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머리 감독의 할리우드 정복기-39화 (39/145)

# 39 < 전편보다 나은 속편은 없다? (4) >

레이첼의 물음에 내가 대답했다.

“앞선 <레이더스> 제작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영화 <체이스 오브 리벤지> 2편도 유니온 픽처스에서 제작비 지원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 문제라면 걱정하지 말아요. 킴이 만드는 영화, 특히 <체이스 오브 리벤지> 같은 영화라면 은행 빚을 내서라도 투자를 할 의향이 있으니까요, 호호.”

레이첼이 눈빛을 반짝였다.

그도 그럴 것이,

<체이스 오브 리벤지>는 불과 30만 달러의 제작비로 1억 달러라는 엄청난 수익을 올린 초(超)흥행작이다.

그 덕분에 영화의 배급을 맡은 유니온 픽처스 또한 꽤 짭짤한 수익을 올렸다.

그래서 다음 속편 제작에는 배급뿐만이 아니라 투자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할 계획을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제작비가 제법 많이 들어간다는 것인데......”

“얼마나요?”

“오천만 달러입니다. 그것도 순수 제작비만요.”

“......”

레이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이번 영화의 제작비가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내가 살던 시대에서는 오천만 달러의 영화 제작비는 그리 놀랄 만한 액수는 아니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급 영화들은 그보다 몇 배나 더 많은 제작비가 사용되곤 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4> 같은 경우는 총제작비가 무려 4억 달러로, ‘역대 가장 많은 제작비를 사용한 영화 1위’를 기록하기도 했었다.

‘그에 비하면 오천만 달러의 영화 제작비는 어디 가서 명함조차 못 내밀 정도의 적은 돈이지. 실제 비슷한 예산이 들어간 영화 <설국열차>의 경우 출연 배우가 한 언론 인터뷰에서 영화에 관해 묻자, ‘아! 그 저예산 영화 말이군요?’라고 되물을 정도였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1980년대는 이제 겨우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급 영화가 태동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화폐 가치의 차이까지 감안하면, 5천만 달러는 웬만한 메이저 영화 제작사도 엄두를 내지 못할 엄청난 액수의 제작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니 레이첼이 저런 표정을 지을 수밖에는.

“놀랍네요. 생각보다 제작비의 규모가 너무 커서.”

“영화에 등장하는 소품, 특히 대규모의 추격씬에 필요한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모두 직접 제작해야 하니까요. 여기에 그동안 높아진 기존 출연 배우들의 개런티, 그리고 대규모의 스태프 참여 또한 불가피하거든요.”

“후아.”

냉수 한잔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레이첼.

그런 그녀를 향해 내가 웃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레이첼. 앞선 영화가 그랬듯이 이번 영화도 꼭 흥행에 성공할 테니까요. 그리고 유니온 픽처스에서 5천만 달러의 제작비를 모두 부담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위험 부담이 큰 영화인 만큼 투자를 분산시킬 생각입니다. 레이첼의 유니온 픽처스와 더불어 우리 Film Kim, 그리고 할리우드의 메이저 영화사들도 이번 영화의 투자에 참여시키려고요. 물론 그들이 투자에 응할지는 아직 미지수이기는 하지만.”

“좋은 생각이네요. 메이저 영화사들의 참여는 추후 상영관 확보에 있어서도 유리한 측면이 있을 테니까.”

“그렇죠.”

레이첼이 한숨을 돌리며 말했다.

“휴, 킴의 커리어만 놓고 보면 저도 이번 영화의 제작에 올인하고 싶지만, 사실 영화산업이라는 것이 그렇잖아요. 그 누구도 감히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위험 부담이 큰 산업, 그게 우리가 하고 있는 영화산업이죠.”

“맞습니다. 그래서 제작 규모가 큰 영화일수록 더더욱 리스크를 분산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고요.”

“일단 저희 쪽에는 적게는 천 오백만 달러에서, 많게는 이천만 달러까지는 부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도 그 정도 선에서 제작비를 부담할 생각입니다. 나머지 금액은 외부 투자자를 유치해서 마련하면 될 것이고요.”

“그나저나 이 정도 규모의 영화면 촬영 기간만 해도 상당히 많이 소요되겠군요.”

“그렇지도 않을 것입니다. 소품과 차량 제작에 들어가는 시간이 제법 걸려서 그렇지 실제 촬영 기간은 그렇게 길지 않을 것입니다. 늘 그래왔듯이 철저한 프리 프로덕션 과정을 거쳐서 실제 촬영에 들어갈 것이니까요. 그래서 이번 영화도 넉넉잡고 1년이면 충분히 마무리를 지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년이요?”

“예.”

“말도 안 돼. 아무리 킴이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가장 빨리 찍는 것으로 소문난 감독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 스케일의 영화를 불과 1년 만에 완성하겠다니, 솔직히 믿기지 않는군요.”

“그래서......”

내가 다시 말했다.

“제작비 말고도 제가 레이첼에게 부탁드릴 일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뭐죠?”

“이번 영화의 제작에 레이첼도 함께 참여해주셨으면 합니다. 투자자가 아닌 연출자로서요.”

“네? 이번 영화는 킴이 직접 메가폰을 잡을 계획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맞습니다. 영화의 메인 연출은 제가 맡고 대신 레이첼은 세컨 유닛 감독 일을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레이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할리우드에서는 세컨 유닛 감독(Second Unit Director)의 개념이 명확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이다.

일명 B팀이라 불리는 세컨 유닛 감독은 메인 감독이 지휘하는 촬영팀과는 별개의 독립된 촬영팀을 이끈다.

초기에는 영화에 사용되는 자료 화면이나 배우가 등장하지 않는 부수적인 씬을 주로 촬영했지만, 영화의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세컨 유닛 감독의 역할도 점점 커져갔다.

액션 씬과 같은 전문성이 요구되는 장면, 촬영 일정상 감독이 직접 가기 힘든 로케이션 촬영 등을 세컨 유닛 감독이 전담하게 된 것이다.

특히 규모가 큰 영화일수록 촬영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서라도 세컨 유닛의 운용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킴의 말은 스케일이 큰 영화의 핵심 장면들은 킴이 직접 촬영을 하고, 나머지 부수적인 장면은 유닛(unit) 형태의 별도의 촬영팀을 구성해서 이번 영화의 촬영을 진행할 예정이라는 뜻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면 메인 촬영팀 하나만 운용할 때보다 촬영 기간이 훨씬 더 단축될 수 있으니까요.”

“그럼 세컨 유닛 감독은 최대한 메인 감독의 스타일과 비슷하게 화면을 연출해야겠네요?”

“예. 어차피 실제 영화 촬영 전에 상세한 스토리보드가 만들어지고, 모든 촬영이 이 스토리보드에 기반해서 이루어질 것이니 메인 감독과 세컨 감독이 연출한 화면의 이질감은 그렇게 크지는 않을 것입니다.”

“흐음.”

레이첼이 살짝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저에게는 무척 좋은 기회가 될 것 같군요. 할리우드 최고의 흥행 감독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킴의 영화에 제가 연출한 장면이 상당 부분 들어가게 될 테니까 말이에요.”

“지난 영화 을 통해 레이첼의 연출 능력이 어느 정도 검증되었기 때문에 제가 믿고 레이첼에게 세컨 유닛 감독을 맡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 편하게 촬영에 임하시면 됩니다.”

“무척 영광이네요, 호호.”

“자, 그럼 이제 식사 하죠. 이러다 영화 시간 늦겠어요.”

“그래요, 킴.”

***

저녁 식사를 끝낸 레이첼과 내가 다음으로 들른 곳은 인근의 한 극장이었다.

식사와 더불어 영화 한 편을 같이 관람하는 것이 레이첼이 내건 또 다른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어땠어요, 킴?”

영화 관람을 끝내고 극장을 나서며 레이첼이 나를 향해 물었다.

“영화 말이에요?”

“네.”

“글쎄요, 내용이 좀 난해하다고 해야 하나?”

“맞죠? 킴도 그렇게 느꼈죠?”

“예. 영화의 전체적인 설정이나 주제는 굉장히 참신하고 좋았는데, 뭔가 시대를 좀 앞선 영화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대중적으로는 크게 환영을 받지 못할 것 같군요.”

“저도 그렇게 느꼈어요. <에일리언의 침공>이라는 대작 영화를 만든 알프레드 스톤 감독이 이번에는 왜 이런 난해한 작품을 연출했는지......”

레이첼과 내가 본 영화는 할리우드의 유명 감독 가운데 하나인 알프레드 스톤 감독이 연출한 <복제인간>이라는 영화였다.

동명의 SF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인간보다도 더 인간적인 복제인간의 존재를 통해 인간성의 정의를 묻는 철학적인 주제의 영화였다.

그러다 보니 대중적인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비평가들로부터는 높은 평가를 받았고 몇십 년 뒤 다시 리메이크되어 큰 인기를 끌게 된다.

“아무리 유능한 감독이라도 모든 영화를 다 성공시킬 수는 없는 법이잖아요. 특히 영화의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요. 이번 알프레드 스톤 감독의 영화도 작품성에 너무 치중하다 보니, 대중성이 다소 떨어지는 작품이 나온 것 같고요.”

“킴은 어때요?”

“뭐가요?”

“한 번쯤은 작품성 있는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 안 들어요? 모두가 깜짝 놀랄만한.”

“글쎄요......”

내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지금 당장은 그럴 마음이 없군요. 다음 생에 다시 영화감독으로 태어나면 그때는 한번 생각해보죠, 뭐.”

61.

유니온 픽처스와의 정식 투자 계약이 체결되었다.

투자 금액은 총 천오백만 달러.

단일 영화에 이 정도로 막대한 금액을 투자한 것은 그동안 영화감독으로서 내가 보여준 흥행 성적 덕분이었다.

남은 삼천오백만 달러 가운데 천오백만 달러는 우리 Film Kim이 부담하기로 했다.

앞선 <체이스 오브 리벤지> 1편과 <레이더스>, 의 연이은 성공으로 지금 진행하고 있는 여러 사업 비용을 제하고도 이 정도 여유 자금은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이천만 달러는 다른 영화사에서 투자를 받기로 했다.

대규모 영화 제작에 따르는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추후 개봉관 확보에도 유리한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혹시 투자사에서 연락 온 거 없어요?”

나의 물음에 회사 직원인 이레나가 대답했다.

“네, 사장님. 아직 없네요.”

“흠. 그렇군요.”

얼마 전,

나는 <체이스 오브 리벤지2> 시나리오와 영화의 주요 장면을 담은 일러스트를 포함한 투자 의향서를 할리우드의 메이저 영화사에 보냈다.

그런데 열흘 가까운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답변을 듣지 못했던 것이다.

“그거 아세요, 사장님?”

“뭘요?”

“사장님의 방금 그 질문, 요 며칠 동안 열 번도 넘게 저에게 하셨다는 거.”

“내가 그랬던가요?”

“네. 이 정도면......”

이레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투자 의향이 없다고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이레나가 생각해도 그렇죠?”

“네.”

“난감하네. 그렇다고 15%에 가까운 막대한 이자 비용을 물어가면서까지 은행 대출을 당겨쓸 수도 없고.”

“조지 루이스 감독님께 도움을 청해보는 것이 어때요? 루이스 감독님이라면 충분히 투자에 응하실 수도 있지 않겠어요?”

“루이스 필름 쪽도 자금 여력이 없기는 매한가지예요. 지금 제작하고 있는 <스페이스 워즈> 속편 때문에요.”

“큰일이네요. 투자 문제가 해결되어야 본격적인 영화 제작에 들어갈 수 있을 텐데......”

이레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 또한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나 보군. 앞선 영화의 연이은 성공으로 할리우드 투자사들도 이번에는 쉽게 투자에 응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말이야.’

그런데.

부족한 제작비 이천만 달러는 정말이지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확보를 할 수가 있었다.

그것도 아주 우연한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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