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 < 최초의 파운드푸티지 영화 (3) >
49.
“감독님, 촬영 준비 모두 끝났습니다.”
조감독의 말에 레이첼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후 내내 강행군으로 이어진 촬영으로 지칠 만도 한데,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힘차게 자리에서 일어나 현장으로 향했다.
그 틈을 타 조감독이 슬며시 나에게 말을 붙여 왔다.
“저기, 감독님......”
“네?”
“죄송하지만 사인 하나 받아도 될까요?”
“사인요?”
“예. 아까부터 부탁드리고 싶었는데, 너무 대단하신 분이라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조감독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전생에서 밑바닥부터 시작해 온갖 허드렛 일을 도맡아 하며 겨우 감독의 자리까지 올라간 경험이 있는 나는 누구보다 그의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초창기에는 나도 유명 감독들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가슴 떨려 했었지.’
“하하. 그런 부탁이라면 얼마든지 들어드릴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조감독이 냉큼 종이와 펜을 나에게 내밀었다.
“많이 힘들죠?”
“예?”
“저도 겪어봐서 압니다. 영화판에서 조감독은 말이 좋아 조감독이지, 감독을 대신해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 아닙니까?”
영화 촬영 현장에서 조감독은 1인 멀티플레이어나 다름없다.
해야 할 일이 무척이나 많기 때문이다.
촬영 시작 전 시나리오 검토부터 배우, 조명, 세트, 효과, 분장 확인, 각 팀의 감독과 스태프들에게 감독의 지시 사항 전달 및 의사 조율에 이르기까지,
영화 촬영 전반에 관한 일을 확인하고 점검하는 일이 바로 조감독의 역할이다.
또한 스태프들 간의 분쟁 조정도 조감독이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이다.
이 때문에 조감독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의사소통 능력, 속된 말로 ‘넉살’이다.
오죽하면 간, 쓸개 다 빼놓고 일해야 하는 자리가 바로 조감독이라는 말이 있겠는가.
‘과부 마음은 홀아비가 안다고, 나도 전생에서 오랜 조감독 생활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잘 알고 있지.’
그런 내 생각을 알 리 없는 조감독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몸은 힘들지만, 일은 너무 즐겁습니다.”
“그래요?”
“무엇보다 제임스 킴 감독님과 같은 유명한 감독님이 제작하는 영화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에게는 무척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앞으로 저의 이력에 큰 도움이 될 테니까요.”
“영화를 많이 좋아하시나 보군요?”
“물론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매일 영화 한 편씩은 꼬박꼬박 챙겨볼 정도로요.”
“영화 전공입니까?”
“아닙니다. 제 전공은 영문학입니다.”
“영문학요? 굉장히 의외군요.”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학위를 따지는 못했습니다. 다니던 대학교를 중퇴했거든요.”
“이유가 뭐죠?”
“처음에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대학을 그만두고 트럭을 운전하며 틈틈이 집필활동을 했지요. 그런데 우연히 조지 루이스 감독님이 연출한 <스페이스 워즈>란 영화를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장 하던 일을 그만두고 영화 일에 뛰어들게 된 것입니다.”
조감독이 덧붙여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감독님도 <스페이스 워즈> 제작에 참여하셨더랬죠. 엔딩 크레딧에서 봤습니다. 감독님의 이름을요.”
“이번 영화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됐습니까?”
“로저 코먼 감독님의 추천을 받았습니다. 제임스 킴 감독님이 제작하는 영화라는 이야기를 듣고 두말하지 않고 곧바로 하겠다고 했죠. 조지 루이스 감독님과 제임스 킴 감독님은 저의 우상이나 다름없는 분이라서요.”
“하하. 그런 말씀을 하시니 제가 다 민망해지는군요.”
“아닙니다. 앞서 감독님이 연출한 영화 <체이스 오브 리벤지> 또한 무척이나 감명 깊게 봤습니다. 그 영화를 통해 특히 영화 기법에 대한 많은 공부도 하게 되었고요.”
“그 정도 열정이라면......”
내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의 모습에서 예전의 내 모습이 보이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 열정이라면 언젠가는 반드시 좋은 영화감독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보다도 훨씬 뛰어난.”
“감사합니다, 감독님.”
“아 참. 이름이 어떻게 되죠?”
“제 이름요?”
“예. 기왕 사인하는 김에 이름과 간단한 응원 메시지도 함께 적어드리려고요.”
“그렇게 해주시면 저야 무척 영광이지요. 제 이름은 공교롭게도 감독님과 같은 제임스입니다. 성은 카메룬이고요.”
“!!!”
제임스... 카메룬이라고?
설마 내가 알고 있는 그 제임스 카메룬?
설마 하는 표정으로 내가 조연출, 아니 제임스 카메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알고 있는 그 제임스 카메룬과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어 보였다.
너무 젊어서 아까는 미처 알아보지 못했지만.
‘맙소사! 제임스 카메룬이라니!’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제임스 카메룬’은 <터미네이터>, <타이타닉>, <아바타>와 같은 세계적인 흥행작을 만들어낸 영화 역사상 최고의 감독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유명한 영화감독이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내가 물었다.
“이전에 영화를 연출한 경험이 있습니까?”
“마음맞는 친구들과 단편 영화 한 편 정도 촬영해 본 경험은 있습니다.”
“제목이 뭡니까?”
“<제노제네시스>라는 단편 영화입니다. 어디 가서 내세울 만한 수준의 영화는 아니고요.”
확실했다.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제임스 카메룬이 내가 알고 있는 그 제임스 카메룬이라는 사실이.
왜냐하면 <제노제네시스>는 제임스 카메룬의 처녀작으로 유명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나를 향해 제임스 카메룬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감독님?”
“예?”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현장에 가야 할 것 같아서......”
“아, 미안합니다. 사인은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제임스 카메룬이 내 사인이 들어간 종이를 소중히 챙겨 들며 현장으로 달려갔다.
멀리서 그를 찾는 목소리가 큼지막하게 들려왔기 때문이다.
“조감독! 조감독 어딨어?”
“예, 예. 갑니다, 가요.”
사실,
처음 내가 제임스 카메룬의 이름을 물었을 때는 사인지에 이름과 함께 적당한 응원 메시지를 적어줄 생각이었다.
어려운 시절을 이미 한번 겪어본 선배 영화인의 마음으로.
그런데.
‘제임스 카메룬’이란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그래서 나는 사인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적어주었다.
< 카메룬 씨. 혹시 영화 제작을 위해 써둔 시나리오가 있으면 내 사무실로 한번 찾아와요. 내가 도와줄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
50.
야간 촬영은 몹시도 힘든 작업이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작업이기도 하다.
영화 내용상 밤에 찍어야 할 장면들이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 같은 경우는 더더욱 그랬다.
장르가 공포인 만큼 낮보다는 밤에 촬영을 하는 것이 더 관객들의 공포심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금 촬영되고 있는 씬은 영화의 복선 역할을 하는 매우 중요한 장면이다.
따라서 새벽 2시를 훌쩍 넘긴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촬영장의 열기는 여전히 뜨거웠다.
내가 조심스럽게 촬영장으로 다가갔다.
열연을 펼치고 있는 배우들을 바라보며 내가 이번 씬의 완성된 장면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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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링턴 삼각지대 숲속에 설치된 두 개의 텐트.
하나는 남성, 또 하나는 여성들의 임시 숙소였다.
그런데.
“샘. 아직 자?”
텐트 밖에서 수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던 샘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아, 방금 일어났어.”
“그럼 잠깐 나와 볼래?”
“왜? 무슨 일 있어?”
텐트 입구를 열고 나오는 샘을 향해 수잔이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존이랑 엠마가 아직 안 와서.”
“존과 엠마? 둘이 어디 갔어?”
“아까 차에 가져올 물건이 있다면서 갔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아서.”
“언제 갔는데?”
“한 시간 정도 전에.”
“뭐?”
샘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텐트에서 차가 있는 입구까지는 불과 10분 정도의 거리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샘의 표정은 이내 누그러졌다.
“됐어. 걱정하지 말고 그냥 먼저 자. 보나 마나 둘이서 이상야릇한 짓 하고 있겠지.”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샘이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연인이 아무도 없는 곳에 둘만 남게 되면 할 일이 뭐 있겠어? 흐흐흐.”
“설마 둘이서 카섹스라도 하고 있다는 뜻이야?”
“읔! 넌 무슨 여자가 그런 직설적인 표현을......”
“그보다, 샘.”
“응?”
“나.... 운데.”
“뭐라고? 잘 안 들려.”
“나 지금.... 다고.”
“어휴, 똑바로 좀 말해봐.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듣겠단 말이야.”
수잔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나 화장실 가고 싶다고. 엠마 올 때까지 기다려서 같이 가 달라고 이야기하고 싶은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와서......”
“그래서 지금 나더러 같이 가 달라고?”
수잔이 고개를 끄덕였다.
샘이 잠시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이내 그녀를 따라나섰다.
“멀찌감치 서 있어야 해. 창피하니까.”
“알았어. 생리현상인데 뭐 부끄러울 게 있다고. 오지 촬영가면 이보다 더한 경우도 생기는데, 뭘.”
“그래도. 그렇다고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는 말고. 나 무섭단 말이야.”
“......이건 뭐 어쩌라는 건지.”
수잔이 급한 볼일을 위해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춘 사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샘의 얼굴이 일순간 굳어졌다.
자신의 등 뒤로 정체 모를 뭔가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뭐, 뭐지?’
뒤이어.
- 서걱!
- 서걱!
낮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불현듯 그를 엄습해오는 두려움.
- 서걱!
- 서걱!
연이어 들려오는 발소리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샘이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는 순간!
“아아아아악!”
커다란 비명과 함께 샘이 벌렁 뒤로 나자빠졌다.
갑자기 불빛이 켜지며 마치 유령처럼 보이는 존재가 그의 시야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하하!”
“깔깔깔!”
사라졌다던 존과 엠마가 배를 잡고 웃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에 플래시 불빛을 비춘 채로.
너무 놀란 나머지 콧물까지 튀어나온 샘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뭐, 뭐야, 니들. 간 떨어질 뻔했잖아.”
“뭐긴. 아까 우리보고 겁 많다고 비웃길래 샘 넌 얼마나 담력이 큰지 한번 시험해 본거지, 흐흐흐.”
“이런 망할......”
샘이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털며 존과 엠마에게 눈을 흘겼다.
그런 그를 향해 두 사람이 웃으며 말했다.
“샘 너 화들짝 놀라는 장면, 카메라에 아주 제대로 찍혔어.”
“샘 너 오늘 제대로 흑역사 남겼다. 앞으로 나한테 밉보이면 회사 사람들한테 확 다 까발려 버릴 거야, 하하하.”
“어휴, 이런 미친 것들.”
“그런데......”
엠마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수잔은 어디 갔어?”
“수잔?”
“어. 텐트에서 먼저 자고 있는 거야?”
“그게 아니라, 방금 수잔이 소변이 마렵다고 저기 수풀 쪽으로 들어갔는데...... 왜 아직 안 나오지?”
샘이 어둠 속을 향해 소리쳤다.
“수잔! 아직 멀었어?”
침묵.
“수잔! 거기 있는 거 맞아?”
또 다시 침묵.
“없는 거 같은데?”
“어휴, 얜 도대체 어디까지 간 거야?”
“소리 들리면 창피하니까 그렇겠지.”
“아무리 그래도 이 밤중에 겁도 없이......”
“야! 수잔! 대답해봐, 수잔!”
하지만.
수잔의 목소리는 끝끝내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세 사람은 알지 못했다.
이것이 그들에게 발생한 첫 번째 실종 사건이라는 것을.
더불어 세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게 멀찌감치 떨어져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정체 모를 검은 그림자가 하나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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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컷! 오케이!”
멀리서 들려오는 레이첼의 목소리에 내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
마지막 씬 촬영이 종료된 것이었다.
“오늘 촬영은 이걸로 끝냅니다. 다들 수고하셨고요, 현장 정리하고 장비 챙겨서 숙소로 이동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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