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머리 감독의 할리우드 정복기-24화 (24/145)

# 24 < 전설의 모험 영화 <레이더스> (7) >

38.

1978년 초여름.

내가 연출을 맡은 두 번째 영화 <레이더스>가 크랭크 인 됐다.

이와 동시에 Film Kim 사무실에는 다음과 같은 글자가 적힌 커다란 종이판이 부착되었다.

[ D-90 ]

90일 안에 모든 영화 촬영을 끝마치겠다는 의미였다.

물론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레이더스>는 무려 이천만 달러의 제작비가 투입된 블록버스터급 영화이다.

특히 영화의 대다수 장면이 CG가 배제된 실사로 촬영될 예정이기 때문에 대규모의 세트 제작이 불가피했다.

게다가 남아메리카의 정글 지대, 네팔의 고산마을, 이집트의 수도인 카이로 등지의 해외 촬영도 상당 부분 계획되어 있었다.

이러한 외적인 요소 때문에 이 영화는 누가 봐도 상당한 제작 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하지만.

사전에 제작된 무려 6천 컷에 달하는 정교한 스토리보드,

무엇보다 ‘논스톱 액션’이라는 스피디한 액션씬 촬영 기법은 실제 영화 촬영 기간을 상당수 줄일 수 있게 해주었다.

“어휴, 감독님.”

<레이더스> 영화 촬영 현장.

이번 영화의 촬영감독인 더글러스 슬러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조지 루이스의 추천으로 이번 영화에 합류한 더글러스 슬러콤은 실제 이 영화의 촬영감독이었던 인물이기도 했다.

“제가 근 10년 동안 이곳 할리우드에서 촬영감독으로 일하면서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었다고 자부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루에 이렇게 많은 씬을 촬영한 적은 정말이지 이번 작품이 처음입니다.”

“이미 말씀드렸잖습니까? 이번 영화는 30, 40년대의 고전 시리얼 방식으로 촬영이 이루어질 것이라고요. 고전 시리얼 영화의 논스톱 액션씬이 가져다주는 리얼한 속도감은 다른 액션 영화와 우리 영화를 차별화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뭐 번갯불에 콩 볶아먹는 것도 아니고, 이러다 나중에 영화를 본 관객들이 영화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더글라스 슬로콤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는 더글라스 슬로콤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영화에 참여한 대부분의 스태프들이 다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촬영감독이나 스태프들이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이런 촬영 방식은 졸속 제작된 B급 영화에서나 사용할 법한 방법이니까. 게다가 영화의 완성본이 이미 머릿속에 들어있는 나와 달리 다른 스태프들은 영화의 부분 부분만을, 그것도 정렬되지 않은 순서대로 보고 있어서 도대체 이 영화가 어떻게 완성될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런 고전적인 촬영 방식이 오히려 영화 <레이더스>의 흥행을 가져다준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나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내가 대학을 갓 졸업하고, 충무로에 발을 들여놓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로 기억되는군. 전생에서 내가 이 <레이더스>라는 영화를 처음 본 것이 말이야.’

당시로서는 무척 충격이었다.

졸속 제작된 B급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촬영 방식이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급 영화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이 말이다.

하지만 논스톱 액션씬의 리얼한 속도감은 오히려 이 영화의 리얼리티를 극대화시키는 효과를 가져다주었고, 이것이 관객들이 이 영화에 열광하게 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는 것을 영화 전공자인 나는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영화의 진행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생각되면 나중에 편집할 때 일부 정적인 샷(shot)을 삽입해서 조절하면 되니까요.”

“일단 계획대로 촬영한 후 후반작업에서 영화의 전체적인 완급을 조절하겠다는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확신에 찬 나의 말에 더글라스 슬로콤도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감독님. 그럼 감독님만 믿고 계속 촬영을 진행하겠습니다.”

***

영화 <레이더스>의 촬영은 그 어떤 영화보다 빠르게 진행되어 갔다.

하루에 평균 2, 3씬 정도의 촬영이 이루어지는 다른 영화에 비해 매일 두 배 가까운 양의 촬영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스피디한 논스톱 액션씬.

사전에 빈틈없이 제작된 스토리보드.

여기에 전생에서 30년 넘게 영화판에서 뒹굴던 베테랑 감독인 나의 일사불란한 지휘가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레이더스>의 촬영 속도가 다른 영화에 비해 유달리 빨랐던 것은 무엇보다 영화에 참여한 수많은 스태프의 적극적인 참여와 노력이 뒤따랐기 때문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스태프들의 참여가 감독의 일방적인 강요가 아닌 자발적인 참여라는 것이지.’

사실 영화 촬영 현장의 스태프들은 대부분 임시 고용 형태의 계약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성수기와 비수기가 뚜렷한 영화 산업의 특징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스태프들에게 영화감독이나 제작자와 같은 주인 의식을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따라서 지금처럼 제작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강행군으로 촬영을 해나갔다가는 스태프들과의 강한 마찰이 발생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해낸 것이 영화 제작에 참여한 모든 스태프들에게 일종의 특별 옵션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만약 영화 촬영이 예정된 기간보다 훨씬 빨리 끝날 경우, 절약된 제작비의 일정 부분을 스태프들에게 특별 보너스 형태로 지급하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다.

물론 이는 나 혼자만의 결정이 아니라 투자자인 유니온 픽처스의 레이첼 도나 사장의 동의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영화 제작에 앞서,

나는 유니온 픽처스 레이첼 도나 사장을 직접 만나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크리스마스요?”

“예. 이번 영화를 올해 연말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극장에서 상영할 예정입니다.”

“가능하겠어요? 크리스마스까지는 불과 9개월도 채 남지 않았는데.”

“사전 작업 3개월, 실제 촬영 3개월, 후반작업 3개월이면 충분히 제작을 완료할 수 있습니다.”

“사전 작업이나 후반작업은 어떻게든 기간을 단축한다고 쳐도, 실제 촬영은 상당히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작업이 아닌가요? 특히 이런 대규모의 영화 같은 경우에는 더더욱 말이죠.”

“현재 계획으로는 3개월이면 충분히 촬영을 끝마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저를 포함한 다른 스태프들의 적극적인 노력이 있어야만 하고요. 그래서 말인데요, 사장님.”

“말씀하세요.”

“만약 제가 남은 9개월 동안에 영화 촬영을 끝내면, 그래서 제작비의 상당 부분이 절약될 수 있다면, 그 가운데 일부를 스태프들에게 특별 보너스 형태로 지급을 해도 되겠습니까?”

“특별 보너스요?”

“예. 일종의 동기 부여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저야 뭐, 나쁘지 않은 조건이죠. 어차피 2천만 달러는 이번 영화의 제작비로 모두 소모될 예정인 돈이니까요. 게다가 만약 이 영화가 크리스마스 시즌에 상영할 수만 있다면 다른 시기에 상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관람료 수익을 기대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니 투자의 측면에서도 그편이 훨씬 이득이 될 테니까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대신 이번 크리스마스 전까지 영화 제작을 마치겠다는 약속,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그랬다.

매일 강행군으로 진행되는 <레이더스> 촬영 현장임에도 불구하고 스태프들이 별다른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 이유,

아니 반대로 더욱 적극적으로 촬영에 임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일한 만큼의 대가는 충분히 지급한다’는 내 영화 촬영 현장의 원칙을 스태프들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영화 <레이더스>는 실제 예정된 90일의 촬영 기간을 무려 열흘이나 넘게 앞당겨 촬영이 완료될 수 있었다.

39.

Film Kim 사무실.

조지 루이스의 공허한(?), 허탈한(?) 웃음소리가 허공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허허, 허허허.”

“왜 그래요, 조지? 실성한 사람처럼.”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서 그래. 불과 80일 만에 영화촬영을 모두 끝냈다는 사실이 말이야.”

“조지도 옆에서 다 지켜봤으면서 뭘 그래요.”

“눈으로 봐도 믿기지 않아서. 만약 나였다면 아직 영화의 절반도 다 촬영하지 못했을걸?”

“그건 조지가 영화를 너무 완벽하게 촬영하려고 해서 그래요. 더 좋은 영상을 뽑아내려고 재촬영을 계속하다 보면 오히려 처음 찍었던 것보다 못한 영상이 나오는 경우가 부지기수죠.”

“하긴. 시험 문제도 처음 고른 것이 정답인 경우가 훨씬 많으니까 말이야, 흐흐.”

“맞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내가 이 정도 규모의 영화를 불과 80일 만에 찍어낼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전생에서 이 <레이더스>라는 영화를 이미 여러 번 봤기 때문이지. 머릿속으로 구상한 것을 영상으로 구현하는 것보다 눈으로 본 것을 영상으로 구현하는 것이 훨씬 쉽고 빠르니까 말이야.’

“그나저나......”

조지 루이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제 후반작업만 끝내면 영화를 극장에서 상영할 수 있겠군.”

“그렇죠. 아마 우리 계획대로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상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개봉관 확보는? 유니온 픽처스 쪽에서 연락이 왔어?”

“지금 다방면으로 개봉관 확보에 노력하고 있는 모양이더라고요.”

“그렇다면 나도 그냥 있을 수 없지. 내가 가진 인맥을 총동원해서 최대한 개봉관을 많이 확보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야지. 일단 개봉관이 많으면 그만큼 많은 관객이 영화를 볼 확률이 높으니까.”

“아 참, 그러고 보니 메이저 영화사에서도 이번 크리스마스 시즌에 대비해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면서요?”

“뭐, 그렇긴 한데 마땅한 작품이 있는 것 같지는 않더라고. 그나마 일전에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죠스>란 영화의 속편 정도가 우리 영화의 경쟁 상대 정도로 꼽을 수 있을 것 같아.”

영화 <죠스>는 스티븐 스필버그를 일약 스타 감독의 반열에 올려놓은 유명한 작품이다.

1975년 여름 개봉 당시 영화 역사상 최고의 수익을 벌어들인 대흥행작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블록버스터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번에도 역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어요?”

“아니. 제작사인 유니버셜 픽처스에서는 스티븐이 감독을 맡아주길 희망했는데, 그가 거절했다더군.”

“왜요?”

“글쎄, 그건 나도 자세히 모르지. 다른 작품을 준비하고 있거나, 아니면 전작보다 더 나은 속편을 만들어낼 자신이 없었나 보지, 뭐.”

“그런데......”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크리스마스와 죠스라니. 뭔가 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그러게. 보통 그런 영화는 여름철에 개봉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말이야. 내 생각에는 아마도 죠스 1편이 특히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 있어. 게다가 킴의 영화가 크리스마스에 개봉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킴을 견제하려고 일부러 그 시기를 잡았을 수도 있고.”

“서, 설마요.”

“하하. 농담이야,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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