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 반전 영화 (1) - 여기까지 무료입니다. >
103.
영화사 Film Kim.
제작한 세 편의 영화가 모두 절찬리에 상영을 끝마쳤다.
하지만 사무실은 여전히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해외 배급 및 정산, VHS 제작 및 판권 계약 등의 후속 업무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부수적인 일들은 모두 우리 회사 소속 직원들의 몫일 뿐이었다.
내가 할 일은 다시 새로운 영화를 제작 또는 투자하는 일이었다.
‘일단 홍콩 쪽 상황부터 먼저 정리해보자. 이번 <영웅삼색>의 대히트로 홍콩 영화계에서는 이와 유사한 느와르 영화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오겠지. 특히 그 시초격의 영화를 만든 우리 영화사 쪽으로 투자 의뢰가 많이 들어올 테고. 하지만......’
모든 홍콩 느와르 영화가 다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실제 흥행에 성공한 영화보다 실패한 영화의 숫자가 더 많았다.
이는 다수의 흥행 성공 경험이 있는 유명감독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령 예를 들면,
‘<영웅삼색> 1, 2 편에 이어 세 번째 연출을 맡은 영화 <첩혈쌍웅>까지 모두 흥행에 성공한 오웬삼 감독, 하지만 네 번째 영화인 <첩혈가두>는 영웅삼색의 아류작이라는 혹평을 받으며 흥행에서도 대참패를 하게 되지. 그 결과 오웬삼 감독은 거의 빈털터리 신세로 전락하고 말이야.’
따라서 내가 할 일은 홍콩 현지의 Film KIm 지점으로 들어오는 영화 시나리오를 선별해서 최종적인 투자 결정을 내리는 일이었다.
어떤 영화가 성공하고, 어떤 영화가 실패할지는 그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여직원 이레나가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휴, 무거워.”
이레나가 손에 들고 있는 수십 편의 영화 시나리오 책자를 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 그녀를 향해 내가 말했다.
“남자 직원들에게 부탁하지, 체구도 작은 이레나가 이걸 직접 들고 오고 그래요?”
“제 일이잖아요. 제가 해야 할 일을 남에게 부탁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죠.”
“그 왜, 기사도 정신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그건 사적인 관계에서나 해당하는 말이고요. 공적인 직장에서 내 일을 남이 대신하는 건 민폐죠.”
흠.
이런 게 동양적 사고와 서양적 사고의 차이인가?
“할 말이 없네요.”
“여기......”
이레나가 서류 하나를 내 앞에 내밀며 말했다.
“홍콩 현지 사무실에 투자 의뢰가 들어온 영화 목록입니다. 읽어보시기 편하게 해당 영화들의 시나리오도 순서대로 같이 정리해두었어요.”
“고마워요, 이레나.”
“근데 이 많은 시나리오를 사장님이 진짜 일일이 다 읽어보실 생각이세요?”
“당연하죠. 시나리오도 안 읽어보고 어떻게 투자 결정을 하겠어요?”
라고 말은 했지만,
사실 이는 그럴듯한 명분에 불과했다.
전생의 기억 덕분에 나는 제목만 봐도 이 영화 시나리오가 흥행에 성공할지, 그렇지 않을지를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제목만 보고 영화 투자를 결정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분명해. 그래서 최소한 시나리오를 읽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고.’
내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이레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참 대단하세요, 사장님은. 직접 영화 시나리오도 쓰고, 연출도 하고, 여기에 제작 참여는 물론 투자 결정까지 직접 하시니 말이에요. 사장님은 완전 영화 제작 계의 슈퍼맨이세요.”
“그런 낯뜨거운 이야기는 그만하고, 괜찮으면 커피 한 잔만 부탁할게요. 이 시나리오 전부 다 읽어보려면 오늘 밤을 새워도 모자랄 것 같아서요.”
“그럴게요, 사장님.”
이레나가 사무실을 나가고,
내가 곧바로 영화 목록들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쓸만한 영화들이 별로 없군. 들어온 시나리오들이 전부 다 <영웅삼색>의 인기에 편승해보려는 아류작들에 불과하군.’
그런데.
유독 내 눈에 들어오는 영화 시나리오가 하나 있었다.
전형적인 홍콩 무협 영화에 로맨스적 요소를 섞은 내용의 영화 <기연(機緣)>이었다.
‘<기연>이라......’
전생의 내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 영화였다.
그 말인즉슨, 이 영화가 상업적인 흥행과는 거리가 먼 영화라는 뜻.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시나리오를 주목한 것은 시나리오를 쓴 감독의 이름이 너무나도 유명한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영화 <기연>의 장소동 감독.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이 감독은 영화 <천년유혼>과 <동방무패> 시리즈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감독이지. 따라서 아마 이 <기연>이라는 영화는 장소동 감독의 처녀작 내지는 초창기 영화인 것이 분명하군.’
생각을 마친 내가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홍콩 현지 Film Kim 지점의 미셸 예와 통화를 하기 위해서였다.
“여보세요, 미셸?”
- 아, 사장님. 어쩐 일이세요?
“보내 준 영화 시나리오와 관련해서 이야기 좀 하려고요. 시간 괜찮죠?”
- 네. 지금 막 출근했어요.
홍콩과 미국은 대략 12시간의 시차가 난다.
그 때문에 지금 내가 있는 할리우드는 해가 저문 저녁이지만, 홍콩은 새로운 아침이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다른 게 아니라, 내가 미셸이 팩스로 보낸 시나리오들을 모두 검토해봤는데......”
- 벌써요?
“네. 근데 딱히 투자를 하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영화가 없더라고요.”
- 그래요?
“네. 그래서 일단은 다른 영화 투자는 좀 보류하고, 오웬삼 감독의 <영웅삼색> 속편 제작에만 집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 알겠습니다, 사장님. 그렇게 하도록 할게요.
“아, 그리고......”
내가 책상 위에 놓인 영화 <기연>의 시나리오로 눈길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들어온 시나리오 중에 <기연>이라는 제목의 영화 시나리오가 있을 거예요.”
- <기연>요?
“네.”
- 아, 이 작품 장소동 감독이 직접 쓴 시나리오네요. 그래서 저도 이 작품 좀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미셸 양이 장소동 감독을 잘 알아요?”
- 개인적인 인연이 있는 것은 아니고요, 이분이 이곳 홍콩에서는 워낙 유명한 무술 감독이라서요. 그래서 웬만한 홍콩 무술, 무협 영화에는 거의 다 참여하셨을걸요?
“그래요?”
- 네. 혹시 사장님께서 이번 영화에 투자하시려고요?
“이번 영화는 좀 그렇고요. 대신 시나리오 내용을 보니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충분한 분이신 것 같아서요. 그래서 제가 언제 한번 만나봤으면 해서요.”
- 그러시구나. 그럼 제가 약속을 한번 잡아볼까요?
“그전에 일단 장소동 감독과 관련된 자료들을 내가 먼저 받아보고 싶어서요. 미셸이 직접 조사해서 자료를 팩스로 좀 보내줘요.”
- 알겠습니다, 사장님. 다음 번 시나리오 전송할 때 장소동 감독 관련 자료도 같이 보내도록 할게요.
“네, 그럼 수고해요, 미셸.”
104.
모든 영화 시나리오에는 ‘플롯(plot)’이 존재한다.
플롯은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 정도로 정의할 수 있는데, 좋은 영화들은 대부분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플롯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1990년대 들어 이 플롯을 완전히 뒤집는 결말을 가진 영화가 등장하면서 영화를 본 관객들을 엄청난 충격에 빠뜨리게 하지. 그 대표적인 영화가 바로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유주얼 서스펙트>와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식스센스>이고.’
물론 이 두 영화 이전에도 반전 기법을 사용한 영화들이 있었다.
일례로 최초의 반전 영화라 불리는 로베르트 비네 감독의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에서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던 인물이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밝혀진다.
또한 조지 루이스가 만든 <스페이스 워즈>에서 악당 다스베이더가 알고 보니 주인공의 아버지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관객들에게 충격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어떤 영화도 <유주얼 서스펙트>와 <식스센스> 이 두 영화만큼이나 관객들에게 충격적인 반전을 선사하지는 못했다.
그 덕분에 이 영화는 흥행에도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고.
‘그런데 만약 내가 지금 시기에 이 같은 충격적인 반전 결말을 가진 영화를 만들게 된다면......’
영화의 흥행은 물론 영화감독으로서도 또 한 번 엄청난 명성을 얻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나의 다음 작품으로 영화관을 찾은 관객들을 엄청난 충격에 빠뜨릴 ‘반전 영화’를 만들기로.
이번에 내가 새로 만들 반전 영화의 제목이었다.
제목처럼 이번 영화 곳곳에는 결말의 충격적인 반전을 암시하는 여러 가지 징후(sign)들이 숨겨져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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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닉(Nick).
그는 유명 TV 프로그램에도 출연할 정도로 저명한 정신과 의사이다.
덕분에 닉은 물질적으로나 사회적 관계에 있어서나 전혀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는 그에게도 한 가지 말 못 할 고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아내의 심각한 정신병이었다.
- 딸깍.
늦은 밤.
고급 승용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서는 닉.
그의 집 또한 자신의 명성에 걸맞는 고급 주택이었다.
하지만 집안 분위기는 왠지 모르게 음침했다.
“아직 안 잤어?”
거실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는 아내 소피아를 향해 닉이 물었다.
소피아가 뭔가에 홀린 듯한 멍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유령이 보여요.”
“휴, 또 그 소리야?”
“정말이에요. 그들이 저에게 말을 걸어온다고요.”
망상장애.
닉이 내린 아내의 진단명이었다.
계속된 약물치료에도 불구하고 전혀 나아지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약은? 약은 꼬박꼬박 잘 챙겨 먹고 있는 거지?”
“......”
“주사 한 방 놔줄게. 그럼 편하게 잘 수 있을 거야.”
닉이 소피아의 팔에 약물이 들어 있는 주사를 놓았다.
점점 몽롱해가는 의식 속에서 소피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도 똑같아요.”
“뭐가?”
“저 유령들이랑요. 그들과 마찬가지로 당신도 당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고 하잖아요.”
“......”
순식간에 잠이 든 소피아.
그런 그녀의 얼굴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던 닉이 다시 거실의 TV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TV에서는 소피아가 틀어놓은 비디오가 재생되고 있었는데, 마당에서 한 금발 아이가 천진난만하게 뛰어노는 장면이었다.
‘해리......’
몇 해 전,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그의 아들이었다.
아내 소피아의 정신병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고.
‘젠장......’
TV를 끈 닉이 외투를 챙겨 들고는 다시 집을 나섰다.
어디가서 술이라도 잔뜩 취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잠이 들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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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기까지 시나리오를 썼을 때,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레이첼이었다.
- 저녁 먹었어요, 킴?
“이제 먹으려고요.”
- 보나 마나 또 샌드위치 몇 조각 먹고 치울 생각이죠?
내가 책상 위에 올려진 샌드위치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읔! 혹시 나 감시라도 하는 거예요?”
- 그럴 리가요, 호호. 그럼 킴, 나도 마침 저녁 안 먹었는데 우리 같이 저녁이나 먹으러 갈래요?
“저녁이요?”
- 네. 제가 킴에게 할 말도 좀 있고요.
“그렇게 해요. 지금 출발하면 레이첼 사무실에 아마 20분 내로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기다릴게요, 킴.”
***
LA 한인 타운 인근의 한식당.
내가 유니온 픽처스 사장 레이첼과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
일전에 레이첼이 한국 음식을 한번 먹어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서 겸사겸사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이 음식은 이름이 뭐예요, 킴?”
난생처음 보는 한국 음식이 무척이나 흥미로운 듯 레이첼이 이것저것을 묻기 시작했다.
“김치찌개인데, 한국에서는 가장 대중적인 음식입니다. 하지만 레이첼은 좀 먹기 불편할 수도 있어요. 주재료인 김치가 좀 많이 맵거든요.”
“이건요?”
“불고기입니다. 소고기를 양념에 버무려서 볶은 음식이죠.”
“둘 다 색감이 좋은 것이 꽤 먹음직스럽게 생겼네요. 먼저 한번 먹어봐도 되죠?”
“그럼요.”
레이첼이 조심스럽게 음식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런 그녀를 향해 내가 물었다.
“어때요? 먹기 거북하면 괜히 억지로 안 먹어도 됩니다. 한국 음식이 좀 독특한 면이 있어서요.”
“아뇨, 괜찮아요. 김치찌개인가 하는 이 음식은 좀 매워서 힘들긴 하지만요, 후후.”
“하하, 그나마 다행이군요. 아 참, 레이첼.”
내가 레이첼을 향해 물었다.
“일전에 이야기한 회사 합병 문제 있잖아요.”
“아, 안 그래도 내가 그 문제에 대해 킴과 한번 이야기하려고 했었는데......”
매운 김치찌개 때문인지,
황급히 물 모금을 들이킨 레이첼이 다시 말을 이었다.
“킴 혹시 우리 아버지 한번 만나볼 생각 있으세요?”
“레이첼 아버지를요?”
“네.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유니온 픽처스는 우리 아버지가 상당량의 지분을 보유하고 계세요. 그래서 회사 합병은 최대 주주인 우리 아버지의 동의 없이는 진행이 불가할 듯해서요.”
“흐음.”
내가 살짝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레이첼이 다시 웃으며 말했다.
“너무 부담스러워할 필요 없어요, 킴. 사실 킴을 만나자고 한 건 우리 아버지가 먼저니까.”
“레이첼 아버지가 저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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