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머리 감독의 할리우드 정복기-56화 (56/145)

# 56 < 흑, 백, 황, 모두가 같은 살색입니다 (1) >

90.

픽사(Pixar) 애니메이션.

조지 루이스와 내가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는 이 회사는 영화 애니메이션 기술 개발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이다.

내 기억에 따르면,

픽사는 1990년대 세계 애니메이션 시장의 선두 주자로 등극하게 된다.

이에 나는 거액의 자금을 투자해 이 회사를 설립한 것이었다.

하지만 현재 픽사의 상황은 물먹는, 아니 돈 먹는 하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해마다 거액의 개발비가 들어가는 것에 반해 수익은 현저하게 낮았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TV 광고용의 짧은 애니메이션이나 자막 제작으로 약간의 수익을 창출하는 것이 전부였다.

하드웨어 부분도 마찬가지였다.

최근 픽사에서는 막대한 개발비를 투입해 고성능 그래픽용 컴퓨터를 만들었다.

이 컴퓨터는 당시 최고의 성능을 갖추고 있던 슈퍼컴퓨터 ‘CRAY/X-MP’를 능가하는 강력한 성능을 자랑했는데, 픽사에서는 병원이나 그래픽 관련 회사 쪽으로 제품 판로를 뚫어 적자 폭을 완화해보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하지만 픽사에서 만든 컴퓨터의 가격이 워낙 고가인 탓에 제대로 된 판로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픽사의 CEO 찰스 레인이 지금 내 앞에서 멋쩍은 표정을 짓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고.

“굳이 그렇게......”

내가 찰스 레인 사장을 향해 말했다.

“수익 창출을 위해 애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픽사에 바라는 것은 단 한 가지, 다른 회사보다 월등히 뛰어난 CG 애니메이션 제작 기술입니다.”

“그래도 해마다 적자 폭이 늘어나는 것이 부담스러워서요. 모 회사인 Film Kim이 벌어들이는 돈을 모두 우리 픽사가 까먹는 것 같아 영 마음에 걸리네요.”

“하하. 그런 부분은 전혀 실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앞으로 픽사가 제대로 된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 그동안의 손해를 충분히 보상받고도 남을 테니까요. 그보다......”

내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내년부터는 꼭 해마다 한편씩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들도록 하십시오.”

“매년 한편씩요?”

“예. 흥행 여부에 상관없이요. 이러한 과정 속에서 쌓인 노하우들이 결국 픽사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될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ILM의 벤자민 파웰 씨가 연락하지 않았던가요?”

“안 그래도 연락이 왔었습니다. 감독님이 ILM에 5분짜리 CG 영상 제작을 의뢰했는데, 이 작업에 우리 픽사에서 만든 그래픽용 컴퓨터가 필요할 것 같다고 하더군요.”

“사장님께서 벤자민을 적극적으로 좀 도와주십시오. 이번에 우리 회사에서 만든 영화가 성공하면 이곳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일대 변혁이 일어날 수도 있을 테니까요. 많은 사람이 영화에 사용된 CG 기술에 대한 큰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죠.”

“알겠습니다. 우리 쪽에서도 최대한 협조하도록 하겠습니다.”

91.

1982년 가을.

영화 <터미네이터>가 크랭크 인 됐다.

SF 액션 영화의 시초가 된 이 영화는 개봉 당시 엄청난 화제를 모으며 흥행에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기계와 인간의 대결이라는 파격적인 스토리,

여기에 엄청난 수준의 특수 효과가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당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적은 제작비인 650만 달러로 4천만 달러가 넘는 큰돈을 벌어들였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그 정도로 끝나지 않지. 전생과 달리 이번 <터미네이터> 1편에는 시대를 뛰어넘는 CG 영상과 Film Kim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촬영 기술, 여기에 배급사인 유니온 픽처스의 적극적인 상영관 확보가 더해질 예정이니까.’

영화 <터미네이터>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흥행 요소들.

여기에 회사 차원의 적극적인 지원이 더해진다면 아마 영화 <터미네이터>는 전생보다 훨씬 큰 흥행 성적을 기록할 수 있을 것이었다.

***

영화 투자 배급사인 유니온 픽처스.

사무실로 들어서는 나를 레이첼 도나 사장이 반갑게 맞았다.

“어쩐 일이에요, 킴?”

“아, 제가 레이첼과 몇 가지 상의할 일이 있어서요.”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내가 본론부터 꺼내 들었다.

“레이첼도 들어서 알고 계시죠? 이번에 우리 회사에서 새로 영화 제작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제임스 카메룬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터미네이터>말인가요?”

“예. 이번 영화는 SF 액션의 시초가 되는 영화인만큼 제가 거는 기대도 매우 큽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유니온 픽처스가 적극적인 개봉관 확보를 위해 노력해주셨으면 합니다.”

“그야 두말하면 잔소리죠. 여태 킴이 제작한 영화치고 흥행에 성공하지 않은 영화가 없으니까요.”

“감사합니다, 레이첼. 아, 그리고 내친김에 이것도 한번 살펴봐 주세요.”

내가 책자 하나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이번에 내가 새로 구상하고 있는 영화 의 시나리오였다.

“제목이 유색인종이네요?”

“그렇습니다.”

“그럼 내용도 인종차별 문제를 다룬 것이겠군요.”

한동안 시나리오를 읽어가던 레이첼이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저기, 킴.”

“예.”

“제가 이런 말을 하면 킴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킴이 이번 영화만큼은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레이첼의 무슨 의도로 저런 말을 하는지는,

그녀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백인 중심의 미국 사회에서, 그들이 가장 불편해하는 인종차별 문제를 건드렸을 때 돌아올 후폭풍을 염려하고 있는 것이었다.

“레이첼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도 이번 영화의 시나리오를 준비 하면서 나름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저도 알아요. 킴이 혼자서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 지를요. 그렇지만 저는 킴이 다치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킴에게 이번 영화를 만들지 말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킴이 어떻게 이 자리까지 왔는지는 다른 누구보다 제가 잘 알고 있으니까요.”

“......”

“만약 그래도 킴이 꼭 이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면......”

레이첼이 내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차라리 제가 감독을 맡을게요.”

“예? 레이첼이요?”

“네. 동양인인 킴보다는 백인인 제가 인종차별 문제를 비판하는 것이 훨씬 부담이 적지 않겠어요? 일종의 자기반성적인 모습으로 보여질 테니까요. 게다가 킴이 안아야 할 부담도 상대적으로 줄어들게 될 테고요.”

맞는 말이었다.

동양인인 내가 백인들의 인종차별을 비판하는 영화를 만드는 것은 다소 공격적인 의미로 비춰질 수 있다.

하지만 백인인 레이첼이 이런 영화를 만들면 이는 반성의 의미가 될 수 있었다.

레이첼은 미국 사회의 주류인 ‘백인’이니까.

“정말로 레이첼이 이번 영화의 연출을 맡을 생각입니까?”

“네. 사실은 저도 오래전부터 미국 사회의 뿌리 깊은 인종차별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오고 있었어요. 그러니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네요.”

“흐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내가 다시 말을 이었다.

“좋습니다. 대신 이전 영화 때처럼 연출 외적인 부분은 전적으로 제가 맡아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제작자의 자격으로요.”

“그렇게 해요, 킴.”

92.

LA에 위치한 Kim′s supermaket.

아버지 소유의 가게이지만, 요즘 실질적인 운영은 거의 찬수 아저씨가 도맡아 하고 있었다.

LA 한인회 회장으로 선출된 이후 아버지는 거의 가게 일을 손 놓다시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 도훈이 네가 웬일이냐? 아버지 만나려면 한인회관으로 가는 게 더 빠를 텐데.”

“오늘은 아버지가 아니라 아저씨를 만나러 온 거예요.”

“날?”

“네.”

내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요즘 아저씨가 고생이 많으시네요. 아버지가 한인회 일을 전담하는 바람에 가게 운영은 거의 아저씨가 도맡아 하다시피 하고 있잖아요.”

“네 아버지가 난생 처음 큰일 한번 해보겠다는데, 내가 옆에서 열심히 도와야지. 그나저나 도훈이 네가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어서 찾아온 거냐?”

“아저씨, 제가 이번에 영화 시나리오를 새로 하나 쓰고 있는데요, 이와 관련해서 여러 가지 자료 조사 좀 하려고요.”

“자료 조사?”

“네. 아저씨는 LA에서 꽤 오랫동안 사셨고, 또 발도 아주 넓어서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속속들이 잘 알고 계시잖아요.”

“아무렴.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내가 이곳 한인 타운의 터줏대감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지. 솔직히 도훈이 아버지라는 타이틀만 아니었으면 아마 네 아버지가 아니라 내가 한인 회장에 당선됐을 것이 분명해.”

“아, 예......”

내가 찬수 아저씨를 향해 이것저것 질문을 시작했다.

그 이유는,

‘이번 영화 의 각본에 들어갈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만들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서이지. 실제 있었던 사실들을 바탕으로 만들면 영화의 장면 하나하나가 사실감 있게 그려질 수 있을 테니까.’

“근데......”

한참 동안 내 질문에 답을 해주던 찬수 아저씨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도대체 어떤 영화를 만들길래 이런 자질구레한 질문들을 하는 거야?”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 문제를 한번 다루어보려고요.”

“인종차별?”

“예. 아저씨도 이곳 미국에서 살면서 많은 인종차별을 겪으셨잖아요. 억울한 일들도 많았을 테고요.”

“으, 말해 무엇하냐. 내 더러워서 다음 생에는 하얀 피부를 가진 백인으로 태어나련다. 근데, 도훈아.”

“예, 아저씨.”

“그런 영화 만들면 백인들이 가만히 있겠냐? 괜히 너한테 해코지하고 그러는 거 아니야?”

“괜찮아요. 이전에도 이런 문제를 다룬 영화들이 제법 있었으니까요. 스탠리 크레이머 감독이 만든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나 로버트 멀리건 감독이 만든 <알라바마 이야기>가 그 대표적인 영화이죠. 게다가 이번 영화감독은 제가 아니라 백인 여성 감독이니까요.”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제야 찬수 아저씨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제 다른 질문은 없고?”

“네,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아저씨.”

“뭘, 도훈이 네 일이라면 나도 발 벗고 나서서 도와야지. 도훈이 넌 우리 한인 사회의 한 줄기 빛과 같은 사람이 아니더냐, 하하.”

“아저씨도 참.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그래. 온 김에 한인회관 들러서 아버지 얼굴도 보고 가고.”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

LA 한인회관.

아버지가 놀란 목소리로 나를 향해 말했다.

“인종차별을 주제로 한 영화를 만들겠다고?”

“네. 제가 전에 아버지에게 말씀드렸잖아요. 저 나름의 방법으로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도와드리겠다고.”

“아서라, 도훈아. 그러다 괜히 너한테까지 피해가 갈라. 아버지 일은 아버지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그냥......”

내가 아버지의 말을 잘랐다.

“단순히 아버지 일을 돕기 위해서만은 아니에요. 영화 제작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인종차별이라는 주제는 충분히 영화로 한번 만들어볼 만한 주제니까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가 살던 전생의 시기에도 ‘인종차별’을 주제로 한 영화는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연출을 맡은 감독이 백인이라 그리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거예요.”

“흐음. 그렇다면 다행이고. 근데, 도훈아. 겨우 영화 한 편으로 그동안 뿌리 깊게 이어져 온 한인과 흑인의 갈등이 나아질 수 있을까?”

아버지의 물음에 내가 속으로 빙긋 웃음을 지었다.

지난 생에서의 경험을 통해,

나는 때론 한 편의 영화가 얼마나 큰 사회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이 유괴 사건을 주제로 한 영화 <그놈 목소리>, 아동 성범죄를 대상으로 한 영화 <도가니>는 우리나라에서 아동 범죄에 관한 새로운 법률을 만들어야 한다는 국민적 여론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영화이지. 이는 외국에서도 마찬가지야. 1999년 장 피에르 감독이 만든 영화 <로제타>로 인해 벨기에 정부는 일명 ‘로제타 플랜’이라 불리는 청년법을 만들었고, 미국에서 만들어진 영화 <피코>는 미국의 낙후된 의료 현실을 풍자적으로 묘사해 의료개혁법안이 통과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었지.’

세상을 바꾸는 영화의 힘.

전생에서 30년 넘게 영화 일은 해온 나는 그 누구보다 이를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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