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머리 감독의 할리우드 정복기-15화 (15/145)

# 15 < 새로운 파트너, 그리고 흥행 신화 (1) >

내가 조지 루이스를 향해 물었다.

“어떻게요? 어떻게 하면 동양인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배급사들을 설득해 <체이스 오브 리벤지>를 극장에서 상영할 수가 있어요?”

“음, 이건 내 생각이 아니라, 제작사 측에서 제시한 의견인데 ......”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조지 루이스.

눈치를 보아하니 뭔가 껄끄러운 대답을 내놓아야만 하는 상황임이 분명해보였다.

“괜찮으니까 얼른 말해봐요, 조지.”

“그게......”

망설이던 조지 루이스가 결국 입을 열었다.

“배급사 측에서 감독인 킴의 이름을 영화 포스터와 엔딩 크레딧에서 빼면 영화를 상영할 극장을 알아봐 주겠다고 약속했어.”

“감독인 제 이름을 영화에서 뺀다고요?”

“그래. 킴의 이름 대신 제작사인 우리 ‘루이스 필름’을 전면에 내세워야 한다는 것이 그들이 내건 조건이야. 동양인인 킴이 이 영화의 메가폰을 잡았다는 것을 숨기려는 의도이지. 거기다 앞서 흥행에 성공한 <스페이스 워즈>의 반사 이익도 덤으로 얻을 수 있어 흥행에 훨씬 유리할 테니까 말이야.”

“......”

“미안해, 킴. 나도 영화감독의 한 사람으로서 자신이 만든 영화에 자신의 이름을 걸 수 없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잘 알고 있으니까.”

“조지가 저한테 미안해할 일은 아닌 것 같네요. 이건 어디까지나 배급사 쪽에서 내건 조건이니까. 게다가 평소 조지가 저를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지는 다른 누구보다 제가 더 잘 알고 있으니까요.”

예상은 했지만,

할리우드의 벽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았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순히 ‘좋은 영화’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좋은 영화에는 ‘백인이 만든’이라는 조건이 달려 있었던 것이다.

“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도 알아. 하지만 상황을 좀 냉철하게 바라볼 필요도 있을 것 같아. 지금 영화 시장에서 배급사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는 킴도 잘 알고 있잖아. 실제 그들이 얼마만큼의 상영관을 내어주느냐에 따라서 영화의 성공과 실패 여부가 갈라지기도 하니까 말이야.”

“......”

“그나마 이 정도 조건도 내가 직접 배급사 사장을 만나 설득했기 때문에 얻어낼 수 있었어. 만약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예를 들어 킴이 직접 찾아가서 이런 말을 했다면 그들은 킴의 말을 아예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을 거야. 어느 비평가의 말처럼 이곳 할리우드는 ‘백인 남성’ 위주로 움직여가는 곳이니까 말이야.”

맞는 말이었다.

앞서 전 세계적인 흥행을 기록한 <스페이스 워즈>를 만든 조지 루이스의 적극적인 추천이 있었기 때문에 할리우드의 영화 배급사들도 조건부 상영을 약속한 것이었다.

만약 조지 루이스가 아니라 내가 배급사를 찾아갔더라면 그들을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아니 아예 애초부터 나를 만나보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건가? 조지의 말대로 내 이름을 뺀 채로 극장에서 상영하는 수밖에 없는 건가?’

‘그래. 일단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자. 어차피 이 영화가 성공하면 감독인 나의 이름도 저절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될 테니까.’

내가 ‘어쩔 수 없네요, 조지. 조지의 말대로 하는 수밖에.’라고 대답을 하려는 찰나.

갑자기 내 머릿속에 일전에 아버지가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도훈이 너 내가 가장 기쁜 것이 뭔 줄 아냐? 수많은 백인이 극장에서 ‘킴’이라는 네 이름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자기들이 가장 잘난 인종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백인들이 네 이름이 걸린 영화를 보며 웃고 울고 한다는 생각을 하니, 아들이지만 도훈이 네가 무척 자랑스럽기 그지 없구나.”

동시에 나 자신과 했던 약속도 떠올랐다.

백인들의 나라인 이 미국을 영화로 정복하고 말겠다는 약속.

아니, 미국뿐만이 아니라 스크린이 있는 전 세계의 모든 나라를 내가 만든 영화로 정복하겠다는 약속 말이다.

그래서 결심했다.

절대로 저 오만한 백인들 앞에 무릎을 꿇지 않기로.

어차피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저들이 아니라 나니까.

‘두고 봐. 조만간 아쉬운 건 내가 아닌 그들이 될 테니까. 앞으로 내가 만든 영화들이 연달아 흥행에 성공하게 되면 그들이 직접 제 발로 나를 찾아와 영화의 배급을 맡겨달라고 애걸복걸하게 될 테니까.’

“미안하지만, 조지. 그 제안은 절대 받아들일 수가 없을 것 같아요.”

내가 조지 루이스를 향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체이스 오브 리벤지>는 제가 만든 첫 영화예요. 기획에서부터 제작에 이르기까지 제가 이 영화에 얼마나 많은 열정을 쏟아부었는지는 다른 누구보다 조지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거예요. 그래서 저는 더더욱 이 영화를 제 이름을 걸고 극장에서 상영해야겠어요.”

“킴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는 나도 충분히 이해하지만, 현실적으로 배급사를 통하지 않고서는 영화를 극장에서 상영할 방법이 없지 않나?”

내가 빙긋 웃으며 조지 루이스를 향해 말했다.

“꼭 미국일 필요는 없잖아요.”

“뭐?”

“<체이스 오브 리벤지>의 첫 상영을 꼭 미국에서 시작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요. 유럽이나 아시아에서 먼저 성공을 거둔 이후에 다시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상영된 영화도 얼마든지 많으니까요.”

“키, 킴.”

“미안한데 조지, 한 번만 더 부탁을 드릴게요.”

“무슨 부탁?”

“영화 해외 배급을 전문으로 하는 배급사를 저에게 좀 소개해주세요. 업체 규모는 상관없어요. 어차피 이번에 만든 제 영화는 대규모의 홍보나 프로모션 보다는 영화의 퀄리티,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관객들의 입소문으로 승부를 봐야 할 테니까요.”

“그러니까 지금 킴의 말은......”

조지 루이스가 다소 놀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체이스 오브 리벤지>를 먼저 해외에서 성공시켜서 미국의 배급사들로 하여금 제발로 킴을 찾아오게 만들겠다는 뜻이야?”

“네.”

“오 마이 갓, 킴. 정말로 오 마이 갓이다, 킴.”

조지 루이스가 혀를 내둘렀다.

“지난 <스페이스 워즈> 촬영 때부터 느낀 거지만, 정말이지 킴 너는 여간내기가 아니야. 가끔 사람을 아주 깜짝깜짝 놀라게 한다고.”

“도와주실 거죠, 조지?”

“그래. 일단은 내가 한 번 더 힘을 써보도록 할게.”

“고마워요, 조지.”

“뭘, 이건 내 일이기도 한 데. 잊지 않았겠지? 자네가 만든 영화 <체이스 오브 리벤지>의 지분 2/3는 내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야, 하하하.”

“하하, 물론이죠.”

내가 다시 물었다.

“그나저나 조지, 새 작품 시나리오는 어느 정도 구상하셨어요?”

“아직은 이렇다 할 성과가 없어. 계속 이것저것 써보고 있기는 한데, 영 마음에 드는 소재가 없네.”

내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모험 활극을 한번 써보는 건 어때요?”

“모험 활극?”

“네. 사실 많은 미국인의 가슴 속에는 모험과 낭만이 가득했던 서부 개척 시대에 대한 환상이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잖아요? 바로 그 정서를 자극하는 거죠. 특히 숨겨진 보물을 찾아 떠나는 모험가를 주인공으로 해서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장면을 스크린에 담아내면 서부 개척 시대를 동경하는 미국인들의 정서와 묘하게 맞물리며 엄청난 흥행을 기록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봐, 킴.”

조지 루이스가 갑자기 나를 와락 껴안으며 소리쳤다.

“역시 넌 천재야, 천재! 방금 전 네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엄청난 아이디어 하나가 내 머릿속을 번뜩 스치고 지나갔어!”

“그, 그래요?”

“아 참,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잊어먹기 전에 얼른 작업실로 가서 머릿속에 떠오른 아이디어를 옮겨 적어야지.”

조지 루이스가 허둥지둥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런 그의 뒤에다 대고 내가 소리쳤다.

“해외 쪽 배급사 알아보는 거 잊으면 안 돼요, 조지.”

“알았어, 알았어.”

24.

영화 <체이스 오브 리벤지>의 촬영이 모두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Film Kim 사무실은 여전히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포스트 프로덕션, 다시 말해 영화 후반부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감독님, 음향 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됐는데, 확인 한번 해보시겠어요?”

“감독님. ILM(인더스트리얼 라이트 앤 매직)에서 연락이 왔는데, OC(광학 합성)작업이 마무리됐다고 합니다. 지금 바로 우리 직원 보내서 확인하고 찾아오라고 하겠습니다.”

“이거 엔딩 크레딧에 들어갈 명단인데, 최종적으로 감독님이 한번 확인해주세요.”

여전히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하루.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한 남자가 나를 찾아왔다.

“Excuse me. 여기가 Film Kim 사무실 맞죠? 제임스 킴 감독님을 좀 만나러 왔는데요.”

말쑥한 정장에 중절모까지 갖추어 쓴 남자.

그가 내민 명함을 통해 나는 그의 이름이 ‘피터 로빈슨’이며, 영화 배급사인 ‘유니온 픽쳐스’의 임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지의 부탁을 받고 오셨군요?”

나의 물음에 피터 로빈슨이 대답했다.

“예.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감독님. 루이스 씨가 감독님에 대한 칭찬을 어찌나 하던지 말이죠, 하하.”

“그럼 대충 이야기는 들으셨겠군요. 상황이 지금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요.”

“그렇습니다. 할리우드 대다수 배급사가 감독님의 이름으로 영화를 상영하기를 거부하고 있다더군요.”

“예.”

“그럴 만도 하지요. 이곳 할리우드는 예전부터 유색 인종에 대해 상당한 거부감을 가져왔으니까요. 그나저나 배급사들도 그렇지만 감독님도 참 대단하시군요.”

“예? 그게 무슨 뜻입니까?”

“대다수 무명 감독들은 그렇습니다. 메이저 배급사들 앞에 서면 남극이라도 좋으니 제발 영화를 상영하게만 해달라고 절절매거든요. 일단 메이저 배급사를 통하기만 하면 영화의 흥행은 어느 정도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그들이 가진 인프라와 홍보 능력이면 졸작도 명작으로 만들 수 있을 정도니까요, 하하.”

피터 로빈슨이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런데 감독님은 그 황금 동아줄을 제 발로 차 버리고 스스로 어려운 길을 자청하고 있으니, 어떻게 제가 대단하다는 표현을 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들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을 하니까요. 감독이 자기가 만든 영화에 이름을 걸 수 없다는 것은 자기가 낳은 자식을 버리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호오, 감독님은 자신의 영화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상당하신 모양이군요.”

“그건 저뿐만이 아니라 모든 영화감독이 다 그럴 것입니다. 그나저나 ‘유니온 픽쳐스’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회사인데......”

“신생 회사라서 그럴 것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염려는 하지 마십시오. 유대계 회사인 만큼 기본적인 자금력이 매우 탄탄하고, 특히 해외 쪽 네트워크가 아주 잘 구축되어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할리우드 배급사로부터 홀대를 받는 감독님 같은 분의 작품을 그 어떤 회사보다 적극적으로 지원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과부 마음은 홀아비가 안다고 우리 회사 사장님이 유대계 미국인인지라, 인종 차별이라면 아주 치를 떠시거든요.”

“그럼......”

내가 피터 로빈슨을 향해 물었다.

“유니온 픽처스 쪽의 계획을 좀 듣고 싶군요. 제가 만약 유니온 픽처스와 계약을 하면 앞으로 우리 영화를 어떤 나라에 어떤 방법으로 배급할 계획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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