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 새로운 파트너, 그리고 흥행 신화 (3) >
26.
홍콩 국제 공항.
비행기 한 대가 미끄러지듯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은 감독인 나와 주연 배우인 베니 스콧과 루브론, 그리고 몇 명의 영화사 관계자들이었다.
우리가 홍콩을 찾은 이유는 간단했다.
현재 홍콩에서는 영화 <체이스 오브 리벤지>가 절찬리에 상영되고 있었고, 이에 현지 언론과 관객들의 빗발치는 요청에 따라 우리가 직접 이곳을 방문한 것이었다.
일종의 팬 서비스 내지는 감사 인사라고 할 수 있었다.
우리가 공항에 모습을 드러내기가 무섭게,
- 번쩍! 번쩍!
- 찰칵! 찰칵!
수많은 취재진의 카메라 세례가 터져 나왔다.
- 와아아아!
- 꺄아아악!
미리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던 팬들의 격한 환영의 함성도 줄을 잇고 있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체이스 오브 리벤지>가 홍콩에서 얼마나 큰 성공을 거두었는지, 주연 배우인 베니 스콧과 루브론이 홍콩 현지인들에게 얼마나 큰 인기를 얻고 있는지를 몸소 실감할 수 있었다.
“어휴, 이게 정말 꿈인지 생시인지......”
공항 앞에 세워진 차에 오르며 루브론이 나를 향해 말했다.
팬들의 격한 환영을 온몸으로 받은 탓인지, 그의 머리와 옷은 출발할 때와는 달리 상당히 흐트러져 있었다.
“킴. 저기 저 사람들 정말 우릴 보기 위해 나온 거 맞지?”
“당연하지. 아마도 저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루브론 네 얼굴을 보러 온 사람일 거야. 요즘 주인공인 베니 스콧 못지않게 루브론 너의 인기도 상당하니까.”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되어 있더란 말이 실감이 나는군. 그나저나 나에게도 이런 날이 오다니, 도무지 믿기지가 않네.”
루브론이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오랫동안 단역을 전전하던 무명 배우인 그에게는 팬들의 이런 환대가 무척이나 신기하게 느껴지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했다.
“저기, 감독님.”
맞은 편에 앉아 있던 베니 스콧이 나에게 말했다.
“혹시 홍콩에 와 보신 적 있으십니까?”
있지.
전생에서 영화 촬영차 홍콩에 꽤 오랜 머물렀던 적이.
“예전에 한번 와 보기는 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십니까?”
“아시아의 작은 도시 국가라고 해서 굉장히 낙후된 곳일 줄 알았는데 예상 밖이라서요. 특히나 영화에 관한 관심과 수요가 이 정도로 높은 곳일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꽤 놀랐네요.”
홍콩의 영화 산업은 영국의 식민지 시절인 1900년대 초부터 시작됐다.
이후 꾸준한 성장을 계속해오던 홍콩의 영화 산업은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 아시아 영화 산업의 견인차 역할을 할 정도로 눈부신 발전을 이루게 된다.
<체이스 오브 리벤지>의 배급을 맡은 ‘유니온 픽처스’가 영화 상영지로 가장 먼저 홍콩을 지목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홍콩 영화 시장에서의 성공은 아시아 전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이자, 유럽을 넘어 내 영화를 외면했던 북미 시장의 관심을 끌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구 영화 산업의 중심지가 할리우드라면 동양 영화 산업의 중심지는 바로 이곳 홍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 조만간 이곳 홍콩 영화는 할리우드 영화 못지않게 큰 인기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전생의 경험을 토대로 한 말이었다.
내 기억에 따르면 다가올 1980년대는 홍콩 느와르 영화의 전성기였다.
이 시기 제작된 많은 영화는 특히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급 영화 못지않은 큰 인기를 누리게 된다.
그래서 결심했다.
‘기왕 홍콩에 온 김에 조만간 아시아 영화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될 대작 영화에 미리 투자를 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 앞으로 나는 영화사 Film Kim을 할리우드를 넘어 전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진 회사로 성장시킬 계획이니까.’
“두 사람은......”
내가 베니 스콧과 루브론을 향해 말했다.
“미리 알려드린 대로 정해진 일정을 소화하면 됩니다. ‘유니온 픽처스’ 직원들이 동행하며 안내할 예정이니, 아마 큰 어려움은 없을 겁니다.”
“감독님은요?”
“저는 홍콩 영화사 쪽과 미팅이 예정되어 있어서요. 아마 모레 출발할 때쯤이나 다시 얼굴을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알겠습니다.”
“홍콩 현지 팬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어떤 자리를 가든 성실하게 인터뷰에 임하도록 하세요. 우리 영화가 이만큼 큰 성공을 거두게 된 것은 모두 영화를 보러와 준 관객들 덕분이니까요.”
관객의 소중함.
이번 생에서 새삼 다시 깨닫게 된 사실 가운데 하나였다.
***
<체이스 오브 리벤지>의 주연인 베니 스콧과 루브론 두 사람이 언론 인터뷰, 무대 인사, 방송 출연 등의 일정을 소화하는 사이.
나는 홍콩의 한 유명 호텔에서 현지 영화사 관계자를 만나고 있었다.
“영화 판권을 구입하고 싶으시다고요?”
내 맞은편에 앉은 여성이 나를 향해 물었다.
미셸 예(Michelle Ye).
홍콩 현지 영화사인 ‘시네마 시티(Cinema City)’사의 직원이었다.
“그렇습니다.”
“혹시 감독님께서는 홍콩 영화를 리메이크할 계획을 가지고 계신 건가요?”
“예. 예전에 제가 무척 감명 깊게 본 홍콩 영화가 하나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감독이 된 지금 그 영화를 다시 한번 각색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현대적인 기술과 감각을 가미해말이죠.”
“흠, 할리우드 쪽에서 우리 홍콩 영화에 관심을 가져주는 건 우리로서는 매우 환영할 만한 일이지요. 그래서 그 영화 제목이 뭔가요? 감독님께서 감명 깊게 봤다는 그 영화 말이에요.”
미셸 예의 물음에 내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입니다.”
“스토리...... 뭐라고요?”
“요. 용강 감독의 1967년 작 영화이지요. 혹시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글쎄요......”
미셸 예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꽤 오래 영화 관련 일을 해온 그녀였지만, 이런 영화 제목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겠지. 이 영화는 만들어진 지 십 년도 더 된 흑백 영화이니까. 더군다나 개봉 당시 흥행 성적도 썩 좋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용강 감독의 이 영화가 아시아 전역에 걸쳐 그야말로 홍콩 영화 붐을 불러일으킨 <영웅삼색(英雄三色)>이라는 영화의 원작이라는 것이었다.
<영웅삼색>은 1980년대 홍콩 느와르 영화를 대표하는 유명 영화로 오웬삼 감독이 만든 작품이다.
당시 무명 감독이었던 오웬삼은 이 영화로 ‘홍콩 느와르’라는 새로운 영화 장르를 개척하며 일약 스타 감독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특히 이 영화는 아시아 전역에 걸쳐 엄청난 인기를 누리게 되는데, 당시 누적 관람료 수익만 5천만 달러에 육박했다고 하니, 이 영화가 얼마나 큰 인기를 누렸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앞으로 최소 10년간의 그야말로 홍콩 영화의 전성시대가 열리게 되지. 전생에서 나도 한때 이 홍콩 느와르 영화에 푹 빠져 지냈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그랬다.
나는 지금 <영웅삼색>을 필두로 1980년대 홍콩 영화 시장의 전성기를 이끌어갈 많은 영화를 선점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추후 이 영화들이 가져올 막대한 흥행 수익과 명성이 모두 우리 Film Kim의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잘 모르시는 영화인가 보군요.”
“네. 제 머릿속에서 바로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니, 크게 흥행한 영화는 아닌 듯하네요.”
“아마 그럴 것입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주로 무협 영화가 대중들로부터 큰 인기를 끌던 시기였으니까요.”
“일단 회사 측과 한번 상의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판권을 가지고 있는 영화가 맞는지도 확인해봐야 하고요.”
“알겠습니다. 제가 지금 묵고 있는 호텔의 연락처를 드릴 테니, 한번 확인해보시고 연락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감독님. 빠른 시간 내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
미셸 예(Michelle Ye)로부터 다시 연락이 온 것은 예정된 홍콩 일정 마지막 날이었다.
그녀와 나는 전에 만난 호텔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감독님께서 말씀하신 그 영화......”
내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미셸 예가 본론부터 꺼내 들었다.
“우리 회사가 판권을 가지고 있는 영화가 맞더군요.”
“그것 참 다행이군요.”
“그런데 문제가 좀 있습니다.”
“문제요?”
“예. 현재 우리 영화사가 재정 문제로 골든 하베스트사와 합병을 준비하고 있는데, 그 때문에 특정 영화의 판권을 따로 파는 것이 현재로서는 좀 힘들 것 같습니다. 감독님께서 꼭 그 영화의 판권을 구입하고 싶다면 회사의 매각이 완료된 이후에나 다시 이 문제를 논의해야 할 듯하네요.”
“흐음.”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영웅삼색>의 원작인 용강 감독의 영화는 그리 유명하지 않은 영화이기에 판권을 구입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회사 매각 문제가 걸림돌이 되다니.
“저기, 미셸 양.”
“네.”
“혹시 회사 매각 문제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지도 알 수 있을까요?”
“아직 양측 모두 구체적인 협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최근 우리 회사가 재정난으로 매각 의사를 밝히자, 골든 하베스트사에서 관심을 보이고 있는 정도입니다.”
“그 말은 조건만 맞으면 굳이 골든 하베스트사가 아니라도 회사를 매각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군요.”
“아마도요. 그런데 갑자기 그 문제는 왜......”
미셸 예가 살짝 놀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설마 감독님께서 우리 회사를 인수할 생각을 가지고 계신 건 아니겠죠?”
“조건만 맞는다면 그럴 생각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운영하는 영화사가 머잖아 홍콩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으로도 진출할 계획을 가지고 있거든요.”
“네? 그게 정말이세요?”
“예. 그래서 혹시 가능하다면 제가 그쪽 회사 사장님을 좀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제가 사장님을 직접 만나 뵙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좀 나누었으면 하는데.”
“그, 그럼 일단 제가 사장님께 한 번 연락해보도록 할게요.”
호텔 한 켠에 설치된 공중전화를 향해 허겁지겁 달려가는 미셸 예.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내가 생각했다.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군.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앞으로 향후 10년간은 그야말로 홍콩 영화의 전성기가 찾아올 것이고, 이 흐름을 잘만 이용하면 할리우드뿐만 아니라 아시아 지역의 영화 시장에서도 엄청난 수익을 올릴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그러니 홍콩 현지에 우리 회사 지점 하나 정도는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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