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 첫 영화 <체이스 오브 리벤지> (4) >
17.
프리 프로덕션(pre-production).
본격적인 영화 촬영에 앞서 진행되는 사전 제작 준비 작업을 말한다.
프리 프로덕션에서는 주로 시나리오 작성, 배우 캐스팅, 스태프 구성, 예산 계획 및 촬영 스케줄 작성 등과 같은 전반적인 영화 촬영 준비 작업이 이루어진다.
특히 이러한 준비가 얼마나 철저하게 이루어지느냐에 따라서 앞으로의 촬영이 원활하게 이루어질지, 그렇지 않을지가 결정된다.
실제 많은 영화가 프리 프로덕션의 단계에서 제작 자체가 무산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그만큼 이 단계가 어렵고 힘든 과정임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1977년 봄.
나는 영화 <체이스 오브 리벤지> 제작을 위한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 돌입했다.
이를 위해 할리우드의 인근에 ‘Film Kim’이란 이름의 작은 사무실도 열었다.
“오래간만이네요, 감독님. 이제 감독님이라고 불러도 되죠?”
금발 머리의 여성 하나가 사무실로 들어서며 나를 향해 인사했다.
이레나 샌들러(Irena Sendler).
텍사스 출신의 그녀는 앞선 <스페이스 워즈> 촬영 당시 예산 관리와 기타 서류 작업을 담당했었다.
그런 그녀의 뛰어난 업무 능력을 잘 알고 있는 나는 가장 먼저 그녀를 내 사무실로 영입한 것이다.
“편하게 불러요. 예전처럼 그냥 킴이라고 불러도 되고.”
“참 대단하세요, 감독님. 남들은 수십 년을 영화판에서 굴러도 영화 한 편 제작할까 말까인데, 감독님은 불과 몇 년 만에 그걸 이루셨잖아요.”
“그건 좀 더 지켜볼 일이죠. 지금껏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엎어진 영화가 한둘이 아니니까요.”
“근데 직원은 저 하나뿐인 거예요?”
“차차 늘려 가야죠. 연출팀, 제작팀, 촬영팀 직원부터 배우 섭외까지 해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네요.”
“조지 루이스 감독님께 도움을 좀 청해보세요. 루이스 감독님이 감독님 말이라면 깜박 죽는시늉도 하시는 사람이잖아요, 호호.”
“일단은 내 힘으로 한번 해보려고요. 죽이 되는 밥이 되든.”
“쉽지 않을 텐데......”
이레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제작이라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나리오 작성에서부터 스태프 구성, 배우 섭외에 이르기까지 해야 할 일이 무척이나 많았다.
그래서 제작사에서 별도로 감독을 고용해 감독은 오로지 촬영에만 전념하게 하고, 나머지 부수적인 일은 제작사의 체계적인 조직을 활용해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초보 감독일수록 그런 경향이 매우 컸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전생에서 수십 년을 영화판에서 구른 베테랑 영화인이 아닌가?
이 정도 경험이면 맨땅에 헤딩을 해도 골이 들어갈 판이었다.
“시나리오와 콘티는 이미 내가 다 준비해두었으니, 스태프랑 배우만 섭외하면 돼요. 예산 관련 문제는 이레나가 잘 처리해줄 거라고 믿고요.”
“그 점은 염려 푹 놓으셔도 돼요. 제가 얼마나 꼼꼼한 사람인지 감독님도 <스페이스 워즈> 촬영 때 보셔서 잘 아시잖아요.”
“하하, 그래서 내가 가장 먼저 이레나를 우리 사무실로 영입한 것 아닙니까? 대신 너무 타이트하게 예산을 관리해서 스태프들과 불필요한 마찰은 만들지 말아줘요. 스태프들이 밥값 약간 부풀리는 정도는 그냥 눈감아주란 뜻이에요. 영화판에서 일하는 사람들 대부분 워낙 박봉인지라, 그런 것까지 잡아내면 스태프들 사기가 떨어져서 오히려 촬영에 지장을 받을지도 모르니까요.”
“우, 역시 감독님은 여간내기가 아니라니까. 초짜의 탈을 쓴 완전 베테랑 감독이라니까.”
“하하. 그럼 난 연출팀 미팅이 있어서 이만 나가볼게요. 혹시 나한테 전화 오는 거 있으면 메모 좀 잘해두시고요.”
“네, 감독님.”
***
눈코 뜰 새 없을 정도로 바쁜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연출팀 미팅.
제작팀 미팅.
촬영팀 미팅.
미술팀 미팅.
미팅, 미팅, 미팅.
그러는 사이 텅 비어있던 ‘Film Kim’ 사무실도 하나둘 사람들로 채워지더니, 급기야 사무실이 비좁을 정도가 되었다.
‘이제 좀 영화 제작사다운 면모가 갖추어지게 되었군.’
하지만 문제는.
벌써 일주일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체이스 오브 리벤지>의 주연 배우가 될 ‘베니 스콧’에게서 연락이 오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안 되는데. 이 영화에는 베니 스콧 그 사람이 반드시 필요한데......’
전생에서 나는 베니 스콧이 출연한 영화를 매우 인상 깊게 본 경험이 있다.
건장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날렵한 액션.
제법 위험한 장면도 결코 대역을 쓰지 않는 투철한 직업 정신.
여기에 자신만의 독특한 캐릭터 창조 능력과 감정선까지.
이런 능력이 있었기에 그는 10년의 무명 생활을 지나 마침내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명배우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킴. 꼭 그 사람이어야 해?”
대본 연습에 몰두하고 있던 루브론이 나를 향해 물었다.
그는 이번 영화에서 악역인 폭주족 두목 ‘티토’ 역을 맡고 있었다.
“베니 스콧 말이야?”
“그래. 그깟 무명 배우 하나가 뭐 대수라고 그렇게 목을 매는 거야? 차라리 다른 유명 액션 배우를 섭외하거나 공개 오디션을 해서 다른 적당한 신인 배우를 뽑는 것이 낫지 않을까?”
“안 돼. 이번 영화의 주인공인 ‘이든’역은 반드시 베니 스콧 그 사람이 맡아줘야 해. 그 사람만큼 이번 역할에 잘 어울리는 사람은 절대 없을 테니까.”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킴 네가 그렇게 매달리는지 진짜 얼굴 한번 보고 싶네.”
“곧 보게 될거야. 그보다 루브론, 너 생각보다 잘 어울리는데?”
“뭐가?”
“악당 티토 역할 말이야. 역시 악역이 너에게 훨씬 더 잘 어울릴 것이란 내 예상이 맞았어.”
“읔! 내가 그렇게 험악하게 생겼었나?”
“악당이 꼭 험악하고 무섭게 생겨야 할 이유는 없어. 그건 일종의 고정관념이라고. 오히려 루브론 너처럼 유순하게 생긴 사람이 광기를 드러낼 때, 관객들은 더욱 공포를 느끼는 법이야.”
“그래?”
루브론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게 다 킴 네 덕분이야. 네가 미처 몰랐던 나의 배우로서의 또 다른 면을 찾아준 것 같아.”
전생의 경험 덕분이었다.
전생에서 수많은 배우를 지켜봐 온 덕분에 나는 배우가 가진 잠재능력과 그에 어울리는 배역을 찾아낼 수 있는 안목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나저나 베니 스콧인지, 베니 스팟인지 하는 이 자식! 우리 킴 감독님을 이렇게 초조하게 만들다니. 내 당장 달려가서 이 자식 멱살을 잡아끌고 올까 보다.”
루브론이 마치 악당 티토로 빙의한 양,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그 순간.
“초면에 멱살부터 잡는 건 좀 그렇지 않습니까?”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베니 스콧의 목소리였다.
“스콧 씨!”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베니 스콧이 이곳을 찾아왔다는 것은, 영화 출연 결심을 굳힌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감독님께서 아직 이든 역을 구하지 않았다면, 제가 그 역할을 맡아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여태 스콧 씨가 오기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는걸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동안 대본을 읽고, 어떻게 하면 이든라는 인물을 제대로 연기할 수 있을지 고민을 좀 했습니다.”
“캐릭터 연구를 했다는 말입니까?”
“예. 제가 준비한 이든의 모습이 감독님의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지만요.”
“일단 한번 보죠. 그렇다고 너무 부담가지지 마시고요.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함께 의논해서 채워나가면 되니까요.”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베니 스콧이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생에서 스크린을 통해 봤던, 전 세계 여성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그만의 매력적인 미소였다.
“앞으로는 편하게 베니라고 불러주십시오, 감독님.”
***
베니 스콧의 합류로 영화 <체이스 오브 리벤지>의 촬영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수 있었다.
아, 그전에.
이번 영화 촬영에 있어 또 한 명의 중요한 인물이 있다는 것을 깜박하고 갈 뻔했군.
그는 바로 할리우드의 유명 촬영감독, 아니 ‘앞으로 그렇게 될’ 로저 디킨스였다.
1949년생으로 올해 나이 33살인 로저 디킨스는 나중에 영국에서 기사 작위(CBE)까지 받을 정도로 뛰어난 촬영감독이다.
특히 그의 필모(filmography)만 살펴봐도 그가 얼마나 대단한 감독인지를 알 수 있다.
영화 파고(Fago),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007시리즈에 이르기까지, 그는 장르를 넘나들며 뛰어난 영상미를 보여줬고, 이에 많은 할리우드 감독들이 그와 작업하기를 원했다.
‘할리우드 최고의 촬영감독이라 불리는 로저 디킨스. 지금 그와 인연을 쌓아두면 앞으로의 영화 촬영에서도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 분명해.’
생각을 마친 나는 곧바로 로저 디킨스를 찾아갔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이방인이나 다름없는 낯선 동양인에게 결코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안하지만 나는 당신과 작업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 시간 낭비하지 말고 그냥 돌아가세요.”
로저 디킨스.
그와의 만남에서 처음 내가 들은 말이었다.
뭐, 이런 대접 한 두 번 받는 것도 아니고.
내가 가진 능력으로 설득하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지.
“감독님의 전작인 ‘파고’라는 영화, 아주 인상 깊게 봤습니다. 스릴러 영화에 걸맞는 긴장감 넘치는 화면 구도가 무척이나 제 마음에 들더군요.”
“이봐요, 킴. 미국이라는 나라,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할리우드는 몹시도 폐쇄적인 곳입니다. 영국 출신인 나조차도 할리우드에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기 힘든 것이 현실인데, 유색 인종인 당신이 이곳에서 영화로 인정을 받겠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 험난한 과정을 왜 내가 함께해야 합니까? 더군다나 난 내 이력을 몹시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일단 제 이야기를 끝까지 한번 들어보십시오. 그런 이후에도 저와 함께 작업할 의향이 없으시다면 미련없이 돌아가겠습니다.”
“......”
여전히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는 로저 디킨스.
하얀 피부를 가진 사람들은 늘 이런 식이다.
자신과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일단 적대감부터 가진다.
물론 이는 앞으로도 계속 내가 감내해야만 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디킨스 씨.”
내가 로저 디킨스를 설득할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혹시 스태디 캠(steadicam)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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