이지.’
아마도 레이첼의 아버지가 나를 만나려는 이유도 이 때문인 듯했다.
최근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영화사인 Film Kim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도 충분한 투자 가치가 있는 회사이니까.
내가 레이첼을 향해 물었다.
“갑자기 레이첼의 아버지가 왜 절 만나고 싶어 하는 거죠?”
“아버지가 오래전부터 킴을 아주 유심히 지켜보고 계셨어요. 지금까지 킴이 만든 영화는 예외 없이 모두 흥행에 성공을 거두었고, 그 덕분에 Film Kim 또한 눈부신 성장을 해왔으니까요.”
“충분한 투자 가치가 있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라는 뜻입니까?”
“네. 게다가 우리 아버지가 킴의 팬이기도 하거든요.”
“예?”
“우리 아버지가 킴이 만든 영화를 좋아하신다고요. 그중에서도 특히 <레이더스>와 <체이스 오브 리벤지>를 가장 재미있게 보셨고요.”
“흐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한번 만나 뵙도록 하죠.”
“시간은 언제가 좋으시겠어요?”
“이번 주말 정도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제가 지금 새 영화 시나리오 작업 중이라 평일에는 시간 내기가 조금 곤란할 것 같아서요.”
“새 영화 시나리오요?”
레이첼이 눈빛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만드는 영화마다 족족 흥행 신화를 기록하는 할리우드 최고의 흥행 감독 중의 하나인 내가 다시 새로운 영화를 만든다고 하니 그녀도 관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어떤 영화에요, 이번에 만들 영화는?”
“글쎄요, 아직 구상 단계라 구체적으로는 이야기하기 힘들 것 같아요. 다만 기존의 영화들과는 조금 다른 성격의 영화를 만들 예정이에요.”
“무척 기대되네요. 킴이 이번에는 또 어떤 영화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지가.”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레이첼은 계획 없어요?”
“계획요?”
“새 영화 계획요. 이번에는 레이첼이 직접 시나리오를 써서 영화를 만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글쎄요, 제가 워낙 글 쓰는 재주가 없어서요.”
“소설 쓰는 것도 아닌데, 너무 완벽하게 쓸 필요는 없어요. 게다가 주제만 잘 잡으면 나머지 부분은 현장 취재를 통해 계속 살을 붙여나갈 수 있을 테니까요. 아니면 적당한 원작을 구해서 직접 각색하는 것도 나쁘지 않고요.”
“흐음.”
내가 레이첼을 향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소스 하나 드려요?”
“네?”
“내가 레이첼이 만들 만한 적당한 영화 소재 하나를 추천해드려도 되냐고요.”
“그렇게 해주시면 저야 대환영이죠.”
“내 생각에 기왕 레이첼이 인종 문제와 같은 사회 비판적 영화를 만든 만큼, 앞으로도 계속 그런 류의 영화를 만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적당한 사회적 메시지와 더불어 영화적 흥미도 갖춘 영화 말이죠.”
“구체적으로 어떤......”
내가 머릿속으로 전생에서 본 영화 하나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레이첼 혹시 ‘메리 잭슨’이란 이름 들어보셨어요?”
“메리 잭슨이요?”
“네. 얼마 전에 지역 신문 기사에도 났었는데.”
“글쎄요, 잘 기억이......”
“메리 잭슨은 NASA(미항공우주국) 최초의 흑인 여성 엔지니어가 된 사람이에요. 이제 나이가 많아서 내년쯤에 NASA에서 퇴사할 예정이고요.”
“아! 그러고 보니 얼핏 들은 기억이 나네요. NASA에서 추진한 여러 가지 프로젝트에 참여해서 큰 역할을 했다던.”
“맞아요. 레이첼도 알다시피 NASA와 같은 중요한 정부 기구는 유색인종이 입사하기 무척이나 힘든 곳이잖아요? 특히나 여성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리 잭슨이 NASA에 입사했다는 것은 그녀가 매우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라는 뜻이죠. 무엇보다 메리 잭슨이 NASA에 처음 입사한 시기는 흑인 차별이 극심하던 1950년대 초였어요. 그 때문에 NASA에 입사한 이후로 그녀가 얼마나 심한 인종 차별을 겪었을지는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이죠.”
“그러니까 지금 킴의 말은......”
레이첼이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NASA 최초의 흑인 여성 엔지니어인 메리 잭슨을 모델로 한 영화를 한번 만들어보라, 이 말인가요?”
“그렇죠.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실제 주인공인 메리 잭슨의 동의가 있어야겠지만. 게다가 여러 번의 인터뷰를 통해 실제 그녀의 삶이 어땠는지에 대한 조사도 이루어져야 하고요.”
<히든 피겨스>란 제목의 영화였다.
내가 지금 레이첼에게 소스를 준 영화는.
하지만 레이첼이 직접 현장 조사를 통해 시나리오를 쓸 것이기 때문에, 내용이나 연출은 전생의 그것과 많이 달라지게 될 것이 분명했다.
“킴! 정말 고마워요!”
레이첼이 내 목을 와락 껴안으며 말했다.
“역시 킴은 천재에요! 어떻게 이런 좋은 영화 소재를 다 생각해냈는지.”
“뭐, 뭘요. 그보다 이 팔 좀 풀어줘요. 숨 막혀요.”
“어머, 미안해요, 킴. 내가 너무 흥분해서 나도 모르게 그만......”
“괜찮아요. 그보다 이번 영화 투자도 내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걸로 할게요. 촬영에 대한 조언도 겸사겸사해 줄 겸.”
“그래요. 킴.”
“식사 다 끝났으면 이제 그만 일어나죠. 전 다시 사무실에 들어가서 시나리오를 써야 해서요.”
***
기왕 LA 한인 타운 인근에 온 김에,
나는 잠깐이나마 아버지 얼굴을 보고 가기로 했다.
그런데.
“도훈이 너!”
사무실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아버지가 큰 소리로 나를 향해 말했다.
“이 배신자 녀석!”
“가, 갑자기 왜 이러세요, 아버지?”
“너 인마 아버지랑 약속했어, 안 했어?”
“무슨 약속요?”
“여자 친구 생기면 가장 먼저 아버지한테 이야기하기로. 근데 내가 이 중요한 사실을 세탁소 서 씨한테 전해 들어야겠냐?”
“그런 거 아니에요, 아버지.”
“뭐?”
“오늘 같이 밥 먹은 사람은 우리 회사랑 거래하는 투자배급사 사장이에요. 회사 합병 문제도 논의할 겸, 겸사겸사 같이 밥 한번 먹은 거예요.”
“흠. 요즘 회사 합병은 오너끼리 서로 부둥켜안고 하나 보지?”
“예?”
“서 씨가 그러더라. 둘이 밥 먹다 갑자기 서로 부둥켜안더라고.”
“그건......”
“됐고, 언제 아버지한테 소개해 줄 거냐? 서 씨말로는 꽤 미인이라던데?”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아직? 그 말은 진행 중이라는 뜻이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레이첼에게 호감이 있는 것은 사실이에요.”
“레이첼? 그 아가씨 이름이 레이첼인가 보구나.”
“네. 근데 둘 다 워낙 바빠서 아직 연애 같은 건 생각할 여유가 없어요.”
“인마, 사람 사는 데 연애만큼 중요한 것이 또 어딨다고. 너 영화계에서 로맨스 영화들이 왜 꾸준히 인기 있는 줄 알아? 그건 이 세상에서 사랑보다 중요한 것도 또 없기 때문이야. 특히 도훈이 너 같은 젊은 나이에는.”
“으, 제 사생활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때 되면 아버지께도 이야기 할거고요. 그보다 아버지.”
“응.”
“요즘은 좀 어때요? 여기 한인들과 흑인들 관계 말이에요.”
“많이 좋아졌어. 무엇보다 한인 단체와 흑인 단체가 서로 협력해서 앞으로 계속 관계 개선에 노력하기로 했으니까, 예전과 같은 그런 불미스러운 일들은 크게 일어나지 않을 거야. 아, 그리고......”
아버지가 다시 말을 이었다.
“흑인 단체 쪽에서도 아주 적극적이더라. 도훈이 네가 만드는 영화의 투자에 참여하는 일 말이야.”
“잘됐네요. 그럼 회사 직원들에게 이야기해서 실무적인 일을 추진하라고 할게요.”
“그렇게 해라. 아, 그리고 집에 가는 거면 잠시만 기다려라. 아버지 하던 일만 마무리하고 같이 가게.”
“아뇨, 아버지. 저 다시 회사 들어가 봐야 해요.”
“이 늦은 시간에?”
“영화 시나리오를 좀 써야 해서요. 시나리오는 특히 밤에 쓰는 것이 집중이 더 잘 돼서요.”
“아까 그 레이첼인지 뭔지 하는 아가씨랑 데이트 하러가는 건 아니고?”
“아버지!”
“하하, 농담이다, 농담. 그렇다고 너무 늦게까지는 일하지 말고. 젊은 놈이 자꾸 그렇게 밤새우면 뼈 삭는다.”
“네. 아버지 먼저 들어가서 주무셔요.”
105.
사무실로 돌아온 나는,
커피 한 잔을 타들고 다시 영화 의 시나리오 작성을 시작했다.
이번 영화 은 영화 전체의 플롯을 뒤엎는 결말을 가진 반전 영화이다.
따라서 영화의 진행 중간중간 이를 암시하는 복선을 깔아두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 때문에 여느 때보다 훨씬 신경 써서 시나리오를 작성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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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고급 바(Bar).
닉이 일행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있었다.
닉의 사회적 위치에 걸맞게, 함께 있는 일행들도 대부분 제법 잘나가는 전문직 종사자들이었다.
“니들 정신병 환자를 판별하는 가장 요긴한 방법이 뭔 줄 알아?”
“뭔데?”
닉이 평소보다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아무래도 미친 것 같다고 대놓고 이야기하는 거지. 그럼 진짜 미친놈들은 한결같이 자기는 미치지 않았다고 이야기해.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지. 그럼 미친 게 맞아. 자신이 미쳤다는 것은 아는 미치광이는 미치광이가 아니거든.”
“그럼 닉. 우리 같은 정상적인 사람은 뭐라고 대답하는데?”
“내 뺨을 후려치면서 이렇게 이야기하지. 뭐 이런 돌파리가 다 있어? 진짜 미친 건 바로 당신이야! 라고.”
“하하하.”
“호호호.”
사람들이 웃자, 닉도 덩달아 큰소리로 따라 웃었다.
하지만.
그의 웃음은 왠지 모르게 서글픈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무슨 일 있어요, 닉?”
일행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닉과 같은 정신과 의사이자, 인턴 시절부터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 제시카가 닉을 향해 말했다.
“무슨 소리야?”
“오늘 하는 행동이 평소의 당신답지 않아서요.”
“없어, 그런 거. 그냥 취하고 싶을 뿐이야. 근데, 빌어먹을. 마셔도 마셔도 취하지가 않네. 정신이 아주 말짱해.”
“같이 있어 줘요?”
“뭐?”
“오늘 밤 내가 닉 당신이랑 같이 있어 줄까요?”
닉을 바라보는 제시카의 끈적한 눈빛.
그런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있던 닉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됐어, 일없어.”
“호호. 안 넘어오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닉을 향해 제시카가 다시 물었다.
“가려고요?”
“늦었어. 이제 그만 집에 가야지.”
“차는 두고 가요. 그러다 지난번처럼 또 사고 치지 말고.”
하지만.
이미 잔뜩 취한 닉의 귀에는 제시카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했다.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자신의 차를 향해 다가가는 닉.
그런데.
“교수님.”
등 뒤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꽤 오래전부터 닉이 치료를 맡아 오고 있던 환자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휴, 패트릭 자네......”
닉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아내 소피아와 유사한 망상 증상을 보이는 환자 패트릭.
계속된 치료에도 불구하고 전혀 호전되는 기미가 보이지 않아 거의 방치하다시피 하고 있는 환자였다.
“도대체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야?”
“모든 게 교수님 때문이에요. 교수님이 한 번이라도 제 말에 귀를 기울여주셨더라면 제가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거라고요.”
“그거 따지려고 이 늦은 밤에 여기까지 온 거야?”
“교수님이 원망스러워요. 내 삶은 교수님 때문에 완전히 망가졌다고요.”
“개소리 집어치워!”
술기운 탓인지,
닉이 이성을 잃고 소리쳤다.
“넌 그냥 미친놈일 뿐이야. 중증의 망상증 환자일 뿐이라고. 네가 그걸 받아들이지 않고 지금처럼 계속 헛소리만 지껄이는 한 절대 넌 그 병을 고칠 수 없어. 내 말 알아들어?”
어쩌면,
이 말은 자신의 아내 소피아에게 하고 싶었던 원망이었을지도 몰랐다.
몇 년을 자신의 가슴 속에만 품고 있던.
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의 아들 해리가 죽은 것도,
아내 소피아가 정신병 증세를 앓는 것도,
모두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안해, 패트릭. 내가 술기운 때문에 너무 흥분했어. 그래서 내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어. 내일 병원에서 보자. 내일 병원에 다시 와서 차분히 자네의 증상을......”
이성을 되찾은 닉이 패트릭을 향해 사과를 하려는 순간,
- 탕!
갑작스러운 총소리와 함께 닉이 배를 움켜잡고 쓰러졌다.
패트릭이 닉에게 총을 쏜 것이었다.
- 탕!
또다시 울려 퍼지는 한 발의 총성.
닉에게 총을 쏜 패트릭이 이번에는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쏘고 자살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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