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머리 감독의 할리우드 정복기-55화 (55/145)

# 55 < <터미네이터>, 그 전설의 시작 (3) >

88.

미국은 ‘인종의 용광로’라고 불릴 만큼 다양한 인종들이 살고 있다.

하지만 이 인종들은 용광로 속의 쇠처럼 서로 녹아들지 못하고 있었다.

백인들은 오래전부터 그들이 ‘colored’라 부르는 유색인종을 차별해왔고, 유색인종들은 유색인종들끼리 서로 갈등과 반목을 거듭해왔다.

한인 타운이 위치해 있는 LA 외곽 지역은 이러한 상황이 더욱 심했다.

LA 슬럼가에 사는 흑인들은 대부분 극빈 계층이었는데, 이들은 특히 인근 한인 점주들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물건을 사고파는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자주 발생했고, 서로 욕설은 물론 인종 차별적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당초의 ‘흑-백’ 갈등이 ‘한-흑’ 갈등으로 변해갔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 LA 한인회를 중심으로 이 같은 한인과 흑인 간의 갈등을 해소하려는 노력이 전개되고 있었다.

한인과 흑인 간의 갈등이 먼저 해결되어야 백인들의 인종차별에 대한 개선도 적극적으로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이는,

1992년에 발생하는 LA 한인 사회의 비극을 막을 수 있는 중요한 단초(端初)이기도 했다.

***

영화 <터미네이터>의 프리 프로덕션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무렵,

나는 또 다른 영화의 시나리오 작성을 시작했다.

이번 영화는 상업적인 흥행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었다.

앞서 LA 한인회 회장으로 선출된 아버지의 일을 돕기 위한 것이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말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한 편의 영화가 때론 수많은 정책보다 더 큰 사회 변화를 이끄는 계기가 되곤 하니까.

< The Colored >

내가 이번에 쓰고 있는 영화 시나리오 제목이었다.

글자 그대로 유색인종, 그리고 그들이 받는 사회적 차별을 주제로 한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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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로스 앤젤레스.

주인공인 ‘심슨(Simpson)’과 ‘초이(Choi)’는 각각 아프리카계 흑인, 한국계 황인의 유색인종이었다.

서로 이웃인 이 두 사람은 거의 앙숙이었다.

만나기만 하면 서로 싸우고 으르렁대기 바빴다.

“헤이, Yellow Monkey. 바나나 하나 줄까? 낄낄낄.”

“Fucking Nigger. 지옥에나 떨어져.”

그러던 어느 날.

초이는 귀갓길에 골목길에 쓰러져 있는 심슨의 딸을 발견하게 된다.

상황은 처참했다.

아직 초등학생밖에 되지 않은 심슨의 딸을 누군가 심하게 폭행한 것은 물론 성폭행 정황까지도 의심이 되었던 것이다.

초이는 곧바로 그녀를 병원으로 데려갔고, 경찰에도 신고를 했다.

연락을 받은 심슨도 급히 병원으로 달려왔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처음으로 욕이 섞이지 않은 대화를 주고 받게 된다.

“고마워, 초이.”

“뭘. 그보다 어떤 놈들이 이런 짓을 했을까? 이 어린아이한테.”

“아직은 모르지. 하지만 내 하나 약속하지, 초이. 내 딸을 이렇게 만든 놈들을 반드시 찾아내고 말겠다고. 그래서 그놈들이 꼭 법의 심판을 받게 만들 거야.”

그날 이후 심슨은,

흑인 친구들을 동원해 딸을 그렇게 만든 범인들을 직접 찾아 나섰다.

피해자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경찰들이 적극적인 수사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추적 끝에,

심슨은 범인을 찾아내게 된다.

네 명의 백인 남성.

그들은 그저 ‘재미’로 어린 흑인 여자아이를 유린한 것이었다.

“형량은 얼마나 받을 것 같아?”

심슨의 집 발코니.

심슨이 초이를 향해 물었다.

자신의 딸을 구해준 고마움의 표시로 심슨이 초이를 자신의 집에 초대한 것이다.

변호사가 직업인 초이에게 여러 가지 법적인 조언을 받기 위함이기도 했고.

“글쎄......”

초이가 손에 든 맥주병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글쎄라니. 초이 너 법률을 전공한 변호사잖아?”

“배심원 12명 가운데 10명이 백인이야. 굳이 심신미약이나 정신병력을 들먹이지 않아도 집행유예로 풀려날 수 있어.”

“뭐?”

심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 딸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버젓이 거리를 활개 치고 다니게 될 수도 있다고?”

“아직은 몰라. 난 그저 가능성을 이야기했을 뿐이지.”

“개새끼들.”

한동안의 침묵을 깨고 심슨이 다시 말했다.

“미안해, 초이.”

“괜찮아. 나도 화나면 욕 하는데 뭐.”

“그거 말고.”

“그럼?”

“그동안 너한테 노란 원숭이라고 한 거.”

“새삼스럽게 뭘.”

초이가 다시 말했다.

“나도 미안해. 깜둥이 새끼라고 욕한 거.”

“있잖아, 초이.”

“말해.”

“나 변호해 줄 수 있어?”

“변호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이건 형사 사건이라고. 범죄의 입증 책임은 변호사가 아닌 검사가 지는 거라고.”

“......”

심슨이 말이 없었다.

순간 초이는 직감할 수 있었다.

심슨, 그가 뭔가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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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내가 시나리오를 쓰다 말고 생각에 잠겼다.

‘이번 영화는 상업적 흥행이랑은 거리가 멀겠군. 백인 일색인 북미 영화 시장에서 흑인과 동양인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만들었으니 말이야. 더군다나 사회적으로 아주 민감한 인종차별이라는 주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으니......’

흥행은 고사하고,

비난만 받지 않아도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실 이런 류(類)의 영화는 내 전공이라고 할 수 있지. 전생에서 나는 아무도 다루지 않는 난해한 사회적인 주제들을 많이 다루곤 했으니까. 물론 그 덕분에 흥행과는 거리가 먼 영화감독이 되어버렸고.’

무엇보다 지금은 1980년대였다.

미국 사회 곳곳에서 여전히 횡행하고 있는 인종차별 문제를, 그것도 동양인 감독이 다루다니.

자칫 잘못하다가 그동안 쌓은 내 커리어가 한방에 무너질 수도 있는 위험한 영화였다.

‘그래도 한 번쯤은 괜찮잖아.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아버지를 위해서. 나아가 아버지의 친구들을 위해서.’

그래서 결심했다.

금전적인 손해나,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이 시나리오를 영화화하기로.

89.

영화사 Film Kim.

제임스 카메룬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터미네이터>의 프리 프로덕션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예상 되는 기간은 대략 3개월이었다.

늘 그렇듯, 완벽한 프리 프로덕션 과정을 거쳐 실제 촬영이 진행될 예정이었다.

“아, 지미.”

내가 회의실로 향하는 지미를 향해 말을 걸었다.

“오늘 시나리오 리딩이 있을 예정이죠?”

“예. 지금 출연 배우들이 모두 회의실에 모여 있습니다. 킴도 참석하실 거죠?”

“미안해요, 지미. 난 따로 볼 일이 좀 있어서요.”

“그래요?”

“네. 사실 나 없어도 지미가 알아서 잘하잖아요. 무엇보다 이번 영화는 지미가 책임지고 완성하기로 했고. 대신 최종 시나리오 리딩 때는 꼭 참석할게요.”

“알겠습니다. 오늘 시나리오 리딩은 제가 책임지고 진행할 테니 킴은 볼일 보고 오세요. 근데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나 보죠?”

“안 그래도 내가 지미에게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이번 영화의 오프닝에 CG로 만든 인간과 기계의 전쟁 장면을 한번 넣어보는 것이 어때요?”

“오로지 CG만으로요?”

“예. 물론 아직 완성도는 장담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가능한지 여부를 제가 가서 한번 확인해보려고요.”

“아, 그래서 시나리오 리딩에 참석하지 않으시는 거군요?”

“예.”

“저야 뭐, 가능만 하다면 대환영이지요. 영화의 퀄리티를 한층 더 높일 수 있는 방법이 될 테니까요.”

“그럼 내가 ILM 기술 책임자를 한번 만나보고 다시 지미에게 이야기해 줄게요.”

“네, 킴.”

내가 제임스 카메룬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어느 틈엔가 <터미네이터>의 주연인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우리 곁으로 와 있었다.

“감독님.”

“아, 아놀드 무슨 일이에요?”

“배우들이 모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해드리려고요.”

“조감독 있는데, 굳이 아놀드가......”

아놀드 슈워제너거.

그는 이번 영화 제작에 있어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임하고 있었다.

지금 그가 시나리오 준비가 다 됐다는 사실을 알리러 온 것도 이번 영화에 대한 그의 의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가 별로 탐탁지 않은 듯,

제임스 카메룬이 아놀드 슈워제너거를 향해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아놀드는 시나리오 리딩보다 그 시간에 몸이나 만들러 가는 것이 낫지 않나. 어차피 대사도 몇 마디 없으니까.”

풉-

내가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제임스 카메룬은 아놀드가 여전히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군. 저렇게 쌀쌀맞게 대하는 것을 보니까 말이야.’

그리고.

나는 볼 수 있었다.

제임스 카메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살짝 열 받은 듯, 아놀드 슈왈제네거의 근육이 ‘불끈’하고 솟아오르는 장면을.

***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ILM.

내가 기술 책임자인 벤자민 파웰을 만나고 있었다.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프로그래머인 그는 꽤 오랫동안 ILM에서 근무해온 사람이었다.

특히 앞서 만들어진 <스타워즈>, <복제인간>, <레이더스> 등과 같은 할리우드 유명 영화에 사용된 CG도 모두 그가 주도해서 만든 것이었다.

내가 벤자민 파월을 찾아온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그에게 영화 <터미네이터>의 오프닝 장면에 들어갈 CG 영상 제작을 맡기기 위해서였다.

사실 1980년대 중반은 아직 제대로 된 CG 기술이 만들어지지 못한 시기이다.

할리우드 영화계에 CG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는 것은 1990년대부터이다.

그런데.

나와 조지 루이스가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은 덕에 현재 ILM의 CG 기술은 전생의 그것보다 훨씬 진일보해 있었다.

‘비록 완벽한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영화에 최초로 CG로만 이루어진 장면을 넣게 되면 이는 분명 할리우드 영화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이 틀림없어. CG는 전 세계 영화 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꾸어놓을 정도로 중요한 기술이니까 말이야.’

“그러니까......”

벤자민 파웰이 나를 향해 말했다.

“영화의 오프닝에 들어갈 대략 5분짜리 CG 영상을 만들어 달라, 이 말입니까?”

“맞습니다. 제가 콘티를 드릴 테니, 그와 유사한 영상을 화면으로 구현해 주시면 됩니다.”

“킴도 아시죠? 쉽지 않은 작업이라는 거. 제작 기간이 오래 걸리는 것은 물론 특히 비용이 무척 많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비용적인 면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영상의 퀄리티만 확보될 수 있다면 비용은 얼마든지 지불할 용의가 있으니까요.”

“후아.”

벤자민 파웰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ILM이 만든 CG는 대부분 TV 광고나 영화의 시각 효과를 덧보이게 하기 위한 부분적인 활용만 이루어졌을 뿐이었다.

영화의 오프닝을 장식할 정도의 풀(full) CG 영상은 한 번도 만들어 본 경험이 없었던 것이다.

“저야 뭐, 킴이 해달라고 하면 하겠지만, 영상의 퀄리티가 킴이 원하는 만큼 나올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일단은 한번 시도해보는 것으로 합시다, 벤자민. 설사 생각했던 것보다 퀄리티가 너무 낮아 영화에 사용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이득이 있을 것입니다. 기술 발전이라는 것이 이런 경험을 축적해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까요.”

“알겠습니다, 일단 한번 해보겠습니다.”

***

나의 의뢰를 받은 벤자민 파웰은 곧바로 35명으로 구성된 제작 팀을 구성했다.

실력 있는 컴퓨터 그래픽 전문가로 구성된 이들은 영화가 제작되는 기간 동안 별도의 5분짜리 오프닝 영상을 만들어 낼 계획이었다.

덕분에 영화 제작비는 처음 책정한 600만 달러를 훌쩍 뛰어넘어 천만 달러에 육박하게 되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제작비가 아니지. 이번 <터미네이터>라는 영화가 기존의 할리우드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도를 했다는 점이 훨씬 더 중요한 것이지. 게다가 이 과정에서 쌓인 노하우는 이후에 제작될 속편이나 또 다른 영화에도 사용될 수 있을 테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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