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머리 감독의 할리우드 정복기-45화 (45/145)

# 45 < <체이스 오브 리벤지2: Ride or Die> (3) >

“그거 아세요, 감독님?”

비비 케이츠가 나를 향해 물었다.

“뭘요?”

“우리 외할아버지도 감독님과 같은 동양인이라는 거요. 할아버지 고향이 필리핀이라던데, 혹시 감독님 고향도 그쪽인가요?”

“아뇨, 저는 한국입니다.”

“한국?”

“네. 필리핀과는 조금 떨어진 곳이기는 하지만 같은 아시아권이기는 하죠.”

“아, 어쨌든 감독님이 동양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무척 반가웠어요. 꼭 우리 외할아버지 고향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요.”

“그래요?”

“네. 기회가 되면 저도 아시아에 꼭 한번 가 보고 싶어요. 왠지 굉장히 신기한 것이 많을 것 같아요.”

단지 머리 색깔만 ‘검은 머리’로 같을 뿐인데,

그녀에게서 왠지 모를 동질감이 느껴지는 것은 단순히 나만의 착각일까.

내가 다시 비비 케이츠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비비는 원래 운동을 했었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어렸을 때부터 발레를 했었어요. 부상 때문에 그만두긴 했지만.”

“아, 그래서 배우 일을 새로 시작한 거군요?”

“네. 게다가 우리 아버지도 영화배우시거든요. 비록 유명한 배우는 아니지만.”

“그럼 아버지가 비비의 연기 지도에 많은 도움을 주시겠군요?”

“아뇨. 오히려 아버지는 제가 배우 일 하는 걸 많이 반대하고 계세요. 그것 때문에 아버지랑 싸우기도 많이 싸웠고요. 그래서 이번 감독님 영화 오디션도 아버지 몰래 엄마랑 같이 보러 온 거고요.”

아버지가 큰 실수를 하고 있군.

전 세계 남성들의 마음을 훔쳐 갈 세기의 스타 탄생을 막으려 하고 있으니 말이야.

하긴.

나도 전생의 기억이 없었다면, 이제 스무 살도 안 된 이런 여자아이가 대스타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래서 그녀를 이번 영화의 여주인공 역할로 발탁하지 않았을 테지.

“아버지가 오랜 무명 생활로 고생을 많이 하셔서, 비비에게는 그런 힘든 일을 겪지 않게 하고 싶어서 그러시는 걸 거예요. 그러니 너무 섭섭해하지는 말아요.”

“저도 물론 알고 있어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네요.”

살짝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던 비비 케이츠,

그런 그녀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활짝 웃으며 말했다.

“어머, 제가 바쁘신 감독님 시간을 쓸데없이 너무 많이 뺏은 것 같네요.”

“아뇨, 괜찮아요. 감독과 출연 배우들 간의 유대는 실제 영화촬영에 있어서도 많은 도움이 되니깐요.”

“그럼 종종 감독님과 이야기 나눠도 돼요? 제가 영화는 처음이라 궁금한 점이 너무너무 많거든요.”

“물론이죠. 필요하면 언제든지 날 찾아와요.”

“감사합니다, 감독님. 그럼 전 이만 대본 리딩 준비하러 가 볼게요.”

“그래요.”

종종걸음으로 회의실로 향하는 비비 케이츠.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내가 속으로 생각했다.

‘생각하면 할수록 신기하군. 학창 시절 브로마이드(Bromide)에서나 볼 수 있던 여배우와 직접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말이야.’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도 영화를 좋아했던 나는 항상 내 방 벽에 유명 할리우드 스타들의 사진을 붙여두곤 했다.

그 가운데서도 꼭 빠지지 않는 배우 가운데 하나가 바로 비비 케이츠였다.

물론 그녀의 사진은 내 방뿐만 아니라, 내 또래의 대다수 남자 방에는 다 걸려 있었을 것이다.

당시 비비 케이츠의 인기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기 때문에.

“뭐가 그렇게 좋아서 실실 웃고 있는 거야?”

“아이, 깜짝이야.”

내가 뒤를 돌아보니,

친구 루브론이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서 있었다.

“내가 친구로서 충고하겠는데, 절대 안 된다, 킴. 비비 쟨 너무 어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미녀 여배우와 영화감독의 스캔들, 이곳 할리우드에서는 흔해 빠진 스토리잖아. 아무리 그래도 아직 스무 살도 안 된 핏덩이는 안 돼. 잘못하다 쇠고랑 차는 수가 있으니까.”

“어휴, 차라리 내가 말을 말자.”

“흐흐, 그나저나 킴 넌 도대체 어디서 이런 숨은 보석들을 찾아낸 거야?”

“보석이라니?”

“이번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 말이야. 잭 니콜라슨이야 워낙 연기력으로 정평이 나 있는 배우니까 그렇다 쳐도, 비비 쟤나 안소니 홉킨즈 같은 배우들은 정말 의외더라. 아까 대본 리딩하는데, 나 완전히 압도당했잖아. 그저 대본 리딩일 뿐인데, 어찌나 실감나게 하던지, 다들 내공이 장난이 아니라는 게 확실히 느껴지더군.”

그야 당연하지.

앞으로 할리우드를 주름잡을 대스타들만 골라서 섭외를 했으니까.

솔직히 여기서 ‘듣보잡’은 루브론 너밖에 없다고.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배우 보는 눈 하나는 있잖아.”

“하긴. 킴 네가 영화적 재능 하나는 타고난 사람이지. 그나저나 이번 영화 진짜 대박날 것 같아. 아까 대본 리딩할 때 딱 느낌이 오더라고.”

“당연히 그래야지. 할리우드 사상 최대의 제작비가 투입된 영화인데.”

“그럼 난 앞으로 <체이스 오브 리벤지> 시리즈에만 출연해야겠다. 괜히 다른 영화 출연했다가 이전 영화처럼 폭삭 망하면 내 필모(filmography)만 망가질 수 있으니까.”

“미안하지만, 루브론. <체이스 오브 리벤지>는 이번 편으로 끝이야. 더 이상의 시리즈는 만들지 않을 계획이라고.”

“뭐? 아니 왜?”

“Leave when you get applauded(박수 칠 때 떠나라).”

“뭔 소리야?”

“영화 제작자로서 내가 세운 원칙 가운데 하나야. 자신이 만들 수 있는 최고치의 작품이 나오면 더 이상 그 영화의 속편을 만들지 않겠다는.”

“그러니까 킴 지금 네 말은 이번 <체이스 오브 리벤지2>보다 더 나은 시리즈를 만들 자신이 없다는 거야?”

“그래. 그건 그만큼 내가 이번 작품에 모든 것을 쏟아부을 생각이란 뜻이고.”

“읔! 아쉽게 됐군. 난 최소 한두 편은 더 출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너무 실망하지는 마. 다른 작품에도 루브론 네가 어울릴 만한 배역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섭외할 테니까.”

“고마워, 킴. 역시 너밖에 없어.”

“뭘.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다 루브론 네 덕분이니까. 네가 날 <스페이스 워즈> 촬영장에 데려가지 않았다면 내가 이렇게 빨리 성공할 수 없었을 거야.”

루브론이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엇!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이제 그만 들어가자, 킴. 대본 리딩 계속해야 하잖아.”

“그래, 알았어.”

***

잠깐의 휴식이 끝나고 다시 시작된 대본 리딩.

조감독의 사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배우들이 연기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오직 대사로만 이어지는 대본 리딩이었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해당 장면이 머릿속으로 연상될 정도였다.

배우들의 대본 리딩을 지켜보며,

내가 아까와 마찬가지로 실제 현장 촬영을 통해 만들어질 영화 장면들을 떠올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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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생존자의 도시’라 불리는 트래비안(Travian).

기후변화와 에너지 고갈 위기 속에서 살아남은 인류가 모여 사는 몇 안 되는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 부아아아아앙!

- 두두두두두!

기괴한 형상의 자동차 수십 대가 도시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악당 ‘티도’ 일당들이었다.

전초기지 역할을 하는 ‘크로노스’라는 이름의 대형 트레일러,

그리고 이를 마치 호위선처럼 에워싸고 있는 각양각색의 자동차들.

이들의 목적은 생존자들의 도시를 습격해 필요한 물자를 빼앗는 것이었다.

단지 이동 수단이 말에서 자동차로 바뀌었을 뿐,

이들은 마치 수천 년 전의 유목 민족들이 농경 민족에게 그랬던 것처럼 무리 지어 이동하며 생존자들의 도시를 약탈하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Kill, Steal and Burn!(죽이고, 빼앗고, 불질러라!)”

선두에 선 티토의 무전이 각자의 차량에 탑승한 졸개들에게 전달되자,

악당들은 미친 듯이 환호성을 지르며 가속 페달을 밟아댔다.

“확실해?”

움직이는 악당들의 전초기지 ‘크로노스’에 올라타 있던 라돈이 랜포드를 향해 물었다.

“도시 트래비안의 지하 기지에 핵융합 원자로가 있다는 사실이.”

“물론이지.”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그 개발자 중의 한 사람이었거든, 클클클.”

일명 ‘괴짜 과학자’라 불리는 랜포드.

그는 노벨상까지 받은 천재 과학자였다.

그 때문에 한때 에너지 고갈로 멸망 위기에 처한 인류를 구할 새로운 에너지원인 ‘핵융합 원자로’ 개발에 참여하기도 했었다.

핵융합 원자로는 태양의 원리, 다시 말해 플라즈마 현상을 이용한 발전방식이었다.

그리고 이는 공멸(共滅)의 위기에 처한 인류를 구할 최후의 보루이기도 했다.

“만약 핵융합 원자로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우린 이 세계의 유일한 지배자가 될 수 있을 거야.”

그랬다.

지금 티토 일당이 도시 트래비스를 향하고 있는 목적은 무한한 에너지 원천이 될 핵융합 원자로를 손에 넣기 위함이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이들은 더욱 강력한 힘을 가진 조직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 부아아아아앙!

거센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또 한 무리의 자동차들이 티토 일당의 뒤를 쫓고 있었다.

그들의 정체는 주인공 이든이 속해 있는 경찰 특수 조직이었다.

못다 한 가족의 복수,

그리고 티토 일당에게 빼앗긴 인류의 마지막 희망인 핵융합 원자로를 되찾기 위해,

이든의 ‘Chase of revenge(복수의 추격전)’이 다시 한번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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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장장 세 시간에 걸친 대본 리딩이 모두 끝났다.

별다른 수정 사항 없이 무사히 끝난 대본 리딩.

이제 남은 것은 촬영 일정표의 작성과 본격적인 영화 촬영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크랭크 인 날짜는 다음 달 1일로 하겠습니다.”

나의 말에 모여 있던 간부급 스태프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예, 감독님.”

72.

<체이스 오브 리벤지2> 촬영을 며칠 앞두고,

나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Kim′s supermaket’을 찾았다.

늘 그렇듯, 영화 촬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한동안 아버지 얼굴을 보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도 가게를 지키고 있는 것은 아버지가 아닌 찬수 아저씨였다.

“아버지는요? 어디 가셨어요?”

나의 물음에 찬수 아저씨가 대답했다.

“말도 마. 나도 요즘 너네 아버지 얼굴 본 지 한참 됐으니까.”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요즘 너네 아버지 가게는 완전히 뒷전이고, 한인회 사무실에 거의 매일 출근 도장 찍다시피 한다.”

“아버지가요?”

“그래. 얼마 전에 한인회 회장직을 맡고 있던 에드워드, 아니 봉팔이 형님이 지병이 도져서 병원에 입원했거든. 그래서 네 아버지가 대신 한인회 일을 맡아보고 있잖냐.”

“그래요?”

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회장님은 괜찮으시대요?”

“위험한 고비는 넘겼는데, 당분간 외부활동은 좀 힘들 듯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당분간 한인회 일을 대신해야 할 듯하네.”

“이야, 아버지 출세하셨네요. 한인회 회장 대행도 다 하시고.”

“그래서 그런지 요즘 네 아버지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 거 같더라. 만날 늘어진 티만 입던 양반이 이제는 매일 정장만 입고 다녀. 넥타이는 또 어찌나 각 딱딱 잡아서 잘 매는지......”

찬수 아저씨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러다 너네 아버지 한인회 회장 선거에 나서겠다고 하는 거 아니냐?”

“설마요.”

“설마가 아니야. 너네 아버지 요즘 완전히 권력에 맛들렸나 봐. 엊그제는 상원 의원인지, 하원 의원인지 하는 사람을 만나서 저녁도 같이 먹는 것 같더라고.”

“그냥 두세요. 아버지가 알아서 어련히 잘하시겠죠.”

내가 다시 말했다.

“그나저나 찬수 아저씨가 고생이 많으시겠네요. 아버지 몫까지 다 하시려면.”

“그래도 너네 아버지가 알게 모르게 나 잘 챙겨준다. 바지사장도 사장이랍시고, 월급은 물론 보너스까지 두둑하게 주면서.”

“그래요?”

“그래. 안 그랬으면 내 벌써 도망가고도 남았지, 흐흐흐.”

이러다 조만간,

‘Kim′s supermaket’이 ‘Park′s supermaket’으로 바뀌게 될지도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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