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 <터미네이터>, 그 전설의 시작 (2) >
86.
“어딜 가려고 짐을 그렇게 바리바리 싸 들고 나가는 거야? 또 어디 해외 출장이라도 가는 거야?”
커다란 여행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려는 나를 향해 아버지가 물었다.
“여행요.”
“여행?”
“네. 사오일 정도 지인과 하와이에 여행을 좀 다녀올까 해서요.”
사실 이름만 여행이지,
진정한 의미의 여행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부부 관계 회복 프로젝트라고나 할까.
전생의 내 기억에 따르면,
조지 루이스 부부는 조만간 서로 파국(破局)을 맞게 된다.
모르면 몰라도,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두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둘 수만은 없었다.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한번은 두 사람이 서로 진정한 대화를 해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고 싶었다.
조지 루이스는 나의 사업적 동반자이자, 소울 메이트이기 때문에.
“잘 생각했다. 안 그래도 요 몇 년 일만 하느라 도훈이 너도 많이 지쳐있을 텐데, 가끔은 이렇게 머리도 좀 식힐 필요가 있지.”
“죄송해요, 아버지. 아버지랑도 같이 여행 한번 가야 하는데.”
“인마, 난 가게 때문에 그렇게 장기간 자리를 비우기 힘들다. 그러니 그런 소리는 하지 마라.”
“요즘 가게 일은 찬수 아저씨가 다 하시잖아요? 그래서 아저씨가 조만간 가게 간판을 ‘Park′s supermaket’으로 바꿀 예정이라던데요?”
“뭐, 뭐라고?”
“흐흐, 농담이에요, 농담. 아 참, 그보다, 아버지. 한인회 일은 잘되고 계세요?”
“한인회 일?”
“네. 아버지가 얼마 전 한인회 회장에 당선되셨잖아요. 그리고 회장으로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같은 LA에서 사는 흑인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일이라고 하셨잖아요?”
LA 한인타운 인근에는 다수의 흑인이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문제는 같은 ‘colored’임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가 무척이나 나쁘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불화가 1992년 LA 폭동 당시 흑인들이 한인 가게를 습격하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한인회 회장으로 당선된 이후 아버지가 흑인들과의 관계 개선에 나선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다간 조만간 흑인과 한인 사이에 유혈 사태가 발생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에.
“어휴, 말도 마라.”
아버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 일 때문에 요즘 골머리가 아파 죽을 지경이니까.”
“왜요? 일이 잘 안 돼요?”
“노력은 하고 있는데 그게 쉽지가 않네. 하긴, 그동안의 긴 세월 동안 쌓인 앙금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풀리겠냐.”
“제가 좀 도와드려요?”
뜻밖의 나의 말에, 아버지가 놀란 토끼눈을 떴다.
“도훈이 네가?”
“네.”
“네가 무슨 수로?”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요. 그래도 제가 명색이 김판석 LA 한인회 회장 아들이잖아요. 그러니 그냥 손 놓고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죠.”
“......”
“일단은 여행부터 좀 다녀오고요. 그런 다음 아버지를 좀 도와드릴게요.”
“그, 그래.”
***
4박 5일간의 하와이 일정.
앞서도 말했다시피, 이는 조지 루이스와 아멜리아 두 사람의 소원해진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적극적으로 나설 일은 없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두 부부 문제이니까.
내가 한 일이라고는 그저 두 사람이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분위기와 시간을 만들어주는 일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서로 헤어지게 된다면,
‘아마도 이는 두 사람의 정해진 운명일 테지. 전생자인 나조차도 바꿀 수 없는.’
그리고 또 한 가지.
하와이에서 조지 루이스와 나는 서로 영화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는 점도 이번 여행을 통해 얻은 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킴은......”
여행 마지막 날 밤.
해변가에 나란히 앉아 칵테일을 나누어 마시며 조지 루이스가 나를 향해 말했다.
“영화 경력이 채 10년도 안 된 사람이라는 생각이 안 들어. 최소 몇십 년은 영화판에서 구른 베테랑 영화인 같단 말이야.”
“그럴 리가요.”
“단순한 교과서적인 내용이 아니야, 킴이 알고 있는 영화적 지식은. 모두 현장 경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지식이지. 그런 점에서 볼 때 킴은 참 신기한 사람이란 말이야.”
“전생에 영화 감독이었나 보죠.”
“뭐라고?”
“제가 영화에 대해서 잘 아는 건 전생에서 수십 년간 영화를 만든 영화 감독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고요. 그것도 상업적으로는 쫄딱 망한. 그래서 전생의 못다 한 한을 풀기 위해 이렇게 환생을 하게 됐나 보죠, 뭐.”
이렇게 대놓고 사실을 이야기해도 별 걱정은 없었다.
어차피 믿을 사람도, 의심할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하하, 킴도 참. 농담도 무슨 그런 농담을......”
이거 봐.
비현실적인 과학 판타지(SF) 영화의 거장 조지 루이스조차도 내 말을 안 믿잖아.
“그나저나, 고마워 킴.”
“예? 갑자기 뭐가요?”
“킴이 왜 뜬금없이 나에게 여행을 가자는 제안을 했는지, 사실 나도 알고 있었어. 내가 그 정도 눈치가 없는 사람도 아니고 말이야. 킴이 요즘 날이 갈수록 소원해지는 아멜리아와 나 사이가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
“......”
“근데 말이야, 킴. 사람 일이라는 것이 노력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야. 어쩌면 운명 앞에 사람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아주 미약한 존재에 불과할지도 모르거든.”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어쩌면 조지 루이스도 아멜리아의 불륜을 눈치채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모른 척하는 것은 아멜리아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는.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조지?”
“그런 게 있어. 그보다 이제 돌아가면 <터미네이터>인지 뭔지 하는 그 영화 때문에 또 바쁘겠군.”
“글쎄요, 그 영화는 제임스 카메룬에게 전적으로 맡겨 두려고요. 저는 그저 제작비나 기술적인 지원만 해주려고요.”
“킴이 그 사람을 꽤나 믿고 있나 보군.”
“네. 아까도 말했다시피 지미는 아주 뛰어난 영화 연출 능력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래서 오히려 제가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요.”
“그럼 킴은? 설마 따로 영화를 제작할 생각할 가지고 있는 거야?”
“네.”
“으. 잠시도 쉬지를 않는구먼. 그래서 이번 영화는 어떤 영화인데? 또 얼마나 많은 수익을 올릴 생각인 건데?”
“이번 영화는......”
내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상업적인 성공을 목표로 한 영화는 아니에요. 다른 목적이 있어서 만드는 영화예요.”
“다른 목적?”
“그게 뭔데?”
“아직 머릿속으로만 구상하고 있는 단계라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는 좀 그렇네요. 나중에 시나리오가 완성되면 그때 다시 말씀드릴게요.”
“그래. 그나저나 무척 의외군. 킴이 상업적이지 않은 영화를 만들겠다니 말이야.”
“그럴 일이 좀 있어서요.”
조지 루이스가 남아 있는 칵테일 잔을 비우며 말했다.
“그나저나 밤바람이 점점 쌀쌀해지는 것 같군. 우리도 이제 그만 정리하고 숙소로 들어가자고.”
“예, 조지.”
87.
영화사 Film Kim.
영화 <터미네이터> 제작을 위한 프리 프로덕션이 시작되고 있었다.
총 600만 달러의 제작비가 투입된 이번 영화는,
내가 제작자로, 제임스 카메룬이 감독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사실 할리우드 영화계에서는,
감독보다 제작자의 영향력이 더 컸다.
감독은 오직 영화의 연출만 담당할 뿐, 나머지 부분은 오롯이 제작자의 영역이었다.
그 때문에 영화 제작 전 과정이 나와 제임스 카메룬은 적극적인 의논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지미, 스토리보드 작성은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어요?”
나의 물음에 제임스 카메룬이 대답했다.
“이제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내가 누차 이야기를 하지만 영화 제작에 있어 스토리보드는 그 어떤 과정보다 중요합니다. 그 때문에 아주 디테일하게 만들어야 해요. 프로덕션에서 해야 할 모든 과정이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배우 섭외는요?”
“그게......”
제임스 카메룬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대다수 배역은 섭외가 다 끝났는데, 나머지 한 배역만 아직 섭외를 끝내지 상태입니다. 후보로는 여러 명 생각해둔 사람이 있는데, 아직 확실하게 결정하지 못해서요.”
“혹시 그 배역이 살인 병기 터미네이터 역인가요?”
“예, 맞습니다.”
흐음.
확실히 고민할 만하군.
터미네이터는 이번 영화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배역이니까.
“그 가운데 가장 염두에 두고 있는 배우는 누구죠?”
“O.J 심슨입니다. 미식축구 선수 출신이다 보니, 체격도 아주 다부지고요.”
O.J 심슨.
북미 최고의 히트 코미디 영화인 <총알 탄 사나이>로 유명한 배우이다.
물론 이 영화보다 더 그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것은 이른바 ‘O.J 심슨 사건’이라 불리는 살인 사건이었지만.
“O.J 심슨은 너무 인상이 선하지 않아요? 영화 설정상 터미네이터가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 병기인데.”
“그래서 저도 지금 고민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지미만 괜찮다면 내가 한 사람을 추천해도 될까요?”
“마땅한 배우가 있습니까?”
“글쎄요, 판단은 어디까지나 감독인 지미의 몫이니, 일단 한번 만나보고 결정합시다.”
***
할리우드 인근의 한 헬스장.
나와 제임스 카메룬이 안으로 들어서자, 운동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유독 눈에 띄는 인물이 있었다.
터질 듯이 우람한 근육이 아직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이,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는 더 무거운 기구를 들어 올리고 있는 한 남자.
‘아놀드 슈워제네거. 영화 <터미네이터>로 일약 세계적인 액션 배우로 거듭나게 된 인물이지.’
전생의 내 기억에 따르면,
제임스 카메룬은 아놀드 슈워제너거를 영화에 출연시키는 것을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다소 무식(?)해 보이는 이미지에, 오스트리아 출신이라 영어 발음마저 어눌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제작사의 적극적인 개입이 없었다면 아마도 아놀드 슈워제네거는 영화 <터미네이터>에 출연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안 되지, 절대 안 되지.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없는 <터미네이터>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우니까.’
내가 제임스 카메룬에게 적극적으로 아놀드 슈워제네거를 추천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저기 저 남자 보이죠?”
내가 아놀드 슈워제네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사람이 보디빌더이자, 영화 배우인 아놀드 슈워제네거란 사람인데, 어때요? 지미가 그리고 있는 터미네이터의 모습과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나의 말에,
제임스 카메룬이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외모만 놓고 볼 때, 확실히 그는 터미네이터의 역할에 잘 어울릴 만했다.
별다른 대사 없이, 오로지 몸으로만 위암감을 선사하는 캐릭터가 바로 터미네이터였기 때문이다.
“외모는 그럭저럭 쓸 만하네요. 배우로서의 능력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걱정하지 말아요, 지미. 내가 아놀드의 전작인 <코난 더 바바리안>이란 영화를 봤는데, 연기력이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니더라고요. 조금 투박한 면이 있기는 해도 잘 다듬으면 괜찮은 연기자가 될 소지가 충분하더라고요.”
“그럼 일단 대본을 주고 오디션을 한번 진행해 볼까요.”
“그러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캐스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갔다.
대본을 받아 본 아놀드 슈워제네거는 영화 배우로서 자신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왔음을 직감하고, 적극적으로 이 역할을 맡으려 했다.
가끔 제임스 카메룬이 나에게 아놀드가 오스트리아 출신이라 영어 대사가 서투르다는 푸념을 늘어놓긴 했지만,
‘그래도 아놀드 슈워제네거만큼 터미네이터 역할에 잘 어울리는 배역을 찾기는 힘들 거야. 이는 전생의 내 경험을 통해 이미 증명된 사실이니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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