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머리 감독의 할리우드 정복기-9화 (9/145)

# 9 < 첫 영화 <체이스 오브 리벤지> (3) >

15.

루이스 필름 사무실.

내가 조지 루이스 감독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킴,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두 가지가 있어. 어떤 소식부터 듣고 싶어?”

“나쁜 소식이요.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는 말도 있으니까요.”

“나쁜 소식은 할리우드 대다수의 투자사가 킴의 영화에 대한 투자를 거절했어.”

“그렇겠죠. 제대로 된 필모(filmography)도 없는 젊은 신예 감독에게 덜컥 투자하기가 쉽지만은 않겠죠.”

“이유는 그게 다가 아니야.”

“그럼요?”

문득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곧바로 내가 말을 이었다.

“설마 제가 동양인이라서?”

“유감스럽지만 킴의 짐작이 맞아. 사실 이곳 할리우드 제작자들은 영화에 동양인 배우를 쓰는 것에 대해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어. 동양인 역할이 필요한 경우가 생겨도 백인 배우를 분장시켜 쓸 정도로 말이야. 배우를 쓰는 것조차도 이렇게 부담스러워하는데, 감독은 오죽하겠어? 이 때문에 시나리오를 보고 투자를 결심한 회사들도 감독이 동양인이라는 말을 드는 순간 곧바로 투자 결정을 번복했어. 동양인 감독이 만든 영화를 어떤 미국인이 보겠냐면서 말이야.”

“역시 그랬군요.”

“그래도 너무 실망하지 마. 아직 좋은 소식이 남아 있으니까.”

“뭐예요? 좋은 소식은?”

“좋은 소식은......”

조지 루이스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직접 킴의 영화에 투자하기로 했다는 거야.”

“예? 조지가 직접 내 영화에 투자할 생각이라고요?”

“그래. 솔직히 이번 <스페이스 워즈>는 반은 킴 네가 만든 것이나 다름없어. 킴이 영화 전반에 관한 조언과 세부적인 편집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결코 이 영화는 성공할 수 없었을 거야. 그런 의미에서 30만 달러 정도는 킴에게 투자해도 좋을 것 같아. 설사 킴이 이 돈을 전부 날린다고 해도 말이야.”

“정말 고마워요, 조지. 조지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꼭 좋은 영화를 만들게요.”

“그래. 킴은 내가 아는 그 어떤 사람보다 뛰어난 영화 제작 능력을 가지고 있어. 나조차도 부러울 정도로 말이야. 그러니 이번 영화도 반드시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조지, 제작비는 20만 달러만 지원해줘도 충분해요.”

“왜? 전에 예상 제작비가 총 30만 달러라고 하지 않았었나?”

“10만 달러는 다른 곳에서 이미 투자를 약속 받았거든요.”

“나보다 먼저 킴에게 투자를 한 사람이 있다고? 그게 누군데?”

“우리 아버지요, 흐흐.”

“읔! 나보다 킴을 더 잘 아는 사람이 투자를 했군.”

조지 루이스가 다시 말했다.

“어쨌거나 이번 일은 킴에게 아주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거야. 이번 영화를 통해 킴의 영화 제작 능력을 사람들에게 제대로 한번 보여주라고. 그럴 수 있겠지?”

“물론이죠.”

“자, 그럼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니까, 담당 직원을 불러 정식으로 투자 약정서를 작성하도록 하지. 뭐든 확실한 것이 좋은 거니까.”

“예, 조지.”

잠시 후.

루이스 필름과 내가 정식으로 영화 투자 계약서를 작성했다.

계약 내용은,

1. 영화 <체이스 오브 리벤지>의 제작비는 루이스 필름이 20만 달러, 내가 10만 달러를 부담한다. 단, 추가 제작비 발생 시 5만 달러 이내에서 루이스 필름이 부담한다.

2. 영화 수익의 2/3는 루이스 필름이, 1/3은 내가 갖는다. 단, 추가 제작비 발생 시 5만 달러 이내는 별도의 수익률 조정을 하지 않고, 5만 달러를 초과 시에만 재조정한다.

3. 영화의 판권은 루이스 필름이, 저작권은 내가 갖는다.

4. 영화의 캐릭터 및 상품 판매 수익은 전액 내가 갖는다.

“자, 그럼 이제 제작비도 확보됐으니, 본격적인 영화 촬영 준비를 시작해볼까?”

16.

할리우드의 한 영화제작사.

젊은 백인 남자 하나가 풀 죽은 얼굴로 영화사 문을 나서고 있었다.

“휴, 또 오디션에서 미끄러졌군. 이번엔 왠지 잘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말이야.”

땅이 꺼질듯한 한숨을 내쉬는 남자.

2년 차 무명 배우 베니 스콧(Benny Scott)이었다.

호주 출신인 그는 유명 영화배우를 꿈꾸며 야심차게 미국으로 넘어왔다.

하지만 할리우드의 벽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았다.

지난 2년 동안 수십 차례 오디션에 도전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물을 먹고 말았다.

“쳇, 나도 호주에서는 꽤 먹어주는 얼굴이었는데, 확실히 할리우드는 다르군. 나 같은 놈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잘생긴 놈들이 오디션장에 아주 즐비해.”

가게의 쇼윈도에 자신의 얼굴을 이리저리 비춰보는 베니 스콧.

눈썹을 좌우로 올렸다 내렸다,

인상을 썼다, 풀었다를 반복하는 모습은 마치 오디션장에서는 미처 다 보여주지 못한 자신의 표정 연기의 한을 푸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베니 스콧 씨?”

갑자기 낯선 남자 하나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왔다.

검은 머리의 동양인.

하지만 그는 원어민 못지않게 몹시도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체구 또한 백인인 자신보다 훨씬 컸다.

“그렇긴 한데, 누구시죠?”

“다행이군요. 혹시나 호주로 다시 돌아간 것은 아닌가, 걱정했는데.”

“나를 잘 아시나 보군요. 제가 호주 출신이라는 것도 알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처음 뵙겠습니다, 스콧 씨. 저는 이곳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제작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잠시 스콧 씨와 이야기를 좀 나눴으면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동양인 남자가 베니 스콧에게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 Film Kim / MD James Kim >

‘Film Kim? 처음 들어보는 영화사인데? 게다가 나와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 이런 젊은 남자가 영화감독이라니. 혹시 이 동양인 놈이 나한테 사기 치려고 접근한 거 아니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명함과 눈앞의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는 베니 스콧.

그때까지만 해도 베니 스콧은 전혀 알지 못했다.

눈앞에 서 있는 이 동양인 남자가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게 될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

할리우드의 한 식당.

내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백인 남자 하나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군.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대스타인 베니 스콧을 이렇게 눈앞에서 보게 되다니 말이야. 그것도 영화배우로 정식으로 데뷔하기 전의 아주 젊은 시절의 모습을.’

내 속마음을 알 길이 없는 베니 스콧이 다소 민망하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제 얼굴에 뭐 묻었습니까?”

“예?”

“아까부터 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어서요.”

“아, 죄송합니다. 스콧 씨 외모가 제가 구상하고 있는 배역이랑 너무나도 잘 어울려서 말이죠.”

“그나저나 어떻게 절 알게 된 것입니까? 전 누가 이렇게 직접 찾아올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 아닌데.”

“우연히 다른 영화사에 보낸 스콧 씨의 프로필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걸 본 순간 스콧 씨를 무조건 제 영화에 캐스팅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고요.”

거짓말이었다.

전생의 기억 덕분에 나는 애초부터 베니 스콧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꽤 오래전부터 그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있었다.

‘베니 스콧. 10년이 넘는 무명 생활을 거치며 이란 액션 영화로 명실공히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배우로 자리 잡게 되지. 하지만 나를 만난 이상 베니 스콧 당신은 그 긴 무명 시절을 겪을 필요가 없어. 이번에 내가 만들 영화 <체이스 오브 리벤지>로 당신은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될 테니까. 물론 영화감독으로서의 나의 명성도 마찬가지고.’

할리우드의 명배우 베니 스콧.

그는 지금 내가 구상하고 있는 영화 <체이스 오브 리벤지>를 완성 시켜 줄 화룡점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실례지만 감독님이 찍으려고 하는 영화가 어떤 영화입니까?”

“<체이스 오브 리벤지>라는 액션 영화입니다.”

“액션 영화라......”

베니 스콧이 살짝 구미가 당긴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애초부터 액션 배우가 되는 것이 꿈이었기 때문이었다.

“영화 줄거리는 여기 있는 시나리오를 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특히 영화의 핵심 장면 대부분이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이용한 추격신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추격신요?”

“예. 저는 이 추격신을 스테디캠을 이용한 핸드헬드 기법으로 기존 영화보다 훨씬 더 사실적이고 현장감 있게 그려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핸드헬드 기법이란 손으로 카메라를 직접 들고 촬영하는 기법을 말한다.

이 기법은 영화의 사실감과 현장감을 극대화시켜 준다.

처음 영화용 카메라가 발명되었을 때는 무게 때문에 이러한 기법의 촬영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후 작고 가벼운 핸드헬드 카메라가 개발되었고, 이는 주로 기록 영화나 진위 영화 작가들에 의해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문제는 핸드헬드 기법을 쓰면 카메라가 많이 흔들려서 화면이 몹시도 불안정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꽤 오랜 연습 과정을 통해 배우와 촬영팀 간의 호흡과 동선을 정확하게 맞추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현장감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한 촬영 기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기, 감독님. 저는 배우이지, 영화 촬영 기술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지금 감독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스콧 씨를 이해시키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이런 문제들은 저나 촬영팀이 알아서 할 문제이니까요. 그런데도 제가 스콧 씨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체이스 오브 리벤지>라는 영화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촬영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관객들에게 신선함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흐음.”

여전히 못미더운 표정을 짓고 있는 베니 스콧.

그로서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영화사에,

감독마저 동양인이었으니 말이다.

정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내가 가진 비장의 무기를 꺼내는 수밖에.

“스콧 씨 혹시 최근에 개봉한 <스페이스 워즈>란 영화 보셨습니까?”

“물론입니다. 지금 미국에서 <스페이스 워즈>를 보지 않은 사람을 찾기가 더 힘들걸요?”

“그 <스페이스 워즈>의 제작에 제가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예? 감독님이 <스페이스 워즈> 제작진의 일원으로 참여하셨다고요? 그게 정말입니까?”

내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혹시 시간 되시면 오늘 극장에 가서 <스페이스 워즈>를 다시 한번 더 관람하십시오. 그리고 영화의 끝에 나오는 엔딩 크레딧을 끝까지 유심히 살펴보세요. 그러면 거기서 아주 큼지막한 제 이름을 찾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 그런......”

베니 스콧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의심들.

하지만 <스페이스 워즈>의 엔딩 크레딧에 적혀 있는 내 이름을 보는 순간 그의 의심은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현재 <스페이스 워즈>는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거의 신화적인 작품으로 추앙받고 있을 정도니까.

“여기 시나리오가 있으니 돌아가셔서 한번 검토해보시고요, 출연 결심이 서시면 아까 제가 드린 명함에 적힌 곳으로 연락을 주십시오.”

“......”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는 베니 스콧을 향해 내가 다시 말했다.

“저는 이번 영화 작업을 반드시 베니 스콧 씨와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스콧 씨가 꼭 저에게 연락해 오기를 진심으로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베니 스콧,

그는 분명 내가 만들 영화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무명 배우인 그로서는 어차피 손해 볼 것이 없는 조건이었고, 또한 이번 기회가 아니면 자신의 고향인 호주로 다시 돌아가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불과 30만 달러의 제작비로 1억 달러의 흥행 수익을 올려 <제작비 대비 역대 2위의 흥행 수익을 올린 영화>, 이번 생에서 그 타이틀을 차지하는 주인공은 바로 내가 되고 말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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