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머리 감독의 할리우드 정복기-57화 (57/145)

# 57 < 흑, 백, 황, 모두가 같은 살색입니다 (2) >

93.

영화사 Film Kim.

내가 그동안 여러 차례의 각본 회의를 거쳐 최종 완성된 영화 의 시나리오를 살펴보고 있었다.

이번 영화는 미국 사회의 ‘인종 차별’을 주제로 한 사회비판적 성격의 영화였다.

이를 위해 나는 각 인종을 대표하는 다양한 캐릭터를 영화에 등장시킬 예정이었다.

‘먼저 영화의 주인공인 심슨과 초이. 이 두 사람은 현재 LA 지역에 만연한 한인과 흑인 간의 갈등을 대변하는 인물이지.’

따라서 영화의 초반부에는 심슨과 초이가 서로 대립하는 모습을 LA 지역의 한-흑 갈등 상황과 연결하여 심도 있게 표현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영화가 전개되면서,

이 두 사람의 관계는 갈등 관계에서 협력 관계로 변화하게 된다.

그 계기가 된 것은 바로 초이가 심슨의 변호를 맡게 되면서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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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사무장의 보고를 받은 초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심슨이 살인을 저질렀다고?”

“예, 변호사님. 문제는 심슨이 자신의 변호인으로 변호사님을 지목했다는 것입니다.”

불현듯 초이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

그것은 지난번 심슨의 집에 초대받아 갔을 때, 그가 했던 말이었다.

‘이봐, 초이. 나 변호해줄 수 있어?’

당시 설마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심슨이 진짜로 자신의 딸을 살해한 범인들을 죽일 것이라고는 초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살해 도구는?”

“총입니다.”

“동기는?”

“범인들이 1심에서 집행 유예 판결을 받아 석방되었기 때문입니다. 소식을 들은 심슨이 법원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미리 준비한 산탄총으로 범인들을 모두 잔혹하게 살해했고, 이후 곧바로 경찰에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돌아버리겠군.”

“저기, 변호사님.”

“왜?”

“안 맡으실 거죠? 이번 사건?”

“무슨 뜻이야?”

“지금 이 사건 백인들에게 엄청난 공분을 사고 있습니다. 물론 이건 흑인들도 마찬가지고요. 괜히 이런 복잡한 사건에 휘말려 들었다가 애꿎은 변호사님만 피해를 볼 수 있습니다.”

“일단 심슨 그 사람을 먼저 만나보는 것이 우선이야. 변호를 할지 말지는 그다음에 결정할 문제고.”

초이가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사무장을 향해 말했다.

“그래도 초이 그 사람이 내 이웃사촌(neighborhood)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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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인 심슨과 황인인 초이, 이 두 사람의 관계 변화를 통해 내가 표현하고자 한 것은 백인들의 차별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유색인종끼리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지. 실제 영화에서 LA 한인들이 흑인들을 도와 심슨의 무죄 석방 운동에 함께 나서는 장면이 등장하는 것도 바로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고.’

아울러,

영화에는 심슨과 초이 외에도 비중 있는 조연이 또 한 명 등장할 예정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 검사, ‘마크 루비오’가 바로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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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검찰청 소속의 마크 루비오.

그는 오로지 출세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에게 이번 심슨 사건은 절호의 기회였다.

이번 사건이 언론을 통해 미국 전역으로 보도되면서 사람들의 큰 관심을 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사건을 마크 자네에게 배당해달라고?”

부장 검사의 물음에 마크가 눈빛을 번뜩이며 대답했다.

“예, 부장님.”

“자네 이번 사건이 어떤 사건인지 아나? 이건 단순한 살인사건이 아니야. 깜둥이 놈 주제에 감히 우리 백인들의 권위에 도전한 사건이라고. 10년 전만 해도 이런 깜둥이들은 모두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죽였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사건을 저에게 맡겨 달라는 것입니다.”

“스타가 되고 싶은 거겠지. 지금 미국의 전 언론이 이번 사건에 집중하고 있는 만큼 자네 같은 정치 검사에게는 인지도를 높일 좋은 기회가 아닌가?”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이번 사건을 저에게 주시면 반드시 그 흑인 놈이 사형 선고를 받도록 만들겠습니다.”

“자신 있어? 배심원들을 설득해 유죄 판결을 받아낼 자신이 있냐고.”

“물론입니다.”

마크 루비오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이 세운 전략을 부장 검사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백인 위주의 배심원 구성에서부터,

극단적 백인 우월주의자로 구성된 KKK단을 동원한 협박,

나아가 심문 과정에서 피고인 심슨을 자극해 그의 폭력성을 법정에서 드러나게 하는 심리적인 수법 등이 그것이었다.

“흐음.”

한동안 마크 루비오의 말을 듣고 있던 부장 검사가 그의 앞에 서류 뭉치들을 던지다시피 내려놓으며 말했다.

“좋아. 내 자네의 말을 한번 믿어보지. 대신 이번 사건이 잘못되면 검사 옷 벗을 각오하는 것이 좋을 거야. 이번 사건은 우리 백인들의 권위와 명예가 걸려있는 사건이니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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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등장하는 마크 루비오 검사는 히스패닉계 미국인이었다.

‘히스패닉’이란 스페인계(또는 라틴 아메리카 출신) 미국인들을 가리킨다.

외형적으로 백인에 가까운 이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숨기고 백인 중심의 미국 주류 사회에 편입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미국 사회에서 히스패닉들은 미국 주류 백인들과 인종적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있어. 따라서 흑인인 심슨이 어떻게든 중형을 받게 만들려는 마크 루비오 검사를 히스패닉계 미국인으로 설정하면 미국 내 각 인종들의 위치가 아주 극명하게 드러날 수 있을 것이 분명해.’

주인공인 심슨과 초이, 범인과 검사를 각각 흑인, 황인, 백인, 히스패닉에 대비시켜서 현재 미국 사회의 인종적 이해관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

이것이 이번 영화를 통해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중요한 의도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심슨의 변호를 맡은 초이의 최종 변론 장면이지. 이 장면에서 초이는 배심원들의 마음을 뒤흔들 정도로 감동적인 변론을 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불리했던 법정 분위기가 일순간에 반전되어 결국에는 심슨도 무죄 판결을 받게 되지.’

각기 다른 피부색을 가진 흑인, 백인, 황인.

하지만 이들 모두가 동등한 인격을 가진 존재라는 점을 초이의 최종 변론을 통해 드러내려는 것이었다.

내가 영화의 가장 하이라이트가 될 초이의 변론 장면이 담긴 시나리오를 살펴보려는 순간,

“바빠요, 킴?”

사무실 문이 열리며 레이첼이 모습을 드러냈다.

“영화 최종 시나리오를 좀 살펴보고 있었어요. 근데 무슨 일이에요, 레이첼?”

“영화 제작에 참여할 스태프 리스트와 예산안이 완성되어서 킴에게 확인받으려고요.”

“그래요?”

“네. 살펴보시고 수정해야할 부분이 있으면 저에게 이야기해주세요.”

“알겠어요.”

“아 참, 킴. 이번 영화에 출연할 배우 섭외는 어떻게 돼가고 있어요?”

이번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배우가 몇 사람 있었다.

그 때문에 내가 직접 영화의 중심 배역을 맡을 인물들을 섭외하고 나선 것이었다.

“일단 해당 배우들에게 시나리오를 보내 뒀으니, 조만간 회사로 연락이 올 거예요.”

“무척 궁금하네요. 이번에는 또 킴이 어떤 훌륭한 배우를 발굴해낼지. 그동안 킴이 만든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은 하나 같이 연기력을 인정받으며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영화 배우가 됐잖아요.”

레이첼의 말마따나,

그동안 내가 만든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은 하나같이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유명 배우가 되었다.

현재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는 액션 배우 배니 스콧과 윌리엄 포드, 할리우드 최고의 섹시 스타 중의 하나로 꼽히는 비비 케이츠, 역대 최고의 악역 배우로 꼽히는 잭 니콜라슨과 안소니 홉킨즈가 바로 그들이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당연히 내가 가진 전생의 기억 덕분이지. 전생의 기억 덕분에 나는 앞으로 할리우드를 대표할 영화 배우로 성장할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너무나도 분명히 알고 있었고, 이에 한발 앞서 그들을 내 영화에 캐스팅할 수 있었던 것이지. 물론 이는 이번 영화 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속마음을 감추며 내가 레이첼을 향해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봐요, 레이첼. 내가 이번 영화에 꼭 맞은 배우들을 섭외해 올 테니까요, 흐흐.”

94.

할리우드 인근의 평범한 주택.

한 흑인 남자가 영화 시나리오를 살펴보고 있었다.

남자의 손에 들린 시나리오의 첫 장에는 라는 영화 제목이 적혀 있었다.

‘제목이 유색인종이라, 굉장히 독특한 제목의 영화이군.’

한동안 시나리오를 읽어가던 흑인 남자가 마침내 시나리오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그리고는 의자 깊숙이 몸을 파묻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분명 이번 영화는 무명 배우인 그에게 첫 주연을 맡을 절호의 기회였다.

영화를 제작하는 제작사나, 연출을 맡은 감독도 꽤 인지도가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영화의 주제가 미국 사회에서 가장 민감한 ‘인종 차별’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도 섣불리 출연 결정을 내리기가 몹시도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아까 읽던 시나리오와 함께 보내온 명함 한 장을 챙겨 들었다.

명함에는 다음과 같은 이름이 적혀 있었다.

< Film Kim / MD JAMES KIM >

“모건, 어디 가려고?”

어머니의 물음에 흑인 남자가 대답했다.

“네. 영화사에서 오디션 요청이 와서요.”

그랬다.

시나리오를 읽던 흑인 남자의 정체는 바로 사무엘 L. 잭슨, 윌 스미스, 덴젤 워싱턴과 더불어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흑인 배우로 성장하게 될 ‘모건 프리먼’이었다.

***

“모건 프리먼요?”

레이첼의 물음에 내가 대답했다.

“네. 이번 의 심슨 역으로 제가 점찍어 둔 배우죠. 혹시 들어보셨어요, 레이첼?”

“글쎄요, 저에게는 낯선 이름이네요.”

그렇겠지.

모건 프리먼은 아직 무명 배우에 불과하니까.

그가 영화 배우로서 두각을 드러내는 것은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이니까.

하지만 전생의 기억 덕분에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뛰어난 연기력을 가진 배우인지를.

무엇보다 고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다른 배우들과는 달리 그는 출연하는 영화마다 전부 색다른 모습의 캐릭터를 선보이며 할리우드의 대체 불가 조연으로 많은 영화팬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제가 앞서 모건 프리먼 씨가 출연한 영화들을 살펴봤는데, 다른 건 몰라도 연기력 하나는 뛰어나더군요. 그래서 이번 영화의 심슨 역할도 아주 훌륭하게 소화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나머지 한 사람, 동양인 초이 역할을 맡을 배우는요?”

“글쎄요, 그건 아직 정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계속 한번 찾아봐야겠죠.”

“LA 한인타운에서 한번 찾아보세요. 듣자니 킴도 한때는 단역 배우로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했다고 하던데.”

레이첼이 재밌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루브론 씨에게 들었어요. 예전에 킴과 함께 <스페이스 워즈>에 엑스트라로 출연했는데, 킴이 촬영장에서 얼 타는 바람에 같이 잘릴 뻔했다고. 게다가 촬영분도 편집 당해서 영화에는 아예 나오지도 않았다고 하던데요? 호호호.”

읔.

나의 숨겨둔 흑역사를 끄집어내다니.

“어때요, 킴. 그때의 경험을 살려서 이번 영화에 킴이 한번 출연해보는 것이.”

“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게다가 저는 나이 차이 때문에 초이 역할을 맡고 싶어도 맡을 수가 없어요.”

“누가 주연으로 출연하래요? 그건 감독으로서 저도 극구 사양이에요. 내 말은 킴이 잠깐 카메오 형식으로 출연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거죠.”

“됐습니다, 레이첼. 사양할게요.”

“호호호, 농담이에요,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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