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 <체이스 오브 리벤지2: Ride or Die> (4) >
***
LA의 한식당.
아버지와 내가 늦은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 요즘 LA 한인회 일을 거의 전담하다시피 하신다면서요?”
“아, 그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됐다. 너도 찬수한테 들었겠지만 봉팔이 형님이 요즘 건강이 많이 안 좋으셔. 그래서 이사 중의 한 사람이 당분간 회장 대행을 맡기로 했는데, 잘난 아들 둔 덕분에 경제적 형편은 그나마 내가 제일 낫지 않냐. 그 때문에 내가 그 일을 하기로 했지. 같은 동포들을 위해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그런데......”
아버지가 살짝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동안은 내가 먹고사는 게 바빠서 몰랐는데,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니 이곳 미국 사회에서 한인들의 사회적 지위가 형편없이 낮더구나. 이건 뭐, 숫제 흑인들보다 못한 수준이야.”
“그래도 미국 정부는 나름 우리 한인들을 ‘Model minority(모범 소수민족)’이라 부르며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편이잖아요?”
“표면적으로는 그렇지. 하지만 인종적 동맹 관계에 있는 히스패닉을 제외하고는 모두 ‘colored’라는 용어로 뭉뚱그려 똑같이 취급하고 있지.”
“하긴. 저도 처음에는 할리우드 내에서 심한 차별과 따돌림을 당했었죠. 단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죠.”
“내 생각에는 이게 다 우리 한인들이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 못해서 그래. 우리가 투표권만 가지고 있어 봐. 미국 정치인들이 우리 한인들을 지금과 같은 취급을 하겠어? 적어도 우리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늉이라도 하겠지.”
“그래서 아버지는 지금 인권 운동이라도 하시겠다는 거예요? 마틴 루터 킹 목사처럼?”
“내 깜냥에 무슨.”
아버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이었다.
“난 그저 우리 한인들의 지위가 지금보다는 조금 나아졌으면 하는 거지.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곳 LA에 사는 흑인들과의 관계가 좀 개선될 필요가 있어. 오히려 백인들보다 같은 ‘colored’끼리 서로를 더 증오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아버지의 말을 듣는 순간,
문득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기억이 한 가지 있었다.
언제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이곳 LA에서 대규모의 흑인 폭동이 일어나고, 그래서 한인들이 극심한 피해를 입게 된다는 사실이.
안되지, 절대 안 되지.
적어도 우리 아버지만큼은 위험을 피해갈 수 있도록 도와드려야지.
“아버지.”
“왜?”
“전 아버지가 그냥 평범하게 사셨으면 좋겠어요. 아니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서 여생을 보내셔도 좋을 것 같고요.”
“나더러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아버지가 원하신다면요. 이제 경제적 형편도 좋아졌는데, 굳이 타국에서 차별받으며 살 필요는 없잖아요?”
“인마, 아버지 반평생을 미국에서 살았다. 미국은 내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어. 게다가 네 엄마가 여기 묻혀있잖아. 무엇보다 도훈이 네가 여기 있는데, 어떻게 널 두고 나 혼자 한국으로 떠날 수 있겠냐?”
“......”
“아까도 말했다시피, 아버지는 인권 운동이니 뭐니 그런 거창한 일을 할 깜냥이 못 되는 사람이야. 난 그저 도훈이 네 덕에 어느 정도는 먹고살 만 해졌으니, 이제 한인회를 위해 조금은 봉사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어서. 아버지도 이민 초기에 한인회 사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거든.”
“아버지가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인지 잘 알겠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하시고자 하는 일을 반대하지는 않을게요. 대신 한 가지만 약속해주세요.”
“무슨 약속?”
“위험한 일은 하지 않겠다는 거 말이에요. 괜히 남들 위해 총대 메고 그러는 거, 저 딱 싫거든요.”
“그래, 약속하마.”
아버지가 다시 물었다.
“그나저나 새 영화 촬영 준비는 잘 돼가고 있냐?”
“네. 다음 달에 곧바로 촬영 들어갈 예정이에요.”
“잘해 인마. 그 영화 실패하면 너나 나나 이곳 한인 타운에 발붙이고 살기 힘들 테니까, 흐흐.”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 저 제임스 킴이에요. 자타가 공인하는 할리우드의 흥행 보증 수표.”
“......밥이나 먹자, 이눔아.”
73.
1981년 초여름.
할리우드 사상 최대의 제작비가 투입된 영화 <체이스 오브 리벤지2>가 크랭크 인 됐다.
주 촬영지는 전편과 같은 라스베이거스 사막.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영화적 배경과 대규모의 추격씬 촬영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물론 주(州) 정부의 허가를 받아 도심 촬영도 일부 진행될 예정이었다.
영화의 본고장인 할리우드가 있는 나라답게, 미국은 영화 촬영 장소 협조가 무척이나 잘 되는 편이었다.
“자, 잠시 후에 1씬 촬영 시작합니다. 각 팀별로 스탠바이 하세요.”
무전의 타고 감독인 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일순간 촬영장 내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영화의 오프닝 장면이 될 이번 씬은 대규모의 차량과 오토바이가 동원된 액션 장면이었고, 그 덕분에 부상의 위험도 꽤 컸다.
무엇보다 NG가 발생하면, 재촬영에 들어가는 비용 또한 무시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촬영 내내 전 스태프가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자, 그럼 촬영 들어갑니다. 레디...... 액션!”
내 신호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 두다다다당!
뿌연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십수 대의 오토바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악당 티토의 졸개들이 탄 오토바이였다.
동시에,
- 두두두두두두!
헬기 한 대가 그들의 머리 위로 접근했다.
헬기 안에는 촬영 스태프들이 카메라를 들고 오토바이의 질주 장면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었다.
“오케이! 이제 헬기 철수하고, 크레인 차량 이동하세요.”
무전을 타고 흘러나오는 나의 오더(order)에 맞춰,
일명 ‘지미 집 카메라’로 불리는 크레인 카메라를 실은 차량이 달리는 오토바이를 향해 접근했다.
상하좌우로 이동하며 입체감 넘치는 장면을 촬영할 수 있는 이 카메라는 이번 영화를 위해 내가 특별히 제작한 것이었다.
‘영화에 있어 카메라는 곧 관객의 눈과 같다고 할 수 있지. 따라서 이번 촬영에 사용되는 다양한 형태의 카메라와 촬영 기법들은 관객들에게 엄청난 몰입감과 현장감을 선사해주기 충분하지.’
기존의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절대 볼 수 없었던 특별한 화면 구도.
물론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전생의 기억을 바탕으로 내가 최소 몇십 년은 앞선 촬영 도구와 기법을 도입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는 <체이스 오브 리벤지2>를 성공으로 이끌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였다.
“컷! 오케이, 좋았어요.”
첫 촬영임에도 불구하고 NG 없이 단번에 오케이가 떨어졌다.
앞선 영화 촬영을 통해 이미 한번 손발을 맞춰본 상태였기 때문에, 감독급 스태프들은 다들 자신들이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습니까, 감독님. 화면은 잘 나왔습니까?”
모니터를 통해 방금 촬영한 장면을 살펴보고 있는 나의 곁으로 촬영감독 로저 디킨슨이 다가오며 물었다.
“예. 콘티대로 아주 잘 나왔네요.”
“그럼 재촬영 없이 이대로 가면 되겠군요?”
“예. 곧바로 다음 촬영 진행하면 될 것 같습니다.”
뒤이어 ‘클로즈 샷’ 촬영이 진행되었다.
앞선 촬영이 원거리에서 차량과 오토바이의 질주 장면을 담아내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근접 촬영으로 운전대를 잡은 배우들의 표정 연기를 담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이 촬영에는 내가 고안한 또 다른 종류의 크레인 카메라가 사용되었다.
그것은 바로 차량의 루프에 크레인을 달고, 그 끝에 카메라를 설치한 후 운전석에 앉은 배우를 모습을 촬영하는 것이었다.
또한 차량의 외관을 무광 검정색으로 도색해 카메라가 자동차 표면에 비치지 않도록 했다.
‘기존의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프로세스 트레일러에 차량을 실어서 운전 장면을 촬영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었지. 하지만 이 경우 배우가 실제 운전을 하지 않기 때문에 실감나는 화면 연출이 어렵지. 반면 내가 고안한 장치를 이용하면 상대적으로 더욱 생동감 넘치는 화면을 만들어 낼 수 있을 테고.’
이처럼,
내가 가지고 있는 전생의 촬영 기술들은,
현재의 할리우드에서는 거의 미개척 영역이나 다름없는 자동차 추격 장면을 보다 박진감 넘치게 촬영할 수 있는 큰 원동력이 되었다.
***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 촬영 현장에는 스태프만도 수백 명 넘게 동원된다.
여기에 출연 배우, 엑스트라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훨씬 더 많아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무리 조심을 해도 크고 작은 사고들은 어쩔 수 없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특히 대규모의 자동차 추격과 액션 장면이 많은 이번 <체이스 오브 리벤지2>와 같은 영화는 더더욱 그러했다.
촬영 내내 소소한 사고와 배우들의 부상이 끊임없이 뒤따랐던 것이다.
가령 예를 들면 오늘과 같은.
“컷!”
무전으로 황급히 촬영을 중단한 내가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여주인공 달리 역을 맡고 있는 비비 케이츠가 발목을 붙잡고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차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을 찍다가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발목을 삐끗한 것이었다.
“괜찮아요, 비비?”
“아, 감독님 죄송해요. 저 때문에 촬영이 중단되서......”
비비 케이츠가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인 배우인 그녀로서는,
자신의 부상보다는 영화 촬영이 중단되고, 이로 인해 수백 명의 스태프가 작업을 멈춰야 하는 상황이 더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지금 사람이 다쳤는데, 촬영이 문제에요?”
내가 의료진을 향해 물었다.
“상태가 어때요?”
“발목을 삔 것 같은데, 일단 병원으로 가서 정밀 검사를 한번 받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혹시 뼈나 인대가 손상됐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렇게 합시다.”
다행히 큰 부상은 아니었다.
병원에 같이 따라간 스태프의 전언에 의하면 며칠 쉬면서 통원 치료를 받으면 금방 회복될 거라고 했다.
그 때문에 예정된 촬영 계획이 다소 변경되긴 했지만, 큰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TV 드라마와는 달리 영화의 경우는 씬의 순서를 바꿔 촬영한 뒤, 편집으로 이어 붙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몇 건의 잔잔한 사고가 더 있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전체적인 촬영 일정에 지장을 받을 정도의 큰 사고는 아니었다.
그렇게 몇 개월의 시간이 흐르고...
영화 촬영은 어느덧 종반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74.
영화사 Film Kim.
조감독인 제임스 카메룬과 내가 촬영 일정표를 점검하고 있었다.
영화 촬영 초반에 발생한 경미한 사고와 배우들의 부상으로 일정이 다소 늦춰지는 했지만,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촬영은 당초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진행되고 있었다.
그 주된 이유는 바로,
‘일명 B팀이라 불리는 세컨 유닛, 다시 말해 내가 이끄는 메인 촬영팀 외에 별도의 촬영팀을 여러 개 운영했기 때문이지.’
그 가운데서도 레이첼이 이끄는 촬영팀의 역할이 가장 중요했다.
이미 앞선 의 촬영을 통해 나는 그녀의 연출력, 특히 배우의 감정선을 매우 잘 담아낸다는 장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고, 이에 관련된 많은 씬의 연출을 그녀에게 맡겼다.
내 예상대로 그녀는 세컨 유닛 감독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냈고, 그 결과 영화 촬영 기간을 예상보다 훨씬 단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보다 진행 속도가 매우 빠른데요, 감독님?”
“그러게요. 지미.”
“역시......”
제임스 카메룬이 나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할리우드에서 가장 영화를 빨리 찍어내는 제임스 킴 감독님답습니다.”
“뭘요. 그나저나, 지미.”
“예, 감독님.”
“내일은 촬영이 없는 날이니, 오늘 둘이 같이 맥주 한잔 가볍게 하는 것이 어때요?”
“맥주요?”
“예. 내가 지미에게 따로 할 말도 있고.”
“저야 대환영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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