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 첫 영화 <체이스 오브 리벤지> (8) >
22.
내 첫 영화인 <체이스 오브 리벤지>의 흥행을 가져다줄 차별화 전략은 단순히 미래의 촬영 기술을 활용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 또 다른 요인은 바로,
독특한 개성을 가진 영화 캐릭터.
더불어 이 캐릭터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들이 캐스팅되었다는 것이었다.
전생에서 나는 국내외의 다양한 영화를 섭렵했다.
많은 개성파 배우들과 같이 직접 영화 작업을 하기도 했었다.
그 덕분에 나는 다양한 영화적 캐릭터를 경험할 수 있었고, 배우가 가진 잠재능력을 파악하고 그에 어울리는 배역을 찾아낼 수 있는 안목 또한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전생의 경험 덕분에 나는 이 시기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개성 있는 캐릭터를 만들어 내고, 이를 훌륭하게 소화해낼 수 있는 배우들까지 캐스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체이스 오브 리벤지>의 이러한 차별화된 캐릭터와 배우들의 연기는 영화 촬영 후반부부터 진행된 스튜디오(세트장) 촬영에서 보다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
<체이스 오브 리벤지> 영화 촬영장.
스태프들의 촬영 준비가 모두 끝나고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었다.
“17씬 촬영 시작합니다. 모두 스탠바이 하시고, 레디, 액션!”
메가폰을 타고 나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가 무섭게,
- 저벅, 저벅.
작렬하는 붉은 석양을 등진 채, 한 무리의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단연 악당 ‘티토’역을 맡고 있는 루브론이었다.
티토는 이 영화에서 주인공 이든만큼이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에 걸맞게 캐릭터의 설정 또한 매우 독특했다.
펑크족을 연상케 하는 기괴한 헤어 스타일과 옷차림.
몸 곳곳을 치렁치렁 장식하고 있는 액세서리들.
시크한 표정에 드리워진 냉소(冷笑).
보는 이로 하여금 왠지 모를 섬뜩함을 느끼게 하는 외모였다.
“캐릭터 설정이 아주 괜찮은데요?”
모니터를 통해 루브론의 연기를 지켜보고 있던 조감독이 감탄을 내뱉었다.
당연하지.
화려한 추격씬과 더불어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의 등장은 이 영화를 성공으로 이끌 중요한 무기가 될 테니까.
“그렇죠?”
“예. 주인공 이든 역을 맡은 베니가 미소년 같은 외모와는 상반된 터프함이 매력이라면, 티토 역을 맡은 루브론의 경우는 외모 전반에서 흘러나오는 음산함과 퇴폐적인 느낌이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아주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티토라는 캐릭터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보다 기존의 영화에서 묘사되던 악당의 틀을 완전히 벗어났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 때문에 티토의 악행을 보는 관객들의 공포는 이전의 그것보다 훨씬 더 심하게 되지요. 이점이 관객들로 하여금 티토라는 캐릭터에 충분히 매력을 느끼게 해줄 것입니다.”
“호오, 관객들로 하여금 매력을 느끼게 만드는 악당이라니. 기존의 영화에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는 아주 신선한 요소인 것 같습니다.”
“그렇죠.”
그 사이,
씬은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죽은 자신의 동생 테디의 복수를 위해,
악당 티토는 주인공 이든의 가족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켜보는 관객을 질리게 만들 정도의 광기(狂氣) 어린 눈빛으로.
“컷! 오케이, 아주 좋았어요.”
내가 연기를 끝마친 루브론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그제서야 루브론도 긴장을 풀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거봐, 내가 뭐랬어.
루브론 너한테는 악역이 훨씬 더 잘 어울린다니까, 흐흐.
***
오늘의 마지막 씬 촬영이 시작되었다.
주된 내용은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온 주인공 이든이 악당 티토의 손에 무참히 살해된 자신의 가족들을 목격하고 그에게 복수를 결심하는 장면이었다.
‘이 씬은 주인공인 이든이 선(善)과 악(惡)의 경계를 넘어서는 전환점이 되는 중요한 장면이지. 특히 베니 스콧의 절제된 감정 연기가 무엇보다 중요한 씬이야.’
전생의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초보 배우들이 흔히 하는 실수 중의 하나가 바로 슬픔이나 분노를 표현할 때, 너무 오바해서 연기를 한다는 것이었다.
오디션장에서 땅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한다거나, 스튜디오가 떠나갈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지켜보는 관계자들이 눈살을 찌푸리는 것도 모른 채로.
하지만 경험 많은 배우들의 경우는 확실히 달랐다.
그들은 눈빛과 몸짓, 하다못해 손끝의 미세한 떨림 하나에까지 자신의 감정을 싣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그 때문에 이를 지켜보는 관객들도 순식간에 배우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공유하게 된다.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액션 배우 베니 스콧. 하지만 그의 장점은 단순히 액션 장면을 훌륭히 소화해낸다는 것만이 아니야. 그의 필모(filmography) 가운데 하나인 <미드나잇 선샤인>에서 드러났듯이 베니 스콧은 감정 연기 또한 아주 명품인 배우이지.’
내가 베니 스콧을 내 첫 영화의 주인공으로 캐스팅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화려한 액션과 내면 연기, 이 두 가지를 모두 소화할 수 있는 배우가 바로 그였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그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한 것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내 예상은 정확히 들어 맞았다.
내가 메가폰을 잡고 ‘액션’을 외치기가 무섭게 순식간에 상황에 몰입한 그는 지켜보고 있던 스태프들이 모두 깜짝 놀랄 정도로 훌륭한 연기를 선보였던 것이다.
***
“좀 괜찮아졌어요, 베니?”
내가 따뜻한 커피 한잔을 베니 스콧에게 내밀었다.
커피잔을 받아드는 베니의 손이 여전히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슬픔과 분노로 점철된 방금 전의 촬영 상황에서 그는 아직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배우는 타인의 삶을 연기로 표현하는 사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촬영장에서만큼은 완벽하게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극 중에서 자신의 맡은 배역과 자신을 완전히 일치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촬영이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은 그 감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오늘처럼 심한 감정 연기가 필요한 경우는 더더욱 그러했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감독님이 손수 타 주신 커피 덕분에 이제 좀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군요.”
“그럼 다행이고요.”
“그나저나 영상은 좀 어떻습니까? 감독님이 기대한 대로 잘 나왔습니까?”
“음......”
내가 살짝 뜸을 들였다.
그러자 조바심이 난다는 표정으로 베니 스콧이 물었다.
“왜요, 감독님. 제 연기가 많이 부족했나요?”
“베니는 어떻게 생각해요, 방금 전 자신의 연기를.”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때부터 고민했습니다. 주인공 이든의 삶이 180도로 바뀌는 이 장면을 어떻게 하면 더욱 잘 표현할 수 있을까, 하고요. 그래서 내가 만약 이든과 똑같은 상황에 놓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해봤는데, 의외로 마음이 냉철해지는 기분이 들더군요. 그래서 격앙된 느낌보다는 절제된 감정으로 그의 슬픔과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 더욱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감정 그대로 연기를 한 것이고요.”
내가 엄지손가락을 올려 보이며 대답했다.
“정말 멋졌어요, 베니의 오늘 연기는.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요.”
“그게 정말입니까?”
“예. 나뿐만이 아니라 모니터를 지켜보고 있던 다른 스태프들도 연신 감탄을 내뱉더군요. 내가 베니를 이 영화에 캐스팅한 것은 정말이지 신의 한수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감독님.”
베니 스콧이 진심으로 나에게 감사를 표했다.
수십 번의 오디션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인정받지 못했던 그의 연기력이었다.
하지만 이는 결코 그가 능력이 모자란 배우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제대로 된 배역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다르지. 전생의 기억 덕분에 베니 스콧의 필모와 연기 스타일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나는 그에게 딱 맞는 배역과 캐릭터를 만들어 낼 수가 있었고, 그 덕분에 이 영화에서 그가 가진 능력을 십분, 아니 백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지.’
기존의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캐릭터.
그리고 이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배우들의 명품 연기.
이것이 나의 첫 영화 <체이스 오브 리벤지>를 다른 영화와 차별화하고, 더불어 엄청난 흥행을 가져다줄 최종 무기였다.
23.
1978년 봄.
장장 4개월 동안 진행된 영화 <체이스 오브 리벤지>의 촬영이 모두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포스트 프로덕션이라 불리는 영화 후반 작업이었다.
포스트 프로덕션에서는 영상 편집, 색 보정, 음악 내지는 음향 추가, 시각적 특수효과 등의 작업이 이루어진다.
이 작업이 모두 끝나면 비로소 극장 스크린을 통해 영화가 관객들에게 선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배급사를 찾는 일이었다.
영화 산업의 두 축은 크게 제작사와 배급사로 나뉜다.
시나리오를 기획하고 이를 영상으로 담아내는 것이 제작사의 역할이라면, 영화를 상영할 극장을 확보하고 영화를 유통시키는 것이 배급사의 역할이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영화 산업에서는 제작사보다 배급사의 영향력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제아무리 좋은 영화를 만들어도 개봉할 극장을 잡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영화 기획 단계에서부터 배급사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의 소울 메이트라고 할 수 있는 조지 루이스가 <체이스 오브 리벤지>의 배급을 맡을 곳을 찾으려고 부단한 노력을 했다.
하지만.
“면목이 없군, 킴.”
Film Kim 사무실을 찾아온 조지 루이스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향해 말했다.
보아하니 그는 아직도 <체이스 오브 리벤지>의 배급을 맡아줄 곳을 찾지 못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할리우드의 웬만한 배급사들은 다 킴이 만든 영화의 배급을 거절하는군. 내가 여러 차례 직접 방문해 설명하고 설득했는데도 말이야.”
“이유는 또 그건가요? 제가 동양인이라는 이유?”
“그래.”
당연한 일이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이곳 할리우드에는 유색인종 전용 화장실(colored waiting room)이 있을 정도로 인종 차별이 심했다.
전설적인 브루스 리(이소룡)의 영화가 이러한 차별을 극복하고 동양 문화를 전파하는데 큰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하얀 피부를 가진 백인들은 여전히 유색인종, 특히 그들이 옐로우 멍키(yellow monkey)라 부르는 동양인들에 대해 불편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 참 당황스럽군요, 조지. <체이스 오브 리벤지>는 이제 막 후반 작업에 들어갔고, 당장 몇 달 후면 영화가 완성될 예정인데......”
제길,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나?
좋은 영화를 만들기만 하면 흥행은 자연히 뒤따라올 것이라는 나의 기대는 모두 헛된 망상에 불과했나?
라는 생각이 든 것도 잠시.
조지 루이스가 대안을 하나 꺼내 놓았다.
“그래서 말인데, 킴. 이렇게 한번 해보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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