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 전설의 모험 영화 <레이더스> (6) >
36.
영화사 Film Kim 사무실이 다시 북적대기 시작했다.
영화 <레이더스> 제작을 위한 프리 프로덕션(사전 촬영 준비) 단계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는 전작과 달리 대규모의 제작비가 투입된 블록버스터급 영화이다.
이에 참여하는 스태프와 배우는 물론 준비해야 할 것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늘어났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영화 각본 제작과 이를 스토리보드화(化)하는 작업이었다.
전생의 경험 덕분에 나는 영화 제작에 있어 정교한 스토리보드의 제작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것이 얼마나 많은 제작비와 촬영 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는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프리 프로덕션 돌입과 동시에 나는 조지 루이스, 로런스 캐스던, 필립 커프먼 세 사람과 함께 매일 밤을 세워 가며 각본 작성에 매진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각본은 미리 섭외해 둔 애니메이터들의 손을 거쳐 실제 영화 화면과 흡사한 모습의 스토리보드로 만들어졌다.
물론 최종 완성본은 나의 컨펌을 거쳐야만 확정이 되었고.
완성된 스토리보드는 곧바로 각 팀으로 넘겨져 부서별 담당 작업이 이루어졌다.
연출팀은 촬영 장소와 배우 섭외.
미술팀은 촬영 세트와 의상 및 기타 소품 제작.
촬영팀은 화면 구도와 조명 설치 방법 설정 등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작업은 감독인 나의 지휘하에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참 대단하네요, 제임스 킴 감독은.”
“그러게요. 저 나이에 저렇게 능숙하게 스태프들을 지휘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게다가 이번 영화가 겨우 두 번째라면서요?”
멀찍이 서서 내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로런스 캐스던과 필립 커프먼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곁에 있던 조지 루이스도 한마디 거들었다.
“완전히 타고난 영화인이야, 킴은. 각본, 감독, 제작, 연출, 거기에 편집까지, 그 어느 것 하나 못 하는 것이 없어. 영화판에서 잔뼈가 굵은 나조차도 감탄할 정도로 말이야.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의 피부색이지.”
“피부색이요?”
“그래. 킴이 만약 동양인이 아니라 백인이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주목을 받았을 테니까 말이야.”
“흐음.”
“한번 생각해 봐. 앞서 킴이 만든 영화 <체이스 오브 리벤지>는 흥행 성적은 말할 것도 없고, 촬영 기법이나 도구들도 모두 혁신적인 것이었어. 오죽하면 킴의 영화 때문에 대학 영화학 교과서의 내용이 바뀔 정도였겠어? 그런데 그런 킴의 영화를 초청한 영화제는 단 한 곳도 없었어. 인종 차별이 유별난 아카데미는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영화제에서는 킴을 초청할 법도 한데 말이야.”
“메이저 영화사들의 견제도 매우 심했다면서요?”
“맞아. 투자는 둘째치고 개봉관 확보조차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었지. 그나마 중견 영화사인 유니온 픽처스가 손을 내밀었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그의 영화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채 그냥 묻혀버릴 수도 있었어.”
“참 안타깝네요. 단지 피부색 때문에 자신이 가진 재능을 이곳 할리우드에서 마음껏 펼쳐 보일 수 없다는 것이.”
“앞으로는 달라지겠지. 특히 이번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면 킴을 대하는 할리우드 영화 관계자의 시선도 분명 달라지게 될 거야.”
“그래서 저렇게 밤낮없이 눈에 불을 켜고 열심히 하는 건가 보군요?”
“아마도.”
때마침 내가 세 사람의 곁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일 안 하고 다들 여기 모여서 무슨 작당을 하고 있는 거예요?”
“오! 킴. 우리 벌써 이틀째 밤샘 작업을 했다고. 이러다 전부 과로로 쓰러질 수 있으니, 좀 쉬면서 하자고.”
“우리 아버지가 그랬는데......”
내가 빙긋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잠은 무덤에서도 충분하대요. 그러니 다들 커피 한 잔씩만 하고 곧바로 회의실로 들어오세요. 남은 각본 작업도 마저 진행 해야죠.”
“읔! 나도 일 중독이지만 킴 넌 나보다 더한 워커홀릭이야. 잠시도 영화 생각을 하지 않는 시간이 없어.”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조지 루이스.
하지만 그도 다른 누구 못지않은 일 중독자인지라, 더 이상의 군말 없이 나를 따라 회의실로 들어갔다.
***
영화 <레이더스>의 각본과 스토리보드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무렵,
한 남자가 Film Kim 사무실을 찾아왔다.
“오래간만에 뵙네요, 킴. 아니, 이젠 감독님이라 불러야 하나요? 하하하.”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는 남자.
앞선 영화 <스페이스 워즈>를 촬영하면서 인연을 맺게 된 영화배우 윌리엄 포드였다.
윌리엄 포드.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배우답게 그의 필모(filmography)는 무척이나 화려했다.
<스페이스 워즈>, <레이더스>를 시작으로 <패트리어트 게임>, <도망자>, <에어 포스 원>에 이르기까지 그는 무려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배우 생활을 이어가며 그야말로 ‘할리우드의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리게 된다.
흥행 면에서도 북미 누적 랭킹 2위를 기록한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흥행 보증수표라 할 수 있는 배우였다.
물론 이는 아직까지는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이기는 했지만.
‘정말이지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군. 할리우드의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리는 대배우가 지금 내 눈앞에서 웃고 있다는 사실이 말이야.’
스크린을 통해서만 봐왔던 할리우드 명배우들의 초창기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
이는 전생 이후 내가 누릴 수 있는 또 한 가지 즐거움 가운데 하나였다.
“와주셨군요, 포드 씨.”
“듣자니 감독님께서 저를 이번 영화에 주연으로 추천하셨다고 하더군요.”
“앞선 <스페이스 워즈> 촬영 때, 내가 포드 씨의 연기를 무척이나 인상 깊게 본 덕분입니다. 그래서 이번 역할도 분명 훌륭하게 해내실 것이라 믿고 있고요.”
“믿고 맡겨 주시면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감독님.”
“어떻게, 캐릭터 연구는 충분히 하셨습니까?”
“감독님께서 보내주신 시나리오와 자료들을 바탕으로 열심히 준비하긴 했습니다. 마음에 드실런지는 모르겠지만요.”
“하하,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앞으로 영화를 촬영하면서 함께 의논하고 채워나가면 될 일입니다. 그러니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감독님.”
“자, 그럼 일단 카메라 테스트부터 한번 해보도록 하죠.”
***
윌리엄 포드의 <레이더스> 출연은 불과 몇 번의 카메라 테스트만으로 곧바로 결정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뿔테 안경을 깊게 눌러쓴 지적인 대학 교수.
하지만 유적지에만 도착하면 중절모와 채찍을 손에 든 모험가의 모습으로 180도로 돌변하는 주인공 인디아나 존슨의 모습을 그가 너무나도 완벽하게 소화해 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톰 핸슨이 이 영화에 출연하기를 기대했던 조지 루이스도 자신의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심 아쉬운 마음이 가시지 않는지, 그는 영화 제작 준비 기간 내내 틈만 나면 나에게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다른 건 다 좋은데 톰 핸슨의 그 멋드러진 콧수염은 조금 아쉽기는 하군.”
그런 조지 루이스를 향해 내가 농담처럼 말했다.
“그럼 어떻게, 분장팀에게 이야기해서 가짜 콧수염이라도 붙여요?”
“아니 뭐,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고.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두고 봐요, 조지. 이번 영화의 주인공에 윌리엄 포드를 캐스팅한 것은 정말 잘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나중에 꼭 들게 될 테니까요.”
“그럴까?”
“그럼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번 역할에 엄청난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에요. 출연이 결정된 이후 그는 우리 사무실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며 저나 스태프들과 함께 영화에 관한 의논을 하고 있으니까요. 오히려 제가 피곤해서 그를 피해 다닐 정도로요.”
“흐음.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고.”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조지 루이스.
물론 그의 선택 또한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의 의견대로 톰 핸슨이 이번 영화의 주인공 역을 맡았어도 그는 이 배역을 훌륭히 연기했을 것이다.
영화 또한 큰 성공을 했을 것이고.
‘단지 주인공인 인디아나 존슨 박사의 얼굴에 커다란 콧수염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점만 달라졌을 뿐이겠지.’
37.
대략 3개월에 걸친 <레이더스> 촬영 준비가 모두 끝이 났다.
이제 남은 것은 본격적인 영화 촬영을 진행하는 일이었다.
앞서도 말했다시피,
나는 이번 영화 <레이더스>를 제작하면서 두 가지 계획을 세웠다.
하나는 전생에서 내가 본 그대로 이 영화를 재현하는 것이었다.
이에 나는 조지 루이스와 더불어 실제 이 영화의 각본가였던 두 사람을 영입했고, 이 세 사람을 주축으로 각본 제작을 했다.
물론 내가 가진 전생의 기억 덕분에 이 작업은 시행착오 없이 한결 빠르게 진행될 수 있었고.
또 한 가지는 프로덕션 기간을 최대한 단축하는 것, 쉽게 말해 최대한 빨리 영화 촬영을 끝마치는 것이었다.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감독 유형은 딱 두 가지이다.
하나는 흥행에 성공할 만한 영화를 만드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최대한 빠른 기간 내에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사실 영화감독 가운데 계획했던 기간 내에 촬영을 끝마치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영화 촬영 현장은 많은 변수가 발생하게 마련이고, 더불어 더 좋은 그림을 뽑아내려는 감독의 욕심에 여러 번의 재촬영 과정을 거치다 보면, 예정했던 촬영 기간을 훌쩍 넘기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영화의 경우는 다르지. 이번 <레이더스>라는 영화를 통해 나는 연출 능력뿐만이 아니라 그 어떤 감독보다 빨리 영화를 제작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할리우드의 모든 영화 관계자들에게 보여주기로 마음을 먹었으니까.’
흥행에 성공할 만한 고퀄리티의 영화를, 그것도 아주 빠른 시간에 만들어내는 영화감독.
이 정도면 할리우드의 모든 영화 제작자들이 탐을 낼 수밖에 없는 완벽한 영화감독의 조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것이,
영화감독으로서 앞으로 나를 대표하는 브랜드가 될 것이다.
“3개월?”
조지 루이스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향해 말했다.
“정말 이번 영화의 촬영을 3개월 만에 끝낼 계획이야?”
“예, 조지. 잘하면 그보다 더 단축될 수도 있고요.”
통상 영화 제작 기간은 1년 이상이 소요된다.
이 가운데 프로덕션, 다시 말해 실제 촬영 기간은 평균 4개월에서 6개월 정도가 소요된다.
그런데.
내가 불과 3개월 만에 모든 영화 촬영을 끝낼 계획이라고 이야기를 하니, 조지 루이스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것도 엄청난 제작비가 투입된 블록버스터급 영화를 말이다.
“프리 프로덕션 3개월, 프로덕션 3개월, 포스트 프로덕션 3개월 도합 9개월 안에 모든 영화 제작을 끝마치고 연말에는 무조건 영화를 극장에서 상영하는 것이 제 목표예요. 극장가의 성수기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연말의 크리스마스 시즌이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킴. 이건 막대한 제작비가 투입된 대규모의 영화야. 지난번에 킴이 제작한 <체이스 오브 리벤지>라는 영화랑은 차원이 다르다고.”
“제작 기간을 단축하기에는 전작보다 이번 작품이 훨씬 더 나은 조건일 수도 있죠. 이번 영화는 CG작업과 같은 후반 작업이 많이 필요 없는 영화인만큼 포스트 프로덕션 기간을 더 줄일 수 있을 테니까요.”
내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켜보세요, 조지. 내가 이 영화의 촬영을 3개월 만에 끝낼 수 있는지 없는지. 이번 크리스마스 시즌에 우리 영화 간판이 전국 극장가에 걸릴 수 있는지 없는지를 말이에요, 흐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