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머리 감독의 할리우드 정복기-20화 (20/145)

# 20 < 전설의 모험 영화 <레이더스> (3) >

31.

유니온 픽처스.

미국의 영화 제작사 겸 배급사인 이 회사는 최근 급성장하고 있는 신예 회사 가운데 하나였다.

물론 아직은 오랜 기간 할리우드 영화계를 주름잡아온 빅식스(Big Six) 영화사에 비길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름 풍부한 자금력과 인프라를 바탕으로 뚜렷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다.

특히 최근에는 내가 만든 <체이스 오브 리벤지>의 국내외 보급을 맡아 큰 흥행 성과를 올리면서 안팎으로 주목을 받고 있었다.

“엇! 감독님께서 연락도 없이 여긴 어쩐 일로......”

사무실로 들어서는 나를 본 피터 로빈슨 상무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괜찮으시면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세요?”

“물론이죠.”

피터 로빈슨이 자신의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한잔을 사이에 두고 우리 두 사람이 대화를 시작했다.

“제가 상무님께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말씀하십시오.”

“이번에 제가 새로운 영화를 다시 한 편 제작할 생각인데, 아직 적당한 투자자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혹시 가능하다면 이번 영화에 유니온 픽처스의 투자를 받을 수 있을까 해서요.”

“감독님이 만드는 영화라면 우리 회사에서도 적극적으로 투자할 의향이 있습니다. 감독님의 실력이야 이미 앞선 <체이스 오브 리벤지>를 통해서 충분히 확인됐으니까요.”

“별말씀을요.”

“혹시 어떤 영화인지 설명을 좀 들어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일단 시나리오부터 먼저 드리겠습니다.”

내가 영화 <레이더스>의 시나리오를 피터 로빈슨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번 영화의 장르는 어드밴처입니다.”

“흠, 모험 영화라면 일단 대중성은 어느 정도 확보하고 들어갈 수 있겠군요.”

“물론입니다. 특히 이 영화는 미국인들의 가슴 속 깊숙이 자리 잡고있는 서부 개척 시대의 낭만을 자극할 수 있는 영화로......”

내가 영화 <레이더스>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사실 이 영화를 나만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도 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전생에서 이 영화의 완성본을 본 사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이 영화가 실제로 어떻게 영상으로 구현될지를 완벽하게 알고 있었고, 그 덕분에 설명을 듣는 피터 로빈슨은 마치 눈앞에서 실제 영화 한 편을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되었다.

“호오, 감독님의 설명대로라면 꽤 괜찮은 영화가 나올 듯하군요.”

“물론입니다. 전작도 그렇지만 이번 영화도 제가 최선을 다해 한번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문제는 투자 결정을 저 혼자만 내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럴 테지요.”

“아, 차라리 감독님께서 직접 우리 사장님을 한번 만나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사장님을요?”

“예. 그렇지 않아도 우리 사장님이 감독님의 영화 <체이스 오브 리벤지>를 무척 감명 깊게 보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언제 한번 같이 식사라도 했으면 하시더라고요.”

유니온 벤처스 사장이라......

일전에 피터 로빈슨이 유대인이 사장이라고 했었지, 아마.

“뭐, 사장님만 괜찮으시다면 저야 상관없습니다. 제 입장에서도 직접 만나 뵙고 영화에 대한 설명을 드리는 편이 훨씬 더 나을 테니까요.”

“그럼 잠시만 여기 계십시오. 제가 곧바로 사장님을 만나 뵙고 오겠습니다.”

***

할리우드 인근의 고급 식당.

내가 단정하게 옷차림을 갖춘 금발 여성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성의 정체는 영화사 ‘유니온 픽처스’의 사장 레이철 도나였다.

‘영화사 사장이라고 해서 나이 든 중년의 남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 밖이군. 여성이, 그것도 아주 젊은 여성이 유니온 픽처스의 사장이었다니 말이야.’

아마도 돈 꽤나 있는 유대인 집안의 딸인 듯했다.

저 나이에 이 정도 규모의 영화사를 소유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제임스 킴 감독님이라고 하셨던가요?”

“예.”

“감독님이 만든 영화 <체이스 오브 리벤지>는 무척 인상 깊게 봤습니다. 영화 내용이나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제가 놀랐던 건 화면 구성이나 촬영 테크닉이었습니다. 기존의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는 다양한 촬영 기법들이 영화에 사용되었더군요.”

“과찬이십니다.”

“아참, 영화와 관련해서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었는데, 감독님을 만난 김에 여쭤봐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영화 후반부 주인공 이든의 복수 장면에 나왔던 촬영 기법, 핸드헬드 기법 맞죠?”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안정감 있게 촬영이 가능했던 거죠? 핸드헬드 기법은 불안정한 화면 흔들림 때문에 대부분의 감독들이 사용을 꺼려하는 방법인데......”

“자체 개발한 스테디 캠이라는 영상 장비를 활용했습니다. 이 장비를 이용하면 화면 흔들림을 최소화해서 안정적인 핸드헬드 촬영이 가능해지거든요.”

“호오, 그럼 그 스테디 캠이라는 장비는 감독님이 직접 개발하신 건가요?”

“그렇습니다.”

“참 대단하시네요, 감독님은.”

“뭘요. 그나저나 사장님은 영화에 대한 조예가 상당히 깊으신 것 같습니다.”

“제가 그래도 명색이 영화 제작사 사장이잖아요, 호호. 게다가......”

레이첼이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은 저도 한때 영화감독을 꿈꾸었던 사람이랍니다.”

“사장님이요?”

“네. 비록 재능이 없어서 그만두기는 했지만요.”

“재능 문제가 아니라 경험 문제겠지요.”

“경험요?”

“예. 사실 이 바닥에서는 경험만큼 중요한 것도 또 없습니다. 실제 촬영 현장에서는 대학이나 책을 통해서는 절대 배울 수 없는 다양한 변수들이 수시로 생기거든요.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장에서 겪은 다양한 경험들이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사장님은 아직 나이가 많이 어려 보이시네요. 그러니 만약 앞선 영화 촬영 시도에서 어려움이 있었다면, 그건 아마도 재능 문제가 아닌 경험 문제일 것이 분명합니다.”

“호호호.”

레이첼이 갑자기 배를 잡고 웃어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감독님이 그런 말을 하니 정말 웃기네요.”

“예?”

“그거 아세요? 감독님이랑 저랑 동갑이라는 거. 그런데 감독님이 나이 든 사람이나 할 법한 말을 하는 것이 너무 안 어울려서 저도 모르게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어요.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릴게요.”

아차차. 또 실수했군.

전생 이후 몇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가끔 망각하곤 한다.

내 나이가 환갑이 넘은 노년이 아니라 20대 중반이라는 것을.

“그나저나......”

레이첼이 나를 향해 말했다.

“새로운 영화를 기획하고 계신다고요?”

“그렇습니다. 아, 참고로 이번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사람은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입니다. 연출만 제가 맡을 예정이고요.”

“누구죠? 시나리오를 쓰신 분이?”

“아마 사장님도 잘 아실 것입니다. 조지 루이스라고, <스페이스 워즈>를 만드신 감독님입니다.”

“조지 루이스요?”

레이첼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 할리우드에서 영화 <스페이스 워즈>를 만든 조지 루이스 감독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로 명성 있는 감독이라면 메이저 영화사에서 얼마든지 투자를 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굳이 우리 영화사를......”

“다른 영화사가 다들 투자를 꺼려서요. 그건 그만큼 이번 영화가 여러 가지 위험 요소를 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위험 요소요?”

“예. 물론 그건 앞서 투자 의뢰를 받은 영화사들의 판단일 뿐입니다. 반면 저나 조지 루이스 감독은 이번 영화가 흥행에 성공할 것을 확신하고 있고요.”

“흐음.”

“일단 영화의 내용이나 촬영 방향에 대해서 먼저 설명 드리겠습니다. 이번 영화는......”

내가 레이첼에게 <레이더스>가 어떤 영화인지, 어떤 방향으로 촬영이 이루어질 것인지에 대해 설명했다.

한동안 내 설명을 듣고 있던 레이첼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감독님의 설명을 듣고 나니 왜 다른 투자사들이 투자를 꺼리는지를 알 것도 같네요.”

“예?”

“영화의 기본 구성이 고전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오래된 방식을 모방하고 있어서요. 이런 류(類)의 영화는 이곳 할리우드에서는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거든요.”

사실 나는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조지 루이스의 말을 들었을 때도 그렇고, 지금 레이첼의 말을 들었을 때도 그렇고 왜 고전 시리얼 방식의 영화가 현재 할리우드 영화판에서 환영받지 못하는지를.

아마도 내가 전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정서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인 듯했다.

하지만.

‘이거 한 가지는 확실해. 할리우드 관계자의 우려와는 달리 이 <레이더스>라는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흥행 성적을 올리며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으로 기록되다는 것을. 특히 오락 영화로는 드물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많은 부문의 수상을 하게 된다는 것을 말이야.’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감독님.”

레이첼이 나를 향해 말했다.

“저도 감독님이 계획하고 있는 이 영화에 대한 성공 여부는 확신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앞서 감독님이 만나보신 할리우드의 다른 영화사들의 견해나 저의 견해나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아요.”

“그렇습니까?”

“하지만 너무 실망하지는 마세요. 저는 영화의 투자를 결정할 때 또 한 가지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감독이 가진 능력이에요. 감독의 능력에 따라 같은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도 천차만별로 달라지게 되니까요.”

“......”

“<스페이스 워즈>의 조지 루이스, <체이스 오브 리벤지>의 제임스 킴. 희대의 두 감독이 서로 손을 잡고 만든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이 영화에 충분히 투자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설사 영화의 흥행 성적이 기대만큼 좋지 않아 투자한 돈을 모두 날린다고 하더라도 이는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요.”

“그렇게 생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장님.”

“대신에......”

레이첼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도 장사꾼인 만큼 믿을 만한 보험 하나쯤은 있어야지 않겠어요?”

“보험이요?”

“네. 제가 만약 이 <레이더스>라는 영화에 투자를 하면, 감독님도 하나 약속을 해주셔야 해요.”

“어떤 약속입니까?”

“감독님의 영화 <체이스 오브 리벤지>의 속편 제작은 반드시 우리 회사의 투자를 받아 촬영하겠다는 약속 말이에요.”

“그거라면 저도 환영할 만한 일이지요. 그렇지 않아도 제가 <레이더스> 다음 영화로 <체이스 오브 리벤지> 2탄을 제작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이건 순전히 제 생각인데......”

레이첼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속편은 전편보다 훨씬 대규모의 자동차 추격씬이 들어갔으면 좋겠어요. 등장하는 차량의 종류도 훨씬 다양하게 해서 말이죠. 자동차 추격 영화하면 사람들의 머릿속에 곧장 <체이스 오브 리벤지>가 떠오르도록요.”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제 실무적인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구체적인 투자 금액과 방법 등에 대해서 말이에요.”

“예, 사장님.”

***

유니온 픽처스 사장 레이첼 도나와의 만남을 통해 나는 영화 <레이더스>의 촬영 계획을 보다 구체화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영화 제작비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었다.

유니온 픽처스가 이번 영화에 투자하기로 한 금액은 총 2천만 달러.

이는 앞선 <스페이스 워즈> 촬영 때 투입된 제작비의 두 배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하지만 이는 할리우드 영화계의 추세이기도 했다.

최근 들어 할리우드 영화계는 대규모의 예산이 소요되는 블록버스터급 영화 제작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였고, 결국 이런 자금력의 차이가 할리우드 영화와 다른 영화를 차별 짓는 중요한 요소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산업의 거대화와 조직화,

이는 할리우드 영화계가 전 세계 영화산업을 주도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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