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 첫 영화 <체이스 오브 리벤지> (6) >
19.
또다시 몇 달간의 바쁜 시간이 흘러갔다.
그 대부분 시간은 연속된 회의들로 채워졌다.
제작팀 회의.
연출팀 회의.
촬영팀 회의.
미술팀 회의.
음향팀 회의.
여기에 간부급 스태프 회의까지.
그렇게 정리된 회의 결과는 모두 문서화 되어 감독 겸 제작자인 나에게 보고되었다.
사실 전생에서 내가 충무로 영화감독으로 있을 때는 프리 프로덕션 기간을 이만큼 길게 가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부분 촬영 현장에서 순간순간 떠오르는 아이디어로 앞선 프리 프로덕션 과정의 부족함을 메워나간다.
그러다 보니 현장에서 잦은 문제가 발생하곤 한다.
현장 편집은 관련 부서들이 순발력 있게 움직여 줄 때만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어느 한 부서라도 준비가 미비할 경우 당일 촬영 일정 전체가 삐걱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 예상했던 촬영 기간이 늘어나고 제작비도 덩달아 늘어날 수밖에 없다.
영화의 질 또한 그만큼 낮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하지만 할리우드의 영화 촬영 시스템은 확실히 다르군. 할리우드에서는 프리 프로덕션 기간 동안 완벽한 준비를 해 놓음으로써 다음 단계인 프로덕션 단계가 아주 빠르고 합리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일반적이야. 모니터링과 현장 편집이 거의 없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인 것이고.’
완벽한 프리 프로덕션 준비 과정.
이는 할리우드가 전 세계 영화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중요한 원동력 가운데 하나였다.
나 또한 이 할리우드 시스템을 따르기로 했고.
물론 필요한 경우 충무로 시스템의 장점도 접목하면서 말이다.
“감독님.”
내가 마지막 서류의 확인을 끝마쳤을 무렵, 이번 영화의 제작부장(PM)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시나리오 리딩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그래요?”
“예. 다들 회의실에 모여 감독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나리오 리딩.
영화에 출연하는 모든 배우가 한자리에 모여 각본을 읽는 자리로 사실상 프리 프로덕션의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리딩을 통해 시나리오를 최종 점검하고, 이를 바탕으로 일일 촬영 계획표가 만들어진다.
이 촬영 계획표에 따라 본격적인 현장 촬영(프로덕션)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럼 곧바로 회의실로 이동하죠.”
***
Film Kim 사무실 내의 가장 큰 공간인 대회의실.
영화 <체이스 오브 리벤지>의 출연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테이블의 가장 상석에 내가 자리하자, 곧바로 시나리오 리딩이 시작되었다.
“그럼 지금부터 영화 <체이스 오브 리벤지>의 시나리오 리딩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각 씬(scene)의 지문은 조연출인 제가 읽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럼 다들 집중해주세요.”
순간 회의실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오로지 대사로만 진행되는 시나리오 리딩이지만, 실제 촬영 현장이나 다름없는 진지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흐르는 정적을 깨고,
조감독이 첫 번째 씬의 지문을 읽기 시작했다.
“모래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는 라스베이거스 사막의 도로, 특수 개조 차량 한 대가 빠른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다. 차에 타고 있는 남자는 악당 티토의 동생인 테디(Teddy), 그는 지금 자신의 뒤를 쫓아오는 경찰차의 추적을 따돌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어지는 배우들의 대사들.
철저한 캐릭터 연구와 오랜 연습 기간 덕분에 그들의 대사는 실제를 방불케 할 정도로 사실감이 있었다.
시나리오 리딩을 지켜보며,
나는 실제 현장 촬영을 통해 만들어질 영화의 장면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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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아아아앙!
특수 개조된 V8기통 800마력의 차량.
빠른 속도로 도로를 질주하는 이 차량을 오토바이를 탄 경찰들이 뒤쫓고 있었다.
차량에 타고 있는 이가 전국적으로 지명 수배된 흉악범 테디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 콰광!
당하는 것은 오히려 경찰 쪽이었다.
테디가 경찰 오토바이를 들이받는 것도 모자라, 가지고 있던 장총으로 이들을 무자비하게 사살했기 때문이다.
같은 시각,
무전으로 경찰이 테디를 뒤쫓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주인공 이든은 순찰차에 올라 시동을 켠다.
물론 이 차도 평범한 차는 아니었다.
도시를 무법자처럼 질주하는 흉악한 폭주족들을 추격하기 위해 특별히 제작된 차량이다.
- 부아아앙!
모래바람을 휘날리며, 이든의 차량이 테디가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이든은 마주오는 테디의 차량을 발견하게 된다.
마치 치킨 게임이라도 하듯, 둘은 서로를 향해 고속으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알아볼 정도로 좁혀진 거리.
원래 미친놈은 미친놈을 알아보기 마련이다.
상대가 자신보다 더한 미친놈이란 것을 직감한 테디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먼저 운전대를 꺾었다.
“이, 이런 또라이 새끼!”
하지만 밸런스가 무너진 테디의 차량은 그대로 도로를 벗어나 전복되고 말았다.
뒤이어 강렬한 폭발음과 함께 거센 불길이 테디의 차량을 집어삼켰다.
그런데.
이든이 미처 몰랐던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테디가 도시의 가장 강력한 악당인 티토의 동생이었고, 동생의 죽음을 전해들은 티토가 자신의 가족을 살해하는 잔혹한 복수를 자행하게 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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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님?”
제작부장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 예.”
“잠시 쉬었다가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죠. 다들 커피도 한잔하고, 또 화장실도 다녀와야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자, 그럼 다들 20분 정도 쉬었다가 다시 리딩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썰물처럼 회의실을 빠져나가는 배우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제작부장이 다시 나를 향해 말했다.
“지금까지는 큰 무리가 없는 것 같죠?”
“예. 대신에 현장에서는 시나리오 순서대로 촬영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니, 배우들에게 각 씬마다 느낀 자신의 감정들을 잘 메모해두라고 해주세요. 초보 배우들은 특히 앞 씬과의 감정선을 연결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곤 하니까 말이죠.”
“알겠습니다, 감독님.”
잠시 후.
시나리오 리딩이 계속되었다.
나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실제 현장 촬영을 통해 만들어질 영화의 장면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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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든의 집.
이든이 경찰서로 출근한 사이 기관총으로 무장한 악당 티토 일행이 그의 집을 습격했다.
이 장면은 악당 티도의 악랄함과 잔혹함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다 죽여! 이 집안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살아남지 않도록!”
티토와 그의 일당들은 울부짖는 이든의 가족들을 하나하나 잔인하게 살해한다.
그리고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이든은 자신의 사랑하는 가족들이 처참하게 죽어있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으흑, 으흐흐흑.”
죽은 가족들을 끌어안고 절규하는 이든.
그리고 그는 결심한다.
자신의 가족을 죽인 티토 일당을 모조리 잡아 똑같이 잔혹하게 죽여 가족들의 복수를 하기로.
이 영화의 제목처럼 이든의 ‘Chase of revenge(복수의 추격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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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장장 세 시간에 걸친 시나리오 리딩이 모두 끝났다.
일부 수정이 필요한 대사 몇 개를 발견한 것을 제외하고는 별 무리 없이 리딩이 진행됐다.
이제 남은 것은 촬영 일정표 작성과 본격적인 촬영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다음 달 7일 정도로 잡죠. 크랭크 인 날짜를.”
나의 말에 모여 있던 간부급 스태프들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감독님.”
20.
영화 크랭크 인을 하루 앞둔 날.
사무실로 들어서던 촬영 스태프와 배우들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무실 한가운데는 커다란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갖가지 음식들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와! 잔뜩 차려진 이 음식들 좀 봐.”
“벌써부터 입에 군침이 도는데?”
“이게 다 뭐에요, 감독님?”
내가 빙긋 웃으며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별다른 일은 아니고요. 내일이 우리 영화 크랭크 인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고사(告祀)를 좀 지내볼까 해서요.”
“고, 뭐라고요?”
“고사요, GO-SA.”
고사.
전생에 내가 몸담고 있던 충무로에서는 촬영 시작을 앞둔 스태프들이 어김없이 이 고사란 것을 지냈다.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촬영이 끝날 것과 영화의 흥행을 기원하는 일종의 미신적 행위였다.
하지만 할리우드 영화인들에게는 이 장면이 무척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음, 고사는 일종의 촬영 시작 기념 파티라는 뜻이에요. 앞으로 최소 몇 달은 다들 고생해야 하니까, 그전에 내가 여러분들에게 푸짐한 식사 한 끼 대접한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하얀 피부의 미국인들을 위한 맞춤형 설명이었다.
그제서야 스태프와 배우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우리 감독님밖에 없어. 스태프들을 끔찍이도 생각하신다니까.”
“감사합니다, 감독님.”
“잘 먹겠습니다, 감독님.”
내가 스태프들에게 반농담으로 엄포를 놓았다.
“대신 술은 안 됩니다. 내일이 촬영 첫날인데, 다들 최상의 컨디션으로 임해야죠.”
“읔! 파티에 술이 빠지다니. 정말 아쉽군.”
“영화 촬영이 다 끝나면 내가 여러분 모두에게 제대로 된 술자리를 마련해줄게요. 그러니 오늘은 아쉽지만 콜라로 대신 합시다.”
“예, 감독님.”
그렇게,
스태프와 배우들은 한동안 웃고 떠들며 신나게 ‘고사를 빙자한 파티’를 즐겼다.
“감독님.”
분위기가 무르 익을 무렵, 영화의 주연을 맡고 있는 베니 스콧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아, 베니. 컨디션은 어때요?”
“아주 좋습니다. 내일부터 본격적인 촬영을 시작할 생각을 하니 설레기까지 하는걸요.”
“자동차 추격씬이 많은 만큼 다치지 않도록 항상 조심해야 해요. 사전에 약속된 동선을 벗어나면 대형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동안 충분한 리허설을 통해 동선을 완벽하게 맞추었으니까요.”
“내가 볼 때 베니는 타고난 액션 배우에요. 이번 영화를 발판 삼아서 할리우드 최고의 액션 배우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먼저 우리 영화가 대박이 나야 할 테고요, 하하.”
“우리가 열심히 영화를 만들면 관객들도 이를 분명히 알아 줄 겁니다.”
“그렇겠죠?”
물론이지.
내가 만들 <체이스 오브 리벤지>라는 영화는 이 시기 북미 영화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둔 <매드맥스>라는 영화의 상위 호환 버전이니까.
내 예상이 맞다면 아마도 거의 비슷한 시기에 개봉될 이 두 영화는 미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독창적인 세계관과 자동차 추격 액션이라는 새로운 영화 장르를 개척한 선구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게 될 것이다.
‘이미 내가 알고 있는 전생의 기억처럼 말이지.’
그리고 그렇게 할리우드식 고사를 끝으로 본격적인 영화 촬영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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