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 트리플 크라운 (5) >
101.
영화 의 화려한 흥행 성적표를 들고,
내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LA 한인회관의 우리 아버지였다.
사실 이번 영화는 LA 한인회장인 아버지가 하는 일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 위해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예상외로 영화가 엄청난 흥행을 기록하게 된 것이다.
“도훈아, 어서 와라. 안 그래도 내가 너 기다리고 있었다.”
한인회관 사무실로 들어서자,
아버지가 반가운 얼굴로 나를 맞아주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아버지도 이미 알고 계신 것 같네요.”
“네가 만든 영화 가 흑인들 사이에서 엄청난 화제가 되고 있다는 소식 말이냐?”
“흑인들 뿐만이 아니에요. 인종을 불문하고 수많은 사람이 우리 영화를 보러 극장을 찾았어요. 덕분에 제작비와 극장 배분 수익을 빼고도 무려 3천만 달러에 가까운 돈을 벌게 되었어요.”
“허, 3천만 달러라니. 정말 엄청나구나. 내가 전부터 느낀 거지만 영화 산업이라는 것이 참 대단한 것 같아. 영화 한 편 잘 만들면 수천만 달러 정도는 그냥 벌어들이니 말이야.”
당연하지.
때론 할리우드 영화 한 편이 이름만 대면 알만한 세계적인 제조회사보다 훨씬 많은 수익을 기록하기도 하니까.
“돈도 돈이지만......”
아버지가 다시 나를 향해 말했다.
“이번에 네가 만든 영화 덕분에 이곳 LA 흑인들이 우리 한인들을 대하는 태도가 확연하게 달라졌어. 예전에는 흑인들이 동양인들 가게에 와서 이런저런 시비도 많이 걸고 했는데, 요즘은 그런 일이 아주 적어졌어. 이게 다 도훈이 네 덕분이야.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도훈이 널 동양의 마틴 루터 킹이라고 부르는 흑인들도 있다더구나.”
“설마요.”
“진짜라니까. 안 믿기면 찬수한테 가서 물어봐.”
“뭐, 어쨌든 잘됐네요. 안 그래도 요즘 아버지가 LA의 한인과 흑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애를 많이 쓰시는데 제가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리게 되었으니까요.”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조만간 LA 흑인 단체에서도 우리 한인회와 진지한 만남을 가질 모양이야. 서로 간의 갈등 해결 방법을 찾기 위해서 말이야. 이전에 내가 그렇게 요청할 때는 콧방귀도 안 꼈었는데 아마도 이게 다 도훈이 네가 만든 영화의 영향 때문인 것 같아.”
“그래서 말인데요, 아버지.”
내가 통장 하나를 아버지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제가 이번 영화의 수익금 전액을 한인회 발전 기금으로 드리려고 해요.”
“뭐, 뭐라고?”
“아버지의 목표가 앞으로 LA 한인과 흑인들의 갈등을 지속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상설 기구를 만드는 것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러려면 꽤 많은 돈이 필요할 것이고요. 그래서 제가 이 돈을 아버지에게 드리는 거예요. 게다가 일전에 봉팔이 아저씨에게 경제적 여건이 나아지면 한인회 발전에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한 것도 있고요.”
“허 참, 내가 이 돈을 받아도 될는지 모르겠다. 도훈이 네가 힘들게 만든 영화로 번 돈인데......”
“괜찮아요, 아버지. 제가 이 영화를 만든 건 다 아버지 때문이고, 그 덕분에 생각지도 않았던 수익이 생겼으니까요. 그리고 아버지도 우리 영화사의 주주나 마찬가지잖아요. 그러니 배당금 받는다 생각하고, 그냥 부담 없이 받으세요.”
“인마, 내가 어떻게 네 회사 주주냐. 그 회사는 어디까지나 도훈이 네 회사지.”
“기억 안 나세요, 아버지? 제가 처음 <체이스 오브 리벤지>를 만들 때, 아버지가 제작비로 쓰라고 주신 돈 10만 달러. 그때 아버지가 그 돈을 주셨기 때문에 저와 Film Kim이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어요. 그러니 아버지는 충분히 이 돈 받을 자격이 있으세요.”
“도, 도훈아.”
아버지가 살짝 감동먹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아버지를 향해 내가 다시 말했다.
“예전에 아버지가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하셨었죠. 한번 사는 인생인데 하고 싶은 것은 하고 살아야 한다고. 이제 아버지도 하고 싶은 일 하시면서 사셔도 돼요. 돈 걱정은 하지 마시고요.”
“말만이라도 충분히 고맙다. 아, 그리고 내가 도훈이 너한테 한 가지 물어볼 말이 있는데.”
“말씀하셔요, 아버지.”
“저번처럼 영화에 한인들 투자는 또 언제 받을 생각이냐? 그때 재미를 봐서 그런지 다들 나만 보면 그거부터 물어본다.”
“그게 법적인 문제가 조금 생겨서요.”
“법적인 문제?”
“네. 지난번에는 너무 급하게 일을 추진하는 바람에 회사에서도 법리적인 검토를 제대로 못해서 사후에 조금 문제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번에는 제대로 된 법적 절차를 밟아서 투자를 받으려고요.”
“그래?”
“네. 그 문제만 해결되면 앞으로 한인들의 투자는 지속적으로 받을 생각이니, 다들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전해주세요.”
“알겠다, 그렇게 하마.”
“아, 그리고......”
내가 다시 말했다.
“그때는 이곳 LA 지역의 흑인들 투자도 같이 받으려고요.”
“흑인들도?”
“네. 이번 영화로 인해 LA 흑인과 한인 간의 관계가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또 예전처럼 안 좋아질 수도 있잖아요.”
“충분히 그럴 수 있지.”
“그래서 흑인들도 영화 투자에 참여시켜 수익을 가져갈 수 있게 하면 지금과 같은 좋은 관계가 계속 유지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오! 그거 나쁘지 않은 생각이구나. 그럼 내가 조만간 흑인 단체 대표와 만남을 가지게 되면 지금 도훈이 네 생각을 전해줘도 괜찮겠냐?”
“네. 나중에 준비가 되면 제가 회사 실무팀을 보내서 구체적인 일을 진행할 수 있도록 할 테니, 아버지는 그동안 흑인 단체 대표들과 사업에 관한 공감대만 좀 형성해두시면 될 것 같아요.”
“그래, 알겠다.”
아버지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아들 하나는 아주 잘 둔 것 같구나. 아주 못하게는 없어, 하하하.”
“아버지도 참.”
***
내가 LA 지역 한인들과 더불어,
흑인들까지 Film Kim이 만드는 영화 투자 참여시키려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앞으로 우리 Film Kim은 계속해서 성장해 나갈 것이고,
제작하는 영화 편 수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회사 자금만으로는 절대 이를 감당할 수 없다.
다른 회사들처럼 외부 자금 유치가 반드시 필요하게 된다.
‘문제는 그렇게 되면 투자자들이 회사의 경영에까지 관여할 위험이 크다는 것이지. 그럴 바에는 차라리 불특정 다수로부터 소액 투자를 받는 것이 훨씬 나을 수도 있어. 적어도 이들은 내가 어떤 영화를 만들든, 어떤 영화에 투자하든 절대 관여하지 않을 테니까. 대신 그들이 만족할 만한 적당한 수익만 가져다주면 그만이지.’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언제인지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지만, 조만간 있을 LA 흑인 폭동, 그 과정에서 이곳 한인들이 입게 될 피해를 막기 위해서이지. 지금부터 아버지와 내가 노력해서 흑인들과 한인들의 관계를 영화의 주인공인 심슨과 조지의 관계처럼 갈등에서 협력으로 바꿀 수만 있다면 적어도 전생에서처럼 흑인들이 한인 가게를 습격하는 일은 절대 발생하지 않을 테지.’
LA 지역에 사는 한인과 흑인들의 관계를 일종의 사회, 경제적 공동체 관계로 만드는 것,
그래서 아버지와 아버지 친구들이 LA 흑인 폭동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
그것이 지금 내가 LA 한인들과 더불어 흑인들까지 Film Kim이 제작하는 영화 투자에 참여시키려는 이유였다.
102.
영화사 Film Kim.
조지 루이스가 오래간만에 내 사무실을 찾아왔다.
“이야, 킴. 요즘 장난이 아니던데?”
“무슨 소리예요?”
“최근에 Film Kim에서 만든 영화 말이야. 근 1년 사이에 만든 영화 세 편이 모두 성공하면서 일명 ‘트리플 크라운(Triple Crown)’을 달성했다고 언론에서 떠들썩하더구먼.”
“아, 난 또 무슨 말인가 했네요.”
“그래서......”
조지 루이스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총 누적 수익이 얼마야? 영화 세 편 모두 합쳐서.”
“영화 <터미네이터>가 3억 달러, 가 9천만 달러, <영웅삼색>이 4천만 홍콩 달러니까, 대략 한 4억 달러 정도 조금 못 되게 번 것 같네요.”
“허헐, 이 불경기기에 그것도 1년 만에 4억 달러라는 엄청난 수익을 올리다니.”
“중요한 건 아직 이 영화들의 해외 배급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거죠. 그래서 해외 수익까지 합치면 아마 여기서 최소 1억 달러 이상은 추가되지 않을까 싶어요.”
“나 참, 도대체 킴은 어떻게 된 사람이 실패를 몰라? 어떻게 그렇게 제작하는 영화마다 성공할 수 있는 거야?”
“운이 좋은 거죠, 뭐. 그나저나 조지 같은 영화 갑부가 저 돈 얼마 벌었는지 확인하러 온 건 아닐 테고, 무슨 일이에요?”
“그게......”
조지 루이스가 말을 이었다.
“전에 우리 같이 하와이 갔을 때 같이 의논했던 영화 말이야, 그거 언제 시작하나 싶어서. 사실 난 킴과 같은 능력 있는 감독이 영화를 제작만 하고 직접 연출하지 않는 것이 무척이나 안타까워. 그래서 이번 참에 내가 제작을 맡고, 킴이 연출한 영화를 만들면 어떨까 해서. 지난 영화 <레이더스> 때처럼 말이야.”
“아 참,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레이더스> 속편은 누가 메가폰을 잡기로 했어요?”
“스티븐 스필버그. 킴이 속편 제작을 거절하면서 나에게 그를 추천해주었잖아. 그래서 얼마 전에 촬영을 끝마치고 지금 후반 작업을 진행하고 있어. 제목은 킴의 의견대로 주인공의 이름을 딴 인디아나 존슨으로 바꾸고, 여기에 따로 제작진들이 ‘미궁의 사원’이라는 부제를 붙였고.”
“그래요?”
“응. 근데 왜 이번 속편은 킴이 직접 연출하지 않고 투자자로만 참여한 거야?”
그때는 내가 한참 명성을 쌓아가던 시기라 그랬지.
이제야 영화가 다시 원주인, 아니 원래 감독을 찾아간 거고.
속마음을 감추며 내가 말했다.
“제가 고전 시리얼 영화의 향수가 그리 많지 않은 세대라 그런지 연출하면서 조금 힘에 부치더라고요. 아마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저보다 훨씬 잘 연출할 수 있을 거예요. 그분은 할리우드 최고의 흥행 감독이시니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 그보다 아까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하자고. 이번에 우리 같이 손잡고 제대로 영화 한번 만들어 보는 거 어때? 그때 하와이에서 결정한 것처럼 말이야.”
“글쎄요, 제가 요즘 제작 일에 집중하다 보니 아직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도 못해서요.”
“그러니까 빨리 시작하라는 말이야. 그때 킴이 나에게 들려준 아이디어 굉장히 참신했으니까.”
“알겠어요, 조지. 이제 저도 조금 시간적 여유가 생겼으니까 재충전의 시간도 가질 겸 시나리오 작업을 한번 시작해볼게요.”
“그래. 시나리오 완성되면 가장 먼저 나에게 보여주는 거 잊지 말고. 근데......”
조지 루이스가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말고,
나를 향해 다시 물었다.
“그때 하와이에서 이번 영화의 장르가 뭐라고 했었지? 생소한 용어라서 잘 기억이 안 나네.”
“이제 겨우 마흔 살밖에 안 됐는데, 벌써 그렇게 깜박깜박하면 어떻게 해요, 조지.”
내가 조지 루이스를 향해 빙긋 웃으며 말했다.
“Plot twist 또는 Twister Movie라고 부르는 장르예요. 물론 아직은 제가 임의로 붙인 이름이기는 하지만.”
Twister Movie.
우리 말로 번역하면 ‘반전(反轉)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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