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 <체이스 오브 리벤지2: Ride or Die> (2) >
70.
할리우드 영화 제작 시스템의 가장 큰 특징은 ‘철저한 분업화와 전문화’였다.
따라서 각본 회의를 통해 제작된 스토리보드가 각 팀에 배포되면, 이후로는 제작자인 내가 할 일이 상당히 줄어든다.
현장 경험이 많은 각 팀의 감독들이 자체 회의를 통해 나머지 디테일을 채우기 때문이었다.
내가 할 일은 그저 각 팀별로 확정 회의를 거쳐 올라온 최종 문서를 확인하고, 수정 사항이 있으면 이를 지시하는 것뿐이었다.
물론 걔 중에는 나름 영화판 물 좀 먹었다고, 전체적인 영화의 흐름이나 감독의 의도를 벗어나 자기 스타일대로 기획하는 감독도 있다.
또한 손이 많이 가는 작업보다 비교적 손이 덜 가는 쪽으로 작업 방향을 선정하는 감독도 있다.
초보 감독의 경우에는 몰라서, 혹은 알아도 확신이 서지 않아서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괜한 언쟁을 벌였다 자신이 제시한 의견이 틀리기라도 하면 감독으로서의 체면을 구기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다르지. 전생에서 나는 무려 30년 넘게 영화판에서 일하면서 웬만한 부서에서 하는 일은 모조리 꿰뚫고 있거든. 초창기 독립 영화를 만들 때는 혼자서 연출, 촬영, 조명, 미술 일을 도맡아 한 적도 있으니까 말이야.’
따라서 나는 최종 문서의 사소한 부분까지도 모두 짚어낼 수 있었다.
가령 예를 들면 오늘 같은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찾으셨습니까, 감독님?”
마이크 첸(Mike Chen)이 내 사무실로 들어왔다.
중국계 미국인인 그는 이번 영화에서 조명감독 일을 맡아보고 있었다.
물론 엄밀하게 말하면 조명감독이라기보다는 라이팅 테크니션(Lighting Technician)이란 말이 맞을 것이다.
충무로와는 달리 할리우드에서는 촬영감독이 조명팀을 같이 통솔하기 때문이다.
“예. 제가 마이크와 상의할 일이 있어서요.”
“어떤 것입니까?”
“여기 17씬 조명 관련 부분 말이죠......”
내가 손으로 스토리보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장소가 악당들의 본거지인 만큼 ‘로우 키’보다는 ‘하이 콘트라스트’ 스타일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요?”
“하이 콘트라스트요?”
“예. 극적인 명암 대비를 통해 영상을 보다 단순명료화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글쎄요, 이 부분은 이미 로저 감독님과 합의가 된 부분인데요?”
“물론 ‘로우 키’도 이 장면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방법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이 씬을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것은 이들이 얼마나 악한 무리인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이 정부 조직만큼이나 체계화된 조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지요. 그러니 그들의 조직력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라도 ‘하이콘트라스트’를 쓰는 것이 더 적합할 듯합니다. 오히려 이든이 속해 있는 특수 경찰 조직의 모습을 담은 10씬에 로우 키 조명을 쓰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네요.”
“흐음.”
마이크 첸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 말이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영화 촬영에 있어서 조명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굳이 대사나 자막을 통하지 않고도,
사용하는 조명만으로도 얼마든지 상황이나 분위기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어둡고 음침한 느낌을 주는 조명 기법인 ‘로우 키’가 아닌 명암의 대비가 보다 선명하게 나타나는 ‘하이 콘트라스트’ 기법을 사용하려는 것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시대적 배경에 걸맞게 악당들의 조직력이 공권력보다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다년간 조명 일을 해온 마이크 첸이나 촬영감독인 로저 디킨슨 또한 나의 이런 의도를 충분히 눈치챌 수 있을 것이고.
“일단 로저 감독님과 상의를 한번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뒤에 필요하다면 계획을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예, 그리고 27씬 같은 경우는......”
내가 남은 몇 가지 사항들을 더 지적했다.
마이크 첸은 이를 확인하고 수정 사항을 기록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분야를 넘나드는 해박한 영화적 지식.
이는 많은 스태프를 통솔해야 하는 영화감독에게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오히려 감독이 스태프에게 휘둘리기 마련이다.
물론 감독 겸 제작자인 나의 경우는 일반적인 고용 감독에 비해 훨씬 더 영향력이 크긴 하지만.
***
마이크 첸이 사무실을 나가고,
뒤이어 조감독인 제임스 카메룬이 들어왔다.
“감독님.”
“네, 지미.”
“시나리오 리딩 준비가 다 됐습니다. 다들 회의실에서 감독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나리오 리딩.
출연 배우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각본을 읽는 자리로 사실상 프리 프로덕션의 가장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리딩을 통해 시나리오가 최종적으로 확정되면, 곧바로 영화 크랭크 인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요? 그럼 지금 바로 회의실로 이동하죠.”
내가 회의실로 들어서자,
영화 <체이스 오브 리벤지2>의 출연 배우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주인공 ‘이든’역의 베니 스콧.
악당 ‘티토’역의 루브론.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이 두 배우보다 더 주목해야 할 사람이 있지.’
그것은 바로,
주인공 이든을 짝사랑하는 여주인공 ‘달리’역을 맡은 여배우 비비 케이츠.
악당 티토의 배다른 형인 ‘라돈’역을 맡은 잭 니콜라슨.
악당 티토의 수하이자, 괴짜 천재 과학자 ‘랜포드’역을 맡은 안소니 홉킨즈가 바로 그들이었다.
‘비비 게이츠, 그녀는 브룩 실즈, 소피 마르소와 더불어 80년대 중반 전 세계 남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3대 여신(女神)으로 불리게 될 여배우이지. 또한 잭 니콜라슨과 안소니 홉킨즈는 머잖아 할리우드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악역 연기의 대가가 될 사람이고.’
앞으로 할리우드를 대표할 명배우들이 총집합된 영화 <체이스 오블 리벤지2>
물론 아직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마 나중에 다시 이 영화가 재조명될 날이 있을 거야. 그때는 사람들도 알게 되겠지. 이 영화가 할리우드 스타 군단이 총집결된, 그야말로 엄청난 캐스팅을 자랑하는 선견지명(先見之明)의 영화였다는 것을 말이야, 흐흐.’
내가 테이블의 가장 상석에 위치하자, 곧바로 시나리오 리딩이 시작되었다.
배우들의 리딩을 지켜보며, 나는 영화의 주요 장면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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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를 나서는 자신을 습격한 악당 티토의 졸개들로부터 벗어나 경찰 특수 조직 본부에 도착한 주인공 이든.
그런데.
“이게 답니까?”
이든의 물음에 유일한 여성 조직원 ‘달리’가 대답했다.
“뭐가요?”
“그래도 명색이 경찰 특수 조직 본부인데, 너무 초라한 것 같아서요. 인원이나 장비도 마찬가지고.”
“도시가 티토 일당의 손에 넘어갔으니까요. 엄밀하게 말하면 우린 이제 경찰이라기보다는 반란군에 가깝죠.”
“시작부터 꽤 유쾌한 소식을 들려주는군요.”
이든이 창고처럼 허름한 경찰 본부 한 켠에 늘어선 자동차를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나저나 이것들, 움직일 수나 있는 겁니까?”
“물론이죠.”
“근데 왜 박물관에 처박힌 골동품 같은 느낌이 나는 거죠?”
“움직인 지 한참 됐으니까요. 연료가 떨어져 버렸거든요.”
석유와 같은 에너지 자원이 고갈된 근미래.
이는 영화의 설정이었다.
“그럼 있으나 마나 한 것 아닙니까?”
“방법이 영 없는 건 아니죠.”
“무슨 방법이요?”
“수소죠. 석유 대신 수소를 이용하면 다시 차를 움직일 수 있어요. 그나마 아직 물은 인간이 쓸 만큼 충분히 남아 있으니까.”
“이 차량을 물에서 추출한 수소를 동력으로 하는 자동차로 개조한다는 뜻입니까?”
“네.”
“누가요?”
“제가요.”
“......”
달리가 입고 있던 전투복을 훌렁 벗어 던졌다.
속옷만 걸친 그녀의 매끈한 몸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당황하며 고개까지 돌리는 이든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그녀가 말했다.
“후, 괜한 오해하지 마요. 한 벌뿐인 전투복을 버리고 싶지 않아서니까.”
기름이 잔뜩 묻은 작업복을 몸에 걸친 그녀가 장비들을 챙겨 들며 다시 말했다.
“사실 전 전투 요원이 아니라 엔지니어로 처음 이 팀에 합류했거든요. 요즘 손이 많이 딸려서 오늘처럼 전투에 나가는 일이 제법 있기는 하지만.”
“......그쪽이 직접 차량 개조를 하는 겁니까?”
“네. 내가 이래 봬도 도시에서 꽤 알아주는 천재 자동차 공학자였답니다. 악당 티토가 도시를 점령한 후 저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해 올 정도로요.”
“......왜 안 갔습니까? 그랬으면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대우를 받았을 텐데.”
“전 악당보다 영웅 쪽이 체질이 맞거든요. 왠지 그쪽이 훨씬 더 근사해 보이기도 하고. 호호호.”
때마침 한 남자가 이든의 곁으로 다가왔다.
팀의 리더인 ‘베거슨’이었다.
“인사가 늦었소. 베거슨이요.”
“이든입니다.”
“그쪽 활약상은 아주 잘 들었습니다. 5년 전 혈혈단신으로 악당 티토 무리를 일망타진했었더랬죠?”
“무능력한 거죠. 아직 악당 티토가 멀쩡히 살아있으니까.”
“뭐, 살아 있기는 한데, 멀쩡하다는 표현은 좀 어울리지 않는군요.”
“무슨 뜻입니까?”
“정신만 살아있지, 몸은 전혀 움직일 수가 없는 상태거든요. 그 왜, 사이코 괴짜 과학자 누구지?”
베거슨의 물음에 달리가 대답했다.
“랜포드요.”
“아, 맞다. 랜포드. 그자가 티토를 살려내긴 했는데, 완전히 괴물로 만들어 살려냈죠.”
“괴......물?”
“예. 몸뚱이가 완전히 차에 달라붙어 있으니, 괴물이 맞죠. 몸이 아니라 뇌로 차를 움직이거든요. 문제는 그게 꽤 위력적이라는 것이기는 하지만.”
“불구가 되어, 뇌파로 차를 조종한다는 뜻입니까?”
“예. 그 때문에 티도 대신 그의 이복형인 라돈이 현재 악당 조직 전체를 이끌고 있습니다.”
달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차라리 티토가 두목일 때가 더 나았죠. 라돈 그놈은 진짜 악마 같은 놈이라.”
“차량은 언제부터 움직일 수 있는 겁니까?”
손에 든 정체불명의 도구를 빙빙 돌리며 달리가 대답했다.
“곧.”
“곧?”
“네. 기대해도 좋아요. 이제부터 제대로 된 전투가 시작될 테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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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님?”
조감독 제임스 카메룬의 목소리에 내가 정신을 차렸다.
“아, 예.”
“잠시 쉬었다가 계속 진행하는 것이 어떨까 싶어서요.”
“그렇게 해요.”
“자, 그럼......”
제임스 카메룬이 배우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30분 정도 쉬었다가, 다시 리딩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바깥에 간식거리 준비해뒀으니, 챙겨 드시고요.”
71.
시나리오 리딩 중간의 휴식 시간.
출연 배우 중의 하나인 ‘비비 케이츠’가 나를 향해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이번 영화에서 주인공 이든을 짝사랑하게 되는 여주인공 달리 역을 맡고 있었다.
“감독님.”
“아, 비비. 무슨 일이에요?”
“이번 영화에 저를 캐스팅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전부터 인사 드리고 싶었는데, 감독님이 워낙 바쁘신 분이라......”
“뭘요. 감사는 오히려 제가 해야죠. 내가 그리고 있던 여주인공의 이미지에 딱 맞는 배우를 찾게 됐으니까요.”
“정말요?”
비비 케이츠가 눈빛을 반짝였다.
양부모는 모두 미국인이지만, 외가가 필리핀계 화교인 탓에 그녀의 외모에는 동양적인 느낌이 제법 묻어났다.
물론 이점이 오히려 그녀의 매력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 주고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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