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 < 홍콩 상륙 작전 (1) >
80.
홍콩 국제 공항.
비행기 한 대가 미끄러지듯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사장님, 여기예요, 여기.”
때마침 공항에 마중 나와 있던 미셸 예(Michel Ye)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현재 영화사 ‘Film Kim-Hong Kong’의 지사장직을 맡고 있었다.
홍콩 현지 영화사인 ‘시네마 시티’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그녀 또한 우리 회사 소속으로 적을 옮긴 것이다.
사실 ‘Film Kim-Hong Kong’은 그동안 간판만 영화사 간판을 달고 있었을 뿐, 영화 제작과 관련해서는 크게 하는 일이 없었다.
그저 미국 본사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을 홍콩 현지 극장에 배급하거나, 해당 영화의 VHS를 판매하는 등의 부수적인 일만 해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다르지. 앞으로 ‘Film Kim-Hong Kong’은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는 홍콩 느와르 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어 갈 대표적인 영화사가 될 테니까.’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죠?”
“고생은요. 모처럼 비행기에서 편하게 쉴 수 있어서 좋았죠, 하하.”
“공항 앞에 차 대기 시켜뒀으니, 이동하면서 향후 일정에 관해 설명드리도록 할게요.”
“그러죠.”
내가 홍콩을 찾아온 이유는 간단했다.
머잖아 시작될 홍콩 느와르 영화 시대의 개막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1980년대를 기점으로 홍콩 영화는 그야말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아시아 영화 산업의 중심이 된 것이다.
홍콩은 오랫동안 영국의 통치 하에 있었고, 이에 아직 민주화가 덜 된 다른 아시아 국가들보다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창작활동이 가능했다.
그 덕분에 홍콩 영화는 아시아에서 가장 빠른 발전을 이루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내 전생의 기억에 따르면 이 시기 홍콩 영화의 장르는 크게 두 축으로 나누어지지. 하나는 이소룡, 성룡, 홍금보와 같은 걸출한 스타 배우를 앞세운 무술, 무협 영화이고, 또 하나는 주윤발, 유덕화, 장국영을 중심으로 칼 대신 권총을 잡는 현대식 무협인 홍콩 느와르라는 장르이지.’
이 가운데 내가 주목한 것은 홍콩 느와르 쪽이었다.
왜냐하면 무협이나 무술 쪽은 ‘골든 하베스트’라는 홍콩 최대의 영화사가 이미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에 상대적으로 경쟁이 덜한, 아니 지금으로서는 거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홍콩 느와르 시장을 개척하기로 한 것이다.
‘앞선 시네마 시티의 인수로 홍콩 느와르 영화 시대의 시작을 알릴 영화 <영웅삼색>의 원작은 이미 확보됐어. 이제 감독을 섭외해서 본격적으로 영화를 촬영하는 일만 남았고.’
“홍콩에는 일주일 정도 머무르신다고 하셨죠?”
미셸 예의 물음에 내가 대답했다.
“예. 이번 주말 비행기로 다시 미국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일정이 많이 빠듯하겠네요. 일주일 안에 정해진 일정을 다 소화하시려면 말이죠.”
“부지런히 움직여야죠. 그리고 앞으로는 미셸 양이 제 역할을 대신해주셔야 할 겁니다. 중간중간 제가 홍콩에 들어와서 확인하긴 하겠지만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사장님.”
손에 든 수첩을 내려다보며, 미셸 예가 다시 나에게 말했다.
“그럼 일단 오늘은 오웬삼 감독과의 미팅부터 먼저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요.”
***
홍콩 시내의 유명 호텔.
내가 한 남자와 마주 앉아 있었다.
남자의 정체는,
‘오웬삼. 영화 <영웅삼색>의 원 감독으로 홍콩 느와르라는 장르를 실질적으로 창시한 인물이지.’
내가 전생의 기억과 홍콩으로 오기 전 사전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그에 관한 정보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고,
그를 우리 영화사로 영입하기 위해서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특히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오웬삼 감독. 그는 원래 무술영화를 주로 만드는 감독이었지. 영화 쪽으로는 나름 재능을 인정받아 한때 홍콩 최대 영화사인 골든 하베스트 사의 지원을 받아 영화를 만들기도 했고 말이야.’
그런데.
최근 오웬삼 감독은 극심한 슬럼프에 빠져있었다.
그동안 너무 같은 장르의 영화 연출을 반복해왔다는 점 때문이었다.
일명 오웬삼표 코미디 무술, 무협 영화가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1970년대 브루스 리(이소룡) 영화를 시작으로 크게 번성했던 홍콩 영화가 1970년대 후반부터 극심한 침체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그는 긴 공백기를 가지게 되었고,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영웅삼색>이라는 영화로 영화계에 다시 화려하게 복귀하게 된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나를 만난 이상 오웬삼 감독 당신은 전생에서와 같은 그런 긴 공백기를 가질 필요가 없어. <영웅삼색>이라는 영화로 곧바로 아시아 최고의 영화감독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테니까.’
속마음을 감추며 내가 오웬삼 감독을 향해 말했다.
“갑자기 만나자고 해서 많이 놀라셨죠?”
“솔직히 그렇습니다. 제임스 킴 감독님 같은 유명한 분이 저 같은 사람에게 연락을 다 주시다니......”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전 이제 겨우 서너 편 정도의 영화밖에 만들지 않은 신예 감독일 뿐입니다. 반면 감독님은 그동안 수많은 영화를 만들어 오셨고요.”
“상업 영화 감독에게 중요한 것은 작품의 숫자가 아니라 흥행 성적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제임스 킴 감독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입니다. 그동안 감독님께서는 무려 10억 달러가 넘는 엄청난 흥행 수익을 올렸으니까요.”
“저에 대해 잘 아시는군요?”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요. 할리우드 최초의 동양인 영화감독이 바로 감독님이시니까요. 감독님 덕분에 이제 아시아 영화감독들도 세계 영화 산업의 메카라 불리는 할리우드 진출을 꿈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고요.”
오웬삼 감독의 말에 내가 속으로 빙긋 웃음을 지었다.
실제 그는 자신의 바람대로 할리우드 진출에 성공하는 몇 안 되는 동양인 감독 중의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그것도 매우 성공한.
‘할리우드 영화계의 거장(巨匠) 쿠엔틴 타란티노, 샘 레이미, 마틴 스콜세지와 같은 영화감독들조차 감탄을 금치 못했던 액션 연출의 대가가 바로 오웬삼 감독이지. 따라서 지금 그와 인연을 맺어두면 아시아 영화시장뿐만이 아니라 추후 할리우드 영화계에서도 많은 히트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을 거야. 물론 전부 우리 Film Kim의 이름으로 말이야.’
“제가 감독님을 뵙고자 한 것은......”
내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감독님께 영화 연출을 하나 부탁하고 싶어서입니다.”
“영화요?”
“예. 제가 일전에 감독님이 연출한 영화 한 편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철한유정>이라고......”
“아, 그 영화는 제가 처음으로 연출을 맡은 영화입니다. 불행히도 내용이 너무 폭력적이라는 이유로 상영금지 처분을 받았지만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감독님의 작품을 마음에 들어 한 ‘골든 하베스트’사가 영화 판권을 구입한 후 편집 과정을 거쳐 VHS(가정용 홈비디오 테이프)로 발매를 했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감독님의 영화가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할뻔했었지요.”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근데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감독님의 영화 <철한유정>을 무척이나 인상 깊게 봤습니다. 특히 액션 장면 연출은 그 어떤 감독의 작품보다도 훨씬 뛰어나더군요.”
“과찬이십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제가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이곳 홍콩까지 직접 오지 않았을 테니까요.”
“......”
잠시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던 오웬삼 감독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제임스 킴 감독님은 정말로 저에게 영화 연출을 맡길 생각이 있으신 겁니까?”
“물론입니다.”
“어떤 작품입니까? 혹시 시나리오를 볼 수 있을까요?”
“시나리오는 아직 없습니다. 다만......”
내가 가방에서 비디오테이프를 하나 꺼내 오웬삼 감독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원작 영화가 있습니다. 물론 판권도 우리가 가지고 있고요. 저는 감독님께서 직접 이 영화를 리메이크해주셨으면 합니다. 감독님의 색깔로 영화를 각색해서 말이죠.”
“원작 영화의 리메이크라......”
“이 작품은 홍콩 출신인 용강 감독이 1967년에 만든 라는 영화입니다. 혹시 보신 적 있으십니까?”
“글쎄요, 굉장히 생소한 영화입니다.”
“아마 그럴 것입니다. 이 영화가 흥행에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거든요. 만들어진 지 꽤 오래된 영화이기도 하고요.”
“영화의 장르는요?”
“범죄 액션 영화입니다. 감독님이 처음 연출을 맡은 작품 <철한유정>과 같은 장르이지요.”
“글쎄요. 제가 이런 류(類)의 영화를 연출해본 지 꽤 오래돼서......”
오웬삼 감독이 살짝 자신 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처녀작인 <철한유정>을 제외하고, 그가 만든 작품은 대부분 무술영화 내지는 코미디 영화였기 때문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동안 감독님은 꾸준히 무술영화의 연출을 맡아 오셨지 않습니까?”
“하지만 무술영화의 액션과 범죄 영화의 액션은 스타일이 완전히 다르지 않습니까?”
“저는 두 영화의 액션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무술영화에서 사용되던 칼이 총으로 바뀔 뿐이지요.”
“예? 그게 무슨......”
“제가 이번 영화에서 감독님께 원하는 것은 딱 한 가지입니다. 기존에 감독님이 연출한 홍콩 무술영화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액션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서 총격씬에 가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영화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총격씬을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이 앞으로 홍콩 영화의 또 다른 특색으로 자리 잡게 만드는 것입니다.”
“!!!”
오웬삼 감독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홍콩 무술과 총격 장면의 접목.
다시 말해, 마치 무술을 하듯 다소 비현실적인 총격전이 펼쳐지는 장면은 기존의 영화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홍콩 느와르라는 영화 장르의 특징이지.’
“무술과 총격 장면의 결합이라......”
한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오웬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짐작컨대,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영화관을 찾은 많은 관객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던 영화 <영웅삼색>의 그 화려한 총격씬의 일부가 어렴풋하게나마 떠오르고 있음이 분명했다.
“어쩌면 이번 영화가 침체에 빠져있는 홍콩 영화 시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줄 수도 있을 것 같군요.”
“물론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영화가 흥행에 성공해야 하겠지만요.”
내가 다시 오웬삼 감독에게 물었다.
“어떻게, 감독님께서 이번 영화의 연출을 맡아 주시겠습니까?”
“기회를 주신다면 한번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좋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감독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아, 그렇다고 너무 부담은 갖지 마시고요, 하하.”
“제작비는 전부 Film Kim에서 지원이 되는 것입니까?”
“물론입니다. 앞으로 홍콩 현지 사무실에서 감독님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게 될 것입니다. 혹시나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언제든지 저에게 연락주시고요.”
“알겠습니다, 감독님.”
오웬삼 감독과 내가 서로 악수를 나누었다.
이제 남은 것은,
‘오웬삼 감독이 영화 <영웅삼색>의 완성본을 가지고 나를 찾아오기까지 기다리는 일이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