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 최초의 파운드푸티지 영화 (2) >
내가 이번 이라는 영화의 연출을 레이첼에게 맡긴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먼저 영화 내적으로는 ‘파운드 푸티지’라는 영화의 장르적 특성 때문이었다.
파운드 푸티지는 ‘정체불명의 비(非)영화적 영상을 활용한 영화’를 표방하고 있다.
따라서 경험 많은 베테랑 감독보다는 다소 경험이 적은 감독이 더 사실감 있는 영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
영화의 불완전함이 오히려 영화의 완성도를 높여주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더불어 여성 감독 특유의 섬세함은 클로즈 업 샷이 많은 파운드 푸티지 장르의 특성상 인물의 감정선을 더욱 세밀하게 화면에 담아낼 수 있다.
또 한 가지는 영화 외적인 이유, 다시 말해 앞으로 나의 영화 제작 방향과도 관련이 있었다.
전생의 기억 덕분에 나는 앞으로 할리우드에서 어떤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게 될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만약 내가 이런 영화들의 제작에 직간접적으로 참여를 하게 되면 영화감독으로서의 명성은 물론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막대한 부(富)까지 덤으로 얻게 될 것이다.
문제는 영화 한 편을 연출하는데 최소 1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감독이 아닌 제작자로 참여하면 여러 편의 영화에 동시에 참여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 첫 번째 시도가 바로 이번 이라는 영화였던 것이다.
‘더불어 그동안 백인 남성을 위주로만 움직여가던 할리우드 영화계에도 큰 변화가 생기겠지. 나 같은 동양인이나, 레이첼 같은 여성도 얼마든지 할리우드 영화 산업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 말이야.’
***
미국 버몬트주 외곽.
한 무리의 사람들이 대형 버스에서 내려섰다.
영화 에 출연할 배우와 촬영 스태프들이었다.
인원은 기껏해야 20명 남짓.
전작과 달리 이번 영화는 저예산 영화였고, 이에 적은 인원으로도 충분히 영화를 촬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을씨년스러운 날씨네요.”
레이첼의 말에 내가 대답했다.
“공포영화 찍기 딱 좋은 날씨죠. 별도의 조명이나 화면효과가 필요 없을 정도로요.”
“설마 우리도 여기서 실종되는 불상사가 생기지는 않겠죠? 베닝턴 삼각지대 실종 사건은 모두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하잖아요.”
“그럼 다른 누군가가 우리가 남긴 영상으로 더 사실감 있는 영화를 만들겠죠.”
“으, 킴은 농담을 해도 그런 끔찍한 농담을......”
“하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레이첼. 그런 일들은 치안이 불안정했던 옛날에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까.”
그러는 사이,
스태프들이 부지런히 촬영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조명팀은 조명 세팅.
음향팀은 음향기기와 마이크 점검.
미술팀은 배우들 분장과 소품 설치.
촬영팀은 카메라 체크 및 프리뷰 화면 설치 등등.
소규모 인원이었지만 나름 모두 영화판에서 잔뼈가 굵은 스태프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에 촬영 준비는 단시간에 마무리됐다.
촬영장 세팅이 완료되자, 곧바로 배우들의 리허설이 시작됐다.
이제부터는 조연출과 스크립터들의 보조를 받아 이번 영화의 연출을 맡고 있는 레이첼이 본격적으로 현장을 지휘해야 했다.
물론 중간중간 제작자인 나와의 상의나 조언도 빠짐없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촬영 현장을 지켜보면서,
나는 이번 영화의 주요 장면들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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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몬트주의 베링턴 삼각지대 입구.
- 치이익!
잠깐의 화면 노이즈 현상이 지나가고, 이내 화면이 밝아졌다.
화면에 나타난 한 남자의 얼굴.
비니 모자를 귀까지 덮어쓴 그는 이번 다큐멘터리의 카메라맨인 ‘존 엘릭’이었다.
손에 든 카메라로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며 카메라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던 존이 다시 주변으로 카메라를 돌렸다.
연달아 화면에 등장하는 또 다른 남성과 그 옆을 지키고 있는 두 명의 여성.
남성은 이번 다큐멘터리의 연출을 책임지고 있는 지역 방송국 PD였고, 여성 둘은 작가였다.
“존, 화면 괜찮아?”
“응.”
“그럼 여기서 오프닝 화면을 찍는 걸로 하자.”
“오케이, 샘.”
존이 풀 샷으로 탐사지인 베닝턴 삼각지대의 전경을 화면에 담기 시작했다.
굳이 멘트는 따로 담을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사후 편집 과정에서 별도의 나레이션과 효과음이 들어갈 예정이기 때문이다.
중간중간에 연출자인 샘의 인터뷰 장면만 따면 충분했다.
“내막을 알고 봐서 그런가? 숲 분위기가 굉장히 을씨년스럽네.”
수잔이라는 이름의 여성 작가가 진저리를 치자, 곁에 있던 또 다른 작가 엠마가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괜히 으슬으슬하네.”
과장도, 괜한 호들갑도 아니었다.
그들의 말처럼 화면에 비춰지는 베닝턴 삼각지의 모습은 꽤나 음산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방금 저거 봤어?”
카메라맨인 존의 음성이 화면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의 시선, 정확하게 말하면 카메라의 시선이 닿은 곳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베링턴 숲 언저리였다.
“왜 그래, 존?”
화면에 샘의 얼굴이 나타났다.
물론 이 또한 카메라맨인 존의 시각이었다.
“뭔가 지나간 것 같아서.”
“지나가긴 뭐가 지나갔다고 그래.”
샘이 비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다들 이렇게 겁이 많아서 촬영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어?”
“정말이야, 정말 뭔가 지나가는 것 같았다고. 카메라 한번 돌려볼까?”
“안돼, 존. 내가 분명히 말하는데, 이 시간 이후로 절대 촬영을 멈추면 안 돼. 괜히 그러다 중요한 장면을 놓칠 수도 있으니까. 잠자는 장면, 화장실 가는 장면, 옷 갈아입는 장면 빼고는 모조리 다 카메라에 담아야 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
“알았어, 샘.”
하지만.
그들만 몰랐을 뿐, 영화를 지켜보는 관객들은 모두 눈치를 채고 있었다.
순간의 찰나에 화면을 스쳐지나간 검은 그림자의 정체를.
그리고 이는 앞으로 그들에게 닥칠 불행의 서막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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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컷!”
메가폰을 잡은 레이첼의 음성에 내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어때요? 화면은 괜찮게 나왔어요?”
“그게요......”
여전히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는 레이첼.
같은 영화감독인 나는 그 이유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각 쇼트(shot)의 촬영이 끝날 때마다 감독은 결정을 해야 했다.
OK를 외칠지, KEEP을 외칠지, 그것도 아니면 NG를 외칠지.
OK는 만족할 만한 영상이 나왔다는 의미로, 곧바로 다음 쇼트로 넘어가면 된다.
KEEP은 일단 저장해 두고, 차후에 쓸지 말지를 결정한다는 의미이다.
NG는 뭐,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테고.
문제는 경험이 적은 감독일수록 OK를 외칠지, KEEP을 외칠지, NG를 외칠지를 결정하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것이다.
더 좋은 영상이 나올지 그렇지 않을지를 판단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굳이 내가 나서 거들 필요는 없었다.
이는 전적으로 연출을 맡은 감독이 결정할 문제이니까.
“오케이. 제1씬은 이걸로 마무리하고, 다음 씬 촬영 장소로 이동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그제서야 스태프들이 촬영 현장 정리에 나섰다.
배우들은 다음 촬영 대본을 확인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왠지......”
내가 레이첼을 향해 말했다.
“날씨가 비가 올 것 같네요?”
“그렇죠?”
“시나리오에는 없던 상황이지만, 그래도 촬영을 이어가는 데는 문제가 없겠네요.”
“네. 오히려 약간의 비가 내려주는 편이 화면 연출에는 더 좋을 수도 있겠네요.”
“오늘 촬영 가운데는 다음 씬이 가장 중요한 장면이 되겠군요. 영화 전체의 복선에 해당하는 부분이니까.”
“맞아요. 그래서 다음 씬은 좀 공들여서 찍으려고요.”
“그렇다고 너무 무리해서 촬영을 강행하지는 마세요. 아직 날씨가 제법 찬데, 괜히 비까지 맞혔다가 배우나 스태프들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니까요.”
“그럴게요.”
레이첼이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킴이 옆에 있어 줘서 많은 힘이 되네요. 여러 가지 많은 조언도 해주시고요.”
“뭘요. 어쨌거나 이번 영화는 레이첼의 영화라는 점 절대 잊지 마세요. 그러니 앞으로 촬영에 관한 사항의 결정은 오롯이 레이첼의 몫입니다.”
“후후. 물론이죠.”
***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아직 시나리오 초반부이기 때문에 별다른 사건이 벌어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후 촬영이 거의 끝날 무렵,
내가 스크립터들이 작성한 자료를 살펴보며 촬영 진행 상황을 점검했다.
예정된 촬영 분량은 총 3개의 씬(scene).
쇼트(shot)를 따로 구분할 필요는 없었다.
이번 영화가 파운드 푸티지 형식인 만큼, 전체 장면이 스테티캠을 이용한 롱테이크 형식으로 촬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가피하게 컷(cut)을 해야 하는 장면이 있다면, 후반 작업에서 불가시적 편집(Invisible editing)을 통해 보완하면 그만이다.
“자, 그럼......”
레이첼이 스태프들을 향해 말했다.
“저녁 식사하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야간 촬영 들어가도록 할게요. 다들 식사 맛있게 하세요.”
레이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스태프들이 준비된 도시락을 들고 삼삼오오 모여서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공포영화인 만큼 야간 촬영 계획이 제법 많았고, 이 때문에 당분간은 대부분의 끼니를 도시락에 의존해야 했다.
“우리도 식사해야죠?”
레이첼이 내 앞에 놓인 의자에 털썩 앉으며 대답했다.
“식사보다는 커피부터 한잔했으면 좋겠네요.”
“내가 한잔 타드릴게요.”
“고마워요, 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후후 불어 마시는 레이첼을 향해 내가 말했다.
“어때요? 오래간만에 현장을 뛰는 소감이.”
“몸은 힘든데, 마음은 무척 가벼워요. 촬영 중간중간 나도 모르게 흥분되기도 하고요.”
“좋은 현상이군요. 그건 그만큼 레이첼이 촬영에 몰입하고 있다는 증거니까. 가끔 나도 너무 촬영에 몰입한 나머지 해진 줄도 모르고 계속 촬영을 진행하다가 스태프들의 눈총을 받기도 한다니까요. 스태프들 밥은 먹이고 해야 되는데 말이죠, 하하.”
“아 참, 제가 킴에게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이 있는데......”
“뭡니까?”
“킴은 가장 존경하는 영화감독이 누구예요?”
가장 존경하는 영화감독이라......
전생에서는 너무나도 분명했다.
누가 물어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폴란드 출신의 영화감독인 그는 ‘최후의 영화예술가’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유명한 예술 영화계의 거장이었다.
대표작으로는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세 가지 색; 레드, 블루, 화이트> 등이 있었고.
특히 그는 영화로 철학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현대 영화예술가라고 불릴 정도로 이 분야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전생에서는 너무나도 그를 닮고 싶었지. 그래서 그와 같은 류(類) 영화를 찍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지.’
하지만 솔직하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는 아직 영화감독으로 제대로 데뷔조차 하지 못했을 시기였기 때문이다.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의외네요. 대부분의 영화감독은 존경하는 영화감독이 한 명쯤은 있기 마련인데.”
“굳이 꼽으라면 조지 루이스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정도라고 말 할 수 있겠네요.”
“왜요?”
“그분들은 지금 내가 추구하고 있는 상업 영화계의 거장들이니까요. 대중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이를 영화로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영화감독이니까요.”
내가 이렇게 대답한 이유는,
적어도 이번 생에서는 ‘하고 싶은’ 영화보다 ‘잘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자, 그럼 우리도 저녁 식사해야죠.”
“그래요, 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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