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머리 감독의 할리우드 정복기-29화 (29/145)

# 29 < 아카데미 시상식 초청 (2) >

46.

아카데미 시상식.

미국의 가장 권위 있는 영화 시상식이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제 가운데 하나이다.

혹자는 아카데미보다 칸, 베니스, 베를린 영화제의 권위를 더 높게 평가한다.

아카데미는 국제 영화제가 아닌 로컬 영화제로 미국인들만의 영화잔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의 수많은 영화인이 아카데미 시상식에 주목하는 이유는 미국 할리우드의 영화와 자본이 전 세계 영화 산업에 미치는 영향력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이었다.

1980년 4월.

나는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 자격으로 시상식에 정식 초청되었다.

내가 연출한 영화 <레이더스>가 영화 관계자들의 엄청난 호평을 받으며 흥행에도 큰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는 무척이나 이례적인 일이었다.

1929년 창립 이래 동양인이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오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배우들 가운데는 아카데미 상을 받은 동양인이 있었다.

1957년 <왕과 나>라는 영화로 제29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을 받은 ‘율 브리너’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하지만 영화 연출자로는 내가 최초였다.

그 때문에 언론과 영화 관련 잡지에서는 연일 이와 관련된 소식이 대서 특필되고 있었다.

- <레이더스>의 연출을 맡은 제임스 킴, 동양인 최초로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오르다!

- 아카데미 시상식 9개 부문의 수상 후보로 오른 영화 <레이더스>, 흥행과 수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나?

- 아카데미 시상식, 50년 만에 드디어 ‘화이트 오스카’라는 오명을 벗게 될 것인가?

- <레이더스>의 제임스 킴 감독이 과연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하게 될 것인지에 대한 전 세계 영화인들과 팬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어.

.

.

.

“Ladies and Gentlemen, 지금부터 제52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화려한 막을 올립니다!”

사회자의 격앙된 멘트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시상식이 시작되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영화감독과 배우들 사이에서 시상식을 관람하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가슴이 벅차올랐다.

“솔직히 말해봐요, 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레이첼이 나에게 귓속말을 해왔다.

“솔직히 킴도 조금은 기대하고 있죠?”

“뭘요?”

“킴이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할 거라고 말이에요.”

아카데미 감독상이라.

기대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아카데미 감독상은 할리우드 영화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꿈꿔보는 영광스러운 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지난 50년 넘게 아카데미가 쌓아 올린 공고한 벽이 그렇게 쉽게 깨지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아뇨,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요?”

“다른 후보들이 너무나 쟁쟁한 사람들이기 때문이죠. 그들이 만든 영화도 <레이더스> 못지않게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요.”

“그럼 킴은 누가 감독상을 받을 것 같아요?”

“내 생각에는......”

내가 주변에 있는 감독상 후보들을 슬쩍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저기 앉아 있는 로버트 벤튼 감독이 받게 될 것 같아요.”

“로버트 벤튼 감독요?”

“예. 작년에 그가 연출한 영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는 작품 면이나 흥행 면이나 모두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한 결과를 낳았으니까요. 게다가 <지옥의 묵시록>을 연출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도 아주 경쟁력 있는 후보고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와 <지옥의 묵시록>

전생에서 나도 인상 깊게 본 영화 가운데 하나이다.

물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좋은 성과를 거두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고.

“에이, 제가 보기에는 충분히 킴이 감독상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방금 말한 두 감독이 연출한 영화도 물론 훌륭한 영화이기는 하지만 킴이 만든 <레이더스>에 견줄 정도는 아니니까요.”

“글쎄요, 그건 지켜보면 알겠죠. 그나저나 작년에는 대작 영화들이 꽤나 많이 만들어졌군요.”

“그러게 말이에요.”

레이첼이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언젠가 저도 여기 있는 감독님들처럼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오르는 날이 오겠죠?”

“물론이죠. 레이첼은 영화적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라 언젠가는 꼭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오를 수 있을 겁니다.”

“어머, 농담 삼아 한 말인데, 그렇게 진지하게 대답하면 제가 너무 민망해지잖아요. 하긴. 제가 운 좋게도 너무 실력 있는 선생님을 만나서 요즘 연출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쑥쑥 늘고 있으니까, 살짝 기대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네요. 호호호.”

“......”

“앗! 이제 드디어 감독상 발표가 시작되려나 봐요. 휴, 갑자기 내가 다 심장이 떨리네.”

레이첼이 마치 기도라도 하듯, 양손을 꼭 부여잡고 시상대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과는 다르게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감독상은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를 연출한 로버트 벤튼 감독에게로 돌아갔다.

‘역시. 이 정도로는 높은 아카데미의 벽을 넘어서기 역부족이군. 그래도 <레이더스>가 편집상, 시각효과상, 음향상, 음향편집상, 미술상 총 5개 부문에서 상을 받았으니,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할 만한 성과라고 할 수 있지.’

그렇게.

약간의 아쉬움을 남긴 채로 제52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막을 내렸다.

47.

Film Kim 사무실.

조지 루이스 감독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헤이, 킴.”

“어서 와요, 조지.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에요?”

조지 루이스가 손에 든 와인 한 병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아카데미 감독상에서 물 먹은 사람들끼리 동병상련으로 같이 위로주나 할까 해서, 하하하.”

“조지도 참 짓궂기는.”

“어때? 시간 되면 우리 집에 가서 같이 술이나 한잔하자.”

“그래요. 아 참, 조지 얼마 전에 이사했다면서요?”

“응. 내가 요즘 <스페이스 워즈> 연이은 성공으로 엄청나게 큰돈을 벌게 되었잖아. 그래서 할리우드 인근에 괜찮은 저택을 하나 구입했지. 마당도 넓고, 큰 수영장도 하나 딸려 있어.”

“넓은 마당에 수영장까지 있다니, 정말 부럽네요.”

“말 나온 김에 킴도 우리 동네로 이사 오지 그래? 마침 우리 집 옆에 큰 저택 하나가 매물로 나와 있는데 말이야.”

“식구라고는 달랑 저와 우리 아버지 둘 뿐인데, 큰 집은 사서 뭐 하게요. 그냥 지금 있는 집만으로도 충분해요.”

“하긴. 킴은 거의 사무실에서 먹고 자면서 영화만 만드는 사람이라 집이 필요 없긴 하지. 차라리 푹신한 고급 침낭이 지금의 킴에게는 더 필요할지 모르지, 흐흐.”

“됐고, 얼른 출발이나 해요. 조지가 사 온 와인이 얼마나 맛있는지 빨리 확인해보고 싶단 말이에요.”

***

할리우드 인근의 대저택.

<스페이스 워즈> 시리즈의 연이은 성공으로, 일명 영화제국을 건설한 조지 루이스의 명성에 걸맞게 무척이나 크고 화려한 집이었다.

마당으로 들어서자,

- 컹컹!

커다란 개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조지 루이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회색 털을 가진 알래스칸 말라뮤트 종의 썰매견이었다.

“인사해, 킴. 얘 덕분에 우리가 4억 달러라는 엄청난 돈을 벌었잖아, 하하.”

“이 친구가 조지가 말한 그 ‘인디아나’라는 이름의 개예요?”

“그래. 나에겐 가족이나 다름없는 녀석이지.”

“......설마 사람을 물거나 하지는 않죠?”

“가끔은. 특히 킴처럼 낯선 인종의 사람을 보면.”

“예?”

“하하. 농담이야, 농담. 이 녀석 덩치만 컸지, 성격은 아주 유순하다고.”

왠지 심하게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데......

때마침 한 여성이 마당으로 나오며 소리쳤다.

“왔으면 얼른 들어오지 않고 둘이 거기서 뭘 해요?”

조지 루이스의 아내이자, 할리우드의 유명 편집가인 ‘아멜리아’였다.

사실 아멜리아는 조지 루이스가 거둔 엄청난 성공의 숨은 주역이었다.

조지 루이스 첫 흥행작인 <청춘>의 편집 작업을 도맡아 하면서 영화의 성공에 큰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뒤이은 영화 <스페이스 워즈> 시리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영화 편집과 같은 외적인 부분은 물론 내적으로도 여주인공인 레나 공주 캐릭터를 창조해 영화에 로맨스적 요소가 들어가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그녀였다.

따라서 조지 루이스가 이룬 성공의 반은 아멜리아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래간만이네요, 아멜리아.”

내가 아멜리아와 볼키스로 인사를 나누었다.

전생 초기에는 무척이나 어색했던 서양식 인사법.

하지만 이제는 여느 미국인과 다름없이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는 인사였다.

“그러게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킴?”

“덕분에요.”

“요즘 킴 덕분에 저이가 아주 살판이 난 것 같던데. 킴이 저이가 쓴 시나리오를 아주 훌륭하게 연출해서 엄청나게 큰 흥행몰이를 하고 있으니 말이에요.”

“조지가 쓴 시나리오가 워낙 훌륭해서 그렇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가진 요리사라도 재료가 좋지 않으면 결코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낼 수 없으니까요.”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아멜리아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저이가 무늬만 영화감독이지, 연출 실력은 정말 형편없지 않아요? 사실 <스페이스 워즈>만 해도 그래요. 막무가내로 찍어낸 영상을 킴이 체계적으로 편집하지 않았다면 결코 그런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거예요. 안 그래요, 킴?”

“......”

“어머? 킴 지금 저이 눈치 보는 거예요?”

“그, 그게 아니라......”

“호호, 농담이에요, 농담. 우리 킴은 너무 순진해서 탈이라니까. 호호호.”

배꼽이 빠질 듯 웃음을 터트리는 아멜리아.

그런 그녀를 향해 내가 말했다.

“아멜리아.”

“네?”

“조지는 참 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 같은 영화감독으로서도 그렇지만 특히 인간적으로도 무척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런 조지를 남편으로 둔 아멜리아는 무척 운이 좋은 사람인 것 같네요.”

“그죠? 제가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죠?”

“물론이죠.”

멀찌감치 서서,

자신이 기르는 개 인디아나와 놀아주던 조지 루이스가 우리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를 본 아멜리아와 나도 같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런데.

전생의 기억 덕분에 나는 지금 두 사람이 모르고 있는 사실 한 가지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머잖아 두 사람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고, 그래서 두 사람은 결국 헤어지고 만다는 사실이 정말 안타깝군.’

***

“자, 한잔해, 킴.”

조지 루이스가 와인 잔을 내밀며 나에게 건배를 청했다.

“고마워요, 조지. 이렇게 집에도 다 초대해주고.”

“뭘, 이런 걸 가지고. 앞으로도 종종 놀러 오도록 해. 나도 그렇고, 아멜리아도 그렇고 킴이 온다면 언제든지 대환영이니까.”

“그럴게요.”

“그나저나 새로운 영화는 어때? 잘 돼가고 있어?”

“공포 영화 말이에요?”

“그래. 이번 영화는 또 얼마나 크게 성공할지 내가 아주 큰 기대를 하고 있다고.”

“기대해도 좋아요, 조지. 영화가 개봉되면 아마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게 될 테니까.”

“읔! 킴의 그 자신감은 한결같구먼. 그나저나......”

조지 루이스가 다시 말했다.

“이번 영화는 도대체 어떤 내용의 영화야? 킴이 나에게 공포 스릴러라는 장르만 알려 줬을 뿐 내용은 이야기해준 적이 없잖아? 그래서 내가 아주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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