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머리 감독의 할리우드 정복기-36화 (36/145)

# 36 < 전편보다 나은 속편은 없다? (1) >

랄프 맥쿼리가 나를 향해 물었다.

“<체이스 오브 리벤지>라면 킴이 가장 처음 연출을 맡았던 영화 아닙니까?”

“예. 이 영화가 나온 지도 벌써 3년이나 지났습니다. 그러니 이제 슬슬 속편을 제작할 때도 됐지요.”

“하긴 영화의 흥행성적만 놓고 보면 한 편으로 끝내기는 무척 아쉬운 영화이긴 하죠.”

“그렇습니다. 더군다나 이 영화는 북미 지역에서는 제대로 개봉관을 확보하지 못해 대다수가 홈비디오로 관람을 했고, 그 때문에 저에게는 무척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영화감독이나 제작사가 성공한 영화의 속편을 만드는 이유는 간단하다.

상대적으로 위험 부담이 적기 때문이다.

전작의 인기에 기대 속편도 어느 정도는 관객을 확보하고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본편보다 나은 속편은 없다.’라는 말이 영화계에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 본편의 성공에 힘입어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속편을 제작했다가 심한 혹평을 듣고, 흥행마저 실패한 영화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 대표적인 영화가 바로 <조스> 시리즈인데, 총 2편의 속편이 제작되는 동안 흥행은 고사하고 혹평만 잔뜩 듣고 말았다.

‘할리우드 영화계에서는 이를 ‘소포모어 징크스’라고 부르지. 속편의 인기에 힘입어 후속작을 제작했는데, 기대한 만큼의 성적을 내지 못하고 오히려 전작의 명성에 누를 끼치는 경우를 말이야.’

하지만 <체이스 오브 리벤지>는 달랐다.

본편에서 제작비의 한계 때문에 미처 보여주지 못한 대규모의 스펙터클한 추격씬을 속편에서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는 영화였다.

특히 내 개인적으로도 <체이스 오브 리벤지>가 ‘자동차 추격 액션’이라는 장르의 대명사 격의 영화로 자리 잡게 만들기 위해서는 대규모 자동차 추격 씬을 가미한 속편의 제작은 반드시 필요했다.

‘전생에서 자동차 액션 영화라고 하면 사람들은 <매드 맥스>나 <분노의 질주>를 떠올리곤 했지. 하지만 이번 생은 달라. <체이스 오브 리벤지>는 이 두 영화의 원조 격 영화가 될 테니까.’

속마음을 감추며 내가 랄프 맥쿼리를 향해 말했다.

“<체이스 오브 리벤지>는 저에게 있어 애증(愛憎)과도 같은 작품입니다. 공들여 영화를 만들었지만, 개봉관 확보 문제로 북미 지역에서는 제대로 된 상영이 이루어지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앞서 제가 만든 영화의 연이은 성공으로 이제 할리우드의 메이저 배급사는 물론이고, 극장주들도 제가 만든 영화라면 얼마든지 개봉관을 내어줄 의사가 있으니까요.”

“제작비는 어느 정도로 예상하고 있습니까?”

“순수 제작비만 5천만 달러 정도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5천만 달러요?”

랄프 맥쿼리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영화 가운데 가장 많은 제작비가 투입된 영화는 <스타트렉>이라는 영화였다.

조지 루이스의 <스페이스 워즈>와 더불어 대표적인 SF 영화인 <스타트렉>은 순수 제작비만 총 3,500만 달러가 투입되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보다 무려 1,500만 달러가 더 많은 5천만 달러의 천문학적인 제작비가 들어간 영화를 만들겠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니 다년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급 영화에 참여해 온 랄프 맥쿼리조차도 놀랄 수밖에.

“5천만 달러라니. 차마 믿기지가 않는군요. 이 정도 금액이라면 메이저 영화사들도 감히 제작할 엄두를 내지 못할 영화인데......”

랄프 맥쿼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잘못하다 Film Kim은 물론이고, 참여한 투자사들도 엄청난 재정 적자를 떠안아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특히 Film Kim 같은 작은 영화사는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어요. 그러니 조금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저도 그 점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리스크(risk)를 조금 분산시키려고요.”

“어떻게요?”

“할리우드의 여러 투자사를 이 영화에 동시에 참여시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이 영화가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투자사에 심어줘야겠지만요.”

“......<스페이스 워즈> 제작 때처럼 말이군요.”

랄프 맥쿼리가 그제야 내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지 루이스가 <스페이스 워즈>를 처음 기획했을 당시, 대부분의 투자사들은 이 영화에 투자하기를 거부했다.

시나리오만으로 이 영화가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질지, 과연 흥행에 성공할지를 섣불리 판단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래픽 디자이너인 랄프 맥쿼리의 참여로 상황은 달라졌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조지 루이스에게 <스페이스 워즈>의 여러 장면을 직접 그림으로 그려줬고, 그 덕분에 영화의 대략적인 이미지를 그려볼 수 있었던 투자사 관계자들이 영화 제작을 승인해 준 것이다.

즉, 랄프 맥쿼리는 <스페이스 워즈>의 제작 허가를 받아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그야말로 일등 공신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킴은 나에게 투자자들을 설득할 일러스트 제작을 원한다는 것이군요? 앞선 <스페이스 워즈> 때처럼.”

“그렇습니다. 랄프 씨가 영화의 등장인물, 배경, 특히 가장 중요한 소품인 자동차를 직접 일러스트로 제작해주면 앞으로 투자자를 설득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흐음.”

랄프 맥쿼리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천부적인 그래픽 디자인 실력을 가진 그도, 무려 5천만 달러가 투입되는 영화에 참여하는 것이 무척이나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이 양반아. 난 이미 전생에서 이런 류(類)의 영화를 많이 본 경험이 있으니까. 그래서 이 경험을 모두 종합해 영화를 만들면 지금 시기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고퀄리티의 자동차 추격 액션 영화가 탄생할 수 있을 테니까.’

“일단......”

랄프 맥쿼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시나리오부터 먼저 봅시다. 그런 다음 내가 확답을 드리지요.”

“알겠습니다.”

내가 책자 하나를 랄프 맥쿼리에게 건넸다.

그동안 틈틈이 시간 날 때마다 쓴 <체이스 오브 리벤지2> 시나리오였다.

“천천히 한번 읽어보시고, 결심이 서면 다시 연락 주십시오. 랄프 씨.”

“그러지요.”

57.

영화 상영이 모두 끝났다.

하지만 내 일상은 여전히 바쁘게 돌아갔다.

해외 판권 계약, VHS 제작 등등 후속 업무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고된 일상도 나에게는 큰 즐거움이었다.

계속된 흥행 참패,

제작비를 구걸(?)하기 위해 이 영화사, 저 영화사를 떠돌던 전생에 비하면 지금은 불평조차도 사치스러운 상황이었다.

‘아무리 바빠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일이 한 가지 있지.’

그것은 바로 나의 생물학적인 아버지를 찾아뵙는 일이었다.

의지할 수 있는 피붙이 하나 없는 이번 생에,

그는 나의 유일한 혈육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내가 ‘Kim′s supermaket’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진열대를 정리하고 있던 아버지가 반가운 얼굴로 나를 맞았다.

“어, 그래. 도훈아.”

“폼 안 나게 사장이 직접 물건을 정리하고 그래요? 직원들 시키시지.”

“이놈아. 자고로 가게는 사장이 직접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는 거야. 사장이 게으름을 피우는 순간 그 가게는 결국 망하는 지름길로 가는 거라고.”

“어련하시겠어요. 그나저나 찬수 아저씨는요?”

“찬수? 아, 찬수 지금 LA 한인회 정기 모임이 있어서, 거기 갔어.”

“LA 한인회요?”

“그래. 얼마 전에 찬수와 내가 LA 한인회 이사직 제의를 받았거든. 할리우드의 유명 영화감독을 아들로 둔 덕분에 나도 한인 사회에서 더불어 인지도가 높아졌지. 이사직 제의가 온 것도 그 때문이고.”

“그래서 이사직을 맡으신 거예요?”

“그래. LA 한인회가 우리 한인 사회의 발전을 위해 만들어진 단체인 만큼 우리도 기꺼이 수락했지.”

“잘하셨어요. 근데 아버지는 왜 모임에 안 가셨어요?”

“사장이 둘 다 자리를 비울 수 있나. 그래도 나보다는 찬수가 더 많이 배운 사람이라서 모임이 있으면 되도록 찬수가 가는 편이지. 물론 꼭 참석해야 할 일이 생기면 나도 가려고 노력하고 있고.”

“그렇군요.”

내가 살짝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에이, 좀 아쉽네. 찬수 아저씨 있으면 가게 맡기고 아버지랑 같이 저녁이나 먹을까 해서 왔는데.”

“저녁? 그게 뭐 어렵나? 먹으러 가면 되지.”

“뭐에요. 방금 아버지가 사장 둘 다 자리를 비우면 안 된다고 하셔 놓고서는.”

“우리 아들이 오는 날은 예외야. 까짓거 하루 가게 문 닫고 갈 수도 있다고.”

“그럼 지금 바로 가요. 제가 아버지 맛있는 거 사드리려고 돈 왕창 가져왔어요.”

“아서라, 이놈아. 오늘 밥은 내가 산다. 나 요즘 돈 많아. 가게 확장하고 장사가 너무 잘 돼서.”

“그게 정말이에요?”

“그래. LA 한인 타운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슈퍼가 바로 ‘Kim′s supermaket’ 아니냐? 게다가 LA 한인회의 이사라는 타이틀도 가게 홍보에 큰 도움이 되고, 하하하.”

“설마 그러려고 이사직을 수락한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 흐흐흐.”

***

잠시 후, 인근의 한식당.

아버지와 내가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볼 때마다 신기하네.”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다시 두 번째 밥공기를 집어드는 나를 향해 아버지가 웃으며 말했다.

“뭐가요?”

“도훈이 너 말이야. 너 원래 한식, 특히 매운 음식은 질색했는데. 어렸을 때 미국에 와서 한식은 거의 먹어본 적이 없어서.”

순간 움찔했지만,

적당히 핑계를 대기로 했다.

“사람 입맛은 변한다잖아요. 특히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제 겨우 이십 대 중반인 녀석이 나이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하니까, 환갑을 앞둔 이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아주 가소롭기 그지 없구나.”

“아버지도 참.”

“아 참, 도훈아. 내가 너한테 할 말이 있는데.”

“뭔데요?”

“너 혹시 LA 한인회 회장님 한번 만나볼 생각 있냐?”

“한인회 회장님요?”

“그래. 회장님이 언제 시간 날 때 도훈이 널 꼭 좀 만나보고 싶다고 하더구나.”

“회장님이 무슨 일로요? 전 한 번도 회장님을 뵌 적이 없는데.”

“난들 아나. 혹시 도훈이 네가 요즘 이곳 미주 한인들의 명예를 드높이고 있어서 감사패라도 주려는 것일지도 모르지.”

“......”

“어때? 한번 만나볼 생각 있냐?”

“시간 내 볼게요. 그래도 우리 아버지가 명색이 LA 한인회 이사신데, 제가 가서 아버지 체면 한번 살려드려야죠.”

“눈물 나도록 고맙다, 이놈아. 하하.”

아버지가 다시 나를 향해 물었다.

“근데, 도훈아.”

“네.”

“너 혹시 만나는 여자는 없냐?”

“여자......요?”

“그래. 너도 피 끓는 청춘인데 연애도 좀 해야지. 더군다나 할리우드는 세계 최고의 미모를 자랑하는 여배우들이 잔뜩 모여 있는 곳 아니냐.”

“글쎄요, 아직 저 좋다고 하는 여배우는 없네요.”

“매번 두드려 패고 부수는 영화만 만드니까 그렇지. 아름다운 여배우가 나오는 로맨스 영화도 한번 만들어봐.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인연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생각해 볼게요.”

“그래. 그리고 혹시 여자친구 생기면 제일 먼저 나한테 소개해 줘야 한다. 안 그러면 이 아버지 삐질지도 몰라.”

“인종은 불문인 거죠?”

“당연하지. 아버지는 그런 거 따지는 고리타분한 사람 아니다.”

“흑인도요?”

“......”

잠시 머뭇거리던 아버지가 대답했다.

“흑인이라도 예쁘기만 하면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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