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머리 감독의 할리우드 정복기-40화 (40/145)

# 40 < 전편보다 나은 속편은 없다? (5) >

62.

영화사 Film Kim.

오래간만에 사무실을 찾아온 조지 루이스가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킴. 오늘따라 얼굴이 왜 이리 죽상이야?”

“제가요?”

“그래.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아뇨. 그냥 새 영화 제작 때문에 이것저것 신경 쓸 일이 많아서요.”

“<체이스 오브 리벤지> 속편 말이야?”

“예. 다른 준비는 다 됐는데, 영화에 투자할 투자사를 아직 찾지 못했거든요.”

“아 참, 이번 영화 제작비 규모가 꽤 크다며?”

“순수 제작비만 총 오천만 달러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요. 이 가운데 삼천만 달러는 우리 회사와 유니온 픽처스에서 반반씩 부담하기로 했고, 이제 나머지 이천만 달러만 더 확보하면 곧바로 제작에 들어갈 수 있거든요. 그래서......”

내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리우드의 웬만한 영화사에는 모두 투자 의향서를 보내봤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네요.”

“영화는 투자가 반이야. 아무리 좋은 시나리오와 기획안을 가지고 있어도, 투자자를 찾지 못하면 말짱 꽝이지. 아무리 그래도 <체이스 오브 리벤지> 정도면 전편의 흥행 성적도 있고 해서 한번 투자해볼 만할 텐데......”

“설마 또 그놈의 피부색 때문일까요?”

“꼭 그렇지만도 않아. 최근 킴의 영화가 연달아 흥행에 성공한 덕분에 이곳 할리우드에서도 유색 인종을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달라졌으니까. 킴 정도의 커리어면 그깟 인종 따위는 이제 더 이상 큰 걸림돌이 되지 않을 거란 말이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할리우드가 제 아무리 백인 일색이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피부색 때문에 능력 있는 사람을 내칠 정도로 비합리적인 곳은 아니었으니까.

돈이 된다고 판단되면 뭐든 데려다 쓰는 곳이 바로 이곳 할리우드니까.

“내 생각에는 아마도 요즘 할리우드 영화사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대규모의 투자를 꺼리는 추세라서 그럴 거야.”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킴도 알다시피 요즘 경기가 말이 아니잖아? 언론에서조차 연일 경제 위기가 어쩌니 떠들어 대고 있으니 말이야.”

1980년대 들어,

미국의 경제 위기는 점점 심화되고 있었다.

중동발 오일쇼크의 영향으로 미국 경기는 연일 바닥을 찍고 있었고, 실업률 또한 대공황 이후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러한 경제 상황은 할리우드 영화계에도 영향을 끼쳐 대다수 영화사가 대규모의 예산이 들어가는 영화의 제작을 꺼리게 된 것이다.

최근 조지 루이스의 <스페이스 워즈>를 제외하고 이렇다 할 대작 영화가 나오지 않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래도 영화 산업은 가장 경기를 타지 않는 산업 가운데 하나잖아요?”

“그렇기는 하지. 영화 관람만큼 저렴하게 여가 생활을 즐길 수 있는 것도 또 없으니까. 그래도 다들 조심하는 분위기라 킴의 <체이스 오브 리벤지>가 성공 가능성이 큰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선뜻 투자에 나서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어. 특히 이번 킴의 영화는 할리우드 영화사상 최대의 제작비가 들어가는 영화잖아.”

“그렇죠.”

“마음 같아서는 내가 킴의 영화에 투자하고 싶다만, 알다시피 나도 지금 자금 사정이 여의치가 않아서. 회사, 특히 영화 제작사의 경우는 더욱 끊임없이 자금을 필요로 하는 곳이니까 말이야.”

“뭐, 어떻게든 찾아지겠죠.”

“그래. 그러니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는 말아.”

조지 루이스가 다시 말했다.

“그나저나 요즘 킴 여자 생겼어?”

“여자요?”

“그래. 어제 아멜리아가 극장에서 킴이 여자랑 같이 나오는 걸 봤다던데?”

“아, 그거요?”

내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유니온 픽처스 레이첼 도나 사장이에요. 영화 투자 문제도 상의할 겸, 같이 저녁 식사하고 영화 한 편 본 것뿐이에요.”

“시끄러운 극장에서 잘도 투자 상의가 되겠다.”

“예?”

“아니야, 아니야. 그냥 혼잣말이야.”

“조지도 참. 근데 아멜리아는 극장에 왜 갔대요? 조지랑 같이 영화 보러 간 거예요?”

“내가 지금 한가하게 영화나 보러 다닐 처지인가. 그 왜, 어제 킴이 본 영화 <복제인간>이 아멜리아가 편집을 맡은 영화잖아. 그래서 관객들 반응도 살필 겸, 제작진들이랑 같이 극장에 갔다더군. 거기서 우연히 킴을 본 거고.”

“그나저나 그 영화 내용이 꽤나 난해하던데. 그 때문에 개봉한 지 한참이나 됐는데도 흥행 성적은 그리 좋지 못하다고 하던데요?”

“말도 마. 그 영화 제작비가 2천만 달러 넘게 들어갔다고 하는데, 수익은커녕 본전도 제대로 못 건지게 생겼으니 말이야. 그 때문에 요즘 연출을 맡은 알프레드 스톤 감독이 엄청나게 실의에 빠져 있다고 하더군. 아 참, 킴도 알지? 알프레드 스톤 감독.”

“네, 전에 시사회장에서 몇 번 봤었어요.”

“아마 투자사들이 킴의 영화 투자에 선뜻 나서지 않는 것도 그 영화가 크게 실패하는 모습을 본 탓도 있을 거야. 알프레드 스톤 감독의 전작인 <에일리언의 침공>도 엄청난 흥행 성적을 거뒀었잖아? 그래서 투자사에서도 이번에 그가 연출한 영화에 큰 기대를 걸었는데, 보기 좋게 흥행에 실패하고 말았으니까.”

“그동안 제 영화가 흥행에 계속 성공한 점이 오히려 큰 위험 요소가 될 수 있다는 뜻이에요?”

“그래.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진 감독도 자신이 만든 모든 영화를 다 흥행시킬 수는 없는 법이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대다수 영화감독은 흥행에 실패한 영화가 한두 개쯤은 꼭 있기 마련이니까.

영화의 신(神)이 아니고서야 제작한 모든 영화를 흥행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나저나 아멜리아가 상심이 크겠네요. 애써 참여한 영화가 흥행에 실패했으니.”

“아멜리아야 스태프의 일원을 참여한 거니 뭐 크게 손해 볼 거 있나. 타격을 입는 건 연출을 맡은 감독과 돈을 댄 투자자들이지. 그래서 요즘 아멜리아가 알프레드 스톤 감독을 달래느라 애를 많이 먹고 있나 봐. 알프레드 그 양반, 요즘 속상한 나머지 연일 술만 마셔댄다는데?”

“그 정도 대규모의 영화가 실패했는데, 멀쩡한 게 더 이상하죠.”

“그런가?”

조지 루이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나를 향해 다시 말했다.

“아 참, 킴.”

“네.”

“이번 영화 말이야, 투자처를 좀 다양화해보는 것은 어때?”

“그게 무슨 말이에요?”

“굳이 전문 영화 투자사가 아니더라도 다른 곳의 투자를 받아 영화를 제작할 방법이 없는지 찾아보라는 뜻이야. 최근 영화 제작이 돈이 된다는 소문을 듣고 외부 자금들이 많이 할리우드로 흘러들어오고 있잖아? 그 왜, 얼마 전에는 월가의 금융 투자 회사 한곳이 20세기 폭스사와 공동으로 투자해 영화를 만들기도 했었다던데?”

“!!!”

조지 루이스의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을 번뜩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전생에서 중소규모 영화사들이 영화 제작비를 확보하는 방식이었다.

지금 시기에 이 방법이 통할지는 의문이긴 했지만.

“아, 맞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왜? 갑자기 좋은 투자처라도 떠오른 거야?”

“예, 조지.”

“어딘데?”

“그건 나중에 제가 다시 이야기해드릴게요. 고마워요, 조지. 덕분에 이번 영화의 제작비를 확보할 좋은 방법이 생각났으니까요.”

내가 조지 루이스를 와락 껴안고는 곧바로 사무실을 나갔다.

영문을 모르는 조지 루이스는 그저 눈만 껌벅거리고 있을 뿐이었고.

63.

LA 한인 타운의 ‘Kim′s supermaket’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찬수 아저씨가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도훈이 왔냐?”

“예, 아저씨. 근데 아버지는요?”

“지금 옷 갈아입고 있다. 오래간만에 하는 넥타이라서 그런지 매는 법을 잘 모르겠다고 아까부터 징징대고 있어. 도훈이 네가 가서 좀 도와줘라.”

“예, 아저씨.”

내가 가게 안쪽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넥타이를 매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 도훈이 왔구나.”

“예, 아버지.”

“잘 됐다. 너 이리 와서 아버지 넥타이 매는 거 좀 도와주라. 이게 새끼줄도 아닌데 왜 이렇게 자꾸 꼬이기만 하는지......”

“어디 봐요, 아버지.”

내가 익숙한 손놀림으로 아버지의 넥타이를 바로 잡아 주었다.

그제서야 아버지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도훈이 넌 맨날 청바지에 티만 입고 다니면서 넥타이를 왜 이렇게 잘 매는 거야? 누가 보면 영화감독이 아니라 샐러리맨인 줄 알겠네.”

“그보다 아버지. 요 앞의 한인 회관 가는데 굳이 이렇게 정장까지 갖춰 입어야 해요?”

“인마, 내가 그래도 명색이 LA 한인회 이사 아니냐? 그런데 후줄근한 작업복 차림으로 가면 되겠어? 사람은 자고로 사회적 위치에 걸맞은 몸가짐을 가져야 하는 법이야.”

“아, 예, 예. 어련하시겠어요.”

“자식이 어째 아버지 말을 귓등으로 듣는 것 같네.”

아버지가 다시 물었다.

“그보다 도훈이 너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갑자기 한인회 회장님을 만나겠다는 거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영화 제작 일로 바빠서 나중에 한가해지면 만나겠다고 했잖아?”

“갑자기 회장님께 볼일이 있어서요.”

“뭐? 도훈이 네가 회장님께?”

“네. 자세한 이야기는 가서 드릴 테니까 준비 다 하셨으면 얼른 가요.”

“그래, 다 됐으니 가자.”

***

1960년대 이민법 개정으로 많은 한국인이 미국으로 건너왔다.

소위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온 이들의 숫자는 대략 3만여 명.

이 가운데 상당수는 LA에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며 살았는데, 이것이 지금의 한인 타운의 시작이었다.

LA 한인회는 바로 이곳 한인타운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대표하는 단체였다.

그렇다고 아주 거창한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었고, 그저 한인들의 친목 도모와 상호 부조를 위한 단체였다.

하지만.

이역만리 타향에서 낯선 외국인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재미교포들에게는 그나마 유일하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단체이기도 했다.

“아이고, 이게 누구신가? 얼른 들어 오시게.”

한인회 사무실로 들어서자,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남자가 아버지와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현 LA 한인회 회장인 에드워드 최(Edward Choi)였다.

“오늘 아침에 갑자기 까치가 울더라니, 이렇게 반가운 손님이 오려고 그랬나 보네.”

“봉팔이 형님. 그간 별일 없으셨습니까?”

최봉팔.

한인회 회장인 에드워드 최의 한국 이름이었다.

“어허, 이 사람이. ‘에드워드’나 ‘초이’라고 부르라니까 자꾸 그렇게 부르네.”

“형님도 참. 한국 사람들끼리 있을 때는 한국 이름으로 불러야지요. 민족혼 몰라요, 민족혼?”

“민족혼은 개뿔.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라야지.”

에드워드 최, 아니 최봉팔 회장이 나를 향해 말했다.

“어이구, 귀한 손님이 이런 누추한 곳을 직접 다 와 주시고......”

“아닙니다, 회장님.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그래도 되겠나?”

“예.”

“우리 김 감독이 워낙에 유명한 사람이어야 말이지. 김 감독은 이곳 미국 땅에 사는 우리 한인의 명예를 드높인 그야말로 영웅이 아니신가, 하하하.”

“과, 과찬이십니다.”

때마침 사무실 직원이 우리 세 사람에게 차를 가져다주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사이에 두고 다시 대화가 이어졌다.

“아버지께 들었습니다. 회장님께서 여러 번 저를 만나고 싶어 하셨다고요.”

“아, 뭐 특별한 용건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야. 김 감독이 우리 한인 사회의 명예를 드높인 만큼 한인회 이름으로 감사패나 하나 만들어주고 싶어서.”

최봉팔 회장이 상자 하나를 내 앞에 내밀었다.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감사패’였다.

하지만.

‘감사패는 그저 명분일 뿐이고, 실제 목적은 다른 데 있을 테지. 아마도 내가 영화로 제법 많은 돈을 벌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인 사회 발전 기금과 같은 자금 지원을 받으려는 생각이겠지.’

그런데.

동상이몽(同床異夢)은 비단 최봉팔 회장만의 것은 아니었다.

나 또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이곳 LA 한인 회관을 찾아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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