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머리 감독의 할리우드 정복기-8화 (8/145)

# 8 < 첫 영화 <체이스 오브 리벤지> (2) >

“다른 건 몰라도......”

조지 루이스 감독이 나를 향해 말했다.

“세계관 하나는 꽤나 참신하군. 지금까지 멸망 이후의 세계를 다룬 영화는 아예 없었으니까 말이야.”

“실제 촬영에서는 펑크 느낌의 서부극 스타일로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이끌어 갈 생각입니다.”

“나쁘지 않군. 근데 가장 큰 문제는 시나리오의 내용이 너무 빈약하다는 거야. 악당을 쫓는 경찰의 복수 활극, 이 한 줄로 영화의 모든 스토리가 설명되지 않나?”

“일부러 시나리오를 그렇게 썼습니다.”

“일부러?”

“예. 이 영화는 오락 영화이고, 이런 류(類)의 영화에서는 굳이 복잡한 스토리로 관객들의 머리를 아프게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관객들이 시원하게 보고 즐기며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영화, 이것이 이번 영화의 기본 컨셉입니다.”

작품성 있는 영화.

전생에서 만들어 볼 만큼 만들어봤다.

하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 이유는 내가 영화는 기본적으로 대중문화의 한 장르라는 점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대중문화는 소비지향적 문화이다.

따라서 비싼 돈 주고 직접 극장까지 찾아온 관객들에게 예술 작품을 들이밀며 고민과 고뇌를 강요하는 건 감독의 오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예술 작품은 미술관이나 전시관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래서 결심했다.

이번 생에는 철저하게 대중성에 기반을 둔 영화만을 만들기로.

그래서 전 세계의 모든 사람이 내가 만든 영화를 보면서 웃고, 즐기고, 기뻐하고, 때론 눈물을 흘리도록 만들겠다고.

“흐음.”

조지 루이스 감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만 만들면 의외의 반응을 불러올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제가 최선을 다해 만들어보겠습니다. 그러니 감독님께서는 혹시 저에게 소개해줄만한 투자자가 없는지 한번 찾아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래. 일단 내가 적당한 투자자를 물색해보도록 하지. 하지만 그들을 설득하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을 거야. 그들은 나처럼 킴 너의 연출 능력을 직접 경험해보지 못했으니까 말이야.”

14.

조지 루이스 감독과 헤어진 후,

모처럼 만에 아버지가 운영하는 슈퍼마켓을 찾았다.

그런데.

당연히 가게를 지키고 있어야 할 아버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대신 일전에 몇 번 본적이 있는 아버지 친구분이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어, 아저씨.”

“도훈이 왔구나.”

“아버지는 어디 가고 아저씨가 가게를 보고 계시는 거예요?”

“네 아버지 극장 갔다.”

“극장이요?”

“그래. 네 아버지 요즘 사흘이 멀다하고 극장을 찾잖냐. 도훈이 네가 제작에 참여한 영화 <스페이스 워즈>를 본다고.”

“예? 아버지가 <스페이스 워즈>를요?”

“그래.”

“그 영화는 아버지가 보실 만한 영화가 아닌데......”

“네 아버지가 어디 영화 보러 극장 갔겠냐? 영화의 말미에 나오는 도훈이 네 이름 보러 가는 거지.”

“......”

“지금 네 아버지, 세상을 다 가진 사람 마냥 아주 기분 좋아 죽으려고 한다. 도훈이 네가 세계적인 영화 <스페이스 워즈>에서 몹시도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 덕분에 영화에도 이름이 올랐다고 말이야. 요즘 네 아버지가 동네방네에 하도 떠들고 다녀서, 여기 한인 타운에서 도훈이 네가 그 영화 제작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란다.”

“아버지도 참. 그래서 아버지는 언제 오신대요?”

“허,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아버지 친구가 턱으로 가게 출입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침 저기 오네, 네 아버지.”

출입문을 열고 들어오며 아버지가 나를 향해 말했다.

“도훈이 왔냐?”

“아버지 <스페이스 워즈> 보러 극장 갔다 오시는 길이라면서요?”

“아무렴. 우리 아들이 만든 첫 영화인데, 이 아버지가 안 볼 수 없지.”

“제가 만든 게 아니라, 제작진의 일원으로 참가했을 뿐이에요.”

“그게 그거지. 영화가 어디 감독 혼자 만드는 거냐? 스태프들이 다 같이 힘을 모아서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이지. 그러니 이번 영화도 네 영화나 다름없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영화 한 편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감독을 중심으로 수많은 스태프가 협력해서 많게는 몇 년 동안 고생해야 한다.

따라서 <스페이스 워즈>와 같은 대작 영화 제작에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영화 제작자로서 나의 이력은 꽤 가치 있게 평가될 것이 분명했다.

“마침 잘 왔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도훈이 너한테 할 말이 있었는데.”

“예? 갑자기 무슨 말요?”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오래간만에 우리 근사한 곳에 가서 밥이나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도훈이 너 아직 점심 안 먹었지?”

“그렇긴 한데, 아버지 가게 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찬수 있잖아, 찬수.”

박찬수.

아버지 친구 이름이었다.

“찬수 자네, 내친김에 가게 좀 더 봐줘. 나 나가서 도훈이랑 점심 좀 먹고 올 테니까.”

“아, 나 원. 내가 무슨 이 집 머슴이야? 심심하면 나 더러 가게 봐달라고 하게. 그럴 거면 아예 나한테 일당을 줘, 일당을. 그럼 나도 군소리 안 하고 봐줄 테니까.”

“우리 사이에 일당은 무슨. 내 이따 저녁에 대포 한 잔 쏨세.”

“대포는 무슨. 야간 영업해야 한다는 핑계 대면서 또 구렁이 남 넘어가듯 슬쩍 넘어갈 거면서.”

“오늘은 안 그래. 그러니 가게 조금만 더 봐줘.”

“알았어, 이 친구야. 가게 걱정일랑 하덜말고 가서 오래간만에 아들이랑 진하게 회포나 풀고 와, 흐흐.”

***

잠시 후, 가게 인근에 위치한 한인 식당.

아버지와 내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떠냐? 음식은 괜찮았냐?”

“네. 오래간만에 한식을 먹어서 그런지, 꿀맛 같아요.”

“자식. 어쩐지 밥을 두 그릇이나 먹더니.”

“근데 아버지, 아까 하실 말씀이 있다는 게 뭐예요?”

“아, 그거......”

아버지가 통장 하나를 내 앞에 내려놓았다.

“뭐예요, 이게?”

“보면 모르냐, 통장이지.”

“그게 아니라 갑자기 왜 이걸 저에게 주시냐고요.”

“작년에 네가 나한테 그런 말을 했었지? 여윳돈 있으면 20세기 폭스사 주식이나 좀 사두라고. 지금 촬영 중인 <스페이스 워즈>가 히트치면 폭스사 주식도 덩달아 크게 오르게 될 거라면서.”

“설마, 아버지......”

“그래. 네 말대로 폭스사 주식을 좀 사두었다. 그런데 진짜 오르더구나. 그것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언제는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며 죽어도 안 살 것처럼 하시더니.”

“꼭 돈을 벌고 싶어 산 것은 아니다. 네가 그 영화에 참여했다는 말을 듣고, 영화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거야. 원래 일이란 것이 잘 될 거라고 믿으면 진짜 잘 되고, 안 될 거라고 생각하면 또 이상하리만치 안 되는 법이니까.”

“아, 아버지.”

“여윳돈이 많이 있었으면 더 많이 벌었겠지만, 너도 알다시피 아버지가 경제적으로 그렇게 여유 있는 사람은 아니잖냐. 그래도 생각보다 많은 수익이 났으니 한번 확인해봐라.”

내가 아버지가 준 통장을 열어보았다.

10만 달러.

투자금과 수익금을 합쳐 총 10만 달러가 통장에 예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 이걸 왜 저에게 주시는 거예요?”

“너 영화 만들 거라고 하지 않았냐? 그것도 네 이름을 건 영화를. 그러려면 돈이 제법 필요할 것이고, 그래서 내가 이 돈을 너에게 주는 것이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아버지. 영화는 투자사에서 투자를 받아 제작하면 돼요. 그러니 이돈은 그냥 아버지가 가지고 계세요.”

“아니다.”

아버지가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이 돈, 내가 오십 평생 살면서 처음으로 땀 흘리지 않고 벌어 본 돈이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돈을 벌고 나니, 무척 허무한 생각이 들더구나. 돈이란 것이 이렇게 쉽게 벌리기도 하는 것인데, 나는 왜 그동안 그 고생을 해가면서 돈을 벌었나 하는. 그래서 그냥 이 돈 너 주고, 나는 나의 방식대로 열심히 땀 흘려 돈을 벌기로 했다. 그래야 지금까지의 내 인생이 헛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야.”

“아버지......”

돈.

많은 사람이 인생을 오직 이 돈을 쫓으며 살아간다.

사실 알고 보면 살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인데, 다들 이를 망각한 채로 돈을 벌기 위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아버지는 지금 그런 삶을 거부하고 있다.

여태 그래왔듯이 스스로 땀 흘리며 돈을 버는 과정, 그 과정 자체를 인생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려는 것이다.

그런 아버지의 삶을,

나는 존중해 드리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제가 아버지를 봐서라도 꼭 좋은 영화 만들게요.”

“도훈이 너 내가 가장 기쁜 것이 뭔 줄 아냐?”

“글쎄요.”

“수많은 백인이 극장에서 ‘킴’이라는 네 이름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자기들이 가장 잘난 인종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백인들이 네 이름이 걸린 영화를 보며 웃고 울고 한다는 생각을 하니, 아들이지만 도훈이 네가 무척 자랑스럽기 그지 없구나.”

“아버지도 참, 그거 너무 꿈보다 해몽이 좋은 거 아니에요? 대부분의 사람은 <스페이스 워즈>를 조지 루이스 감독이 만든 영화로만 알고 있지,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나 겨우 등장하는 제 이름에는 하등 관심이 없다고요.”

“인마, 인생은 원래 해석하기 나름인 거야. 파란 유리를 통해 보면 세상이 파랗게 보이는 법이고, 빨간 유리를 통해 보면 세상도 빨갛게 보이는 법이라고. 그러니 난 내 편한대로 생각하고 살란다.”

“근데, 아버지......”

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백인들의 나라인 이 미국을 영화로 정복할 수 있을 것 같다고요.

아니, 미국 뿐만이 아니라 스크린이 있는 전 세계의 모든 나라를요.

“자식이 불렀으면 말을 해야지, 그래서 뭐?”

내가 아버지를 향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흐흐.”

“사내자식이 싱겁기는. 그보다 밥 다 먹었으면 같이 가서 맥주나 한 잔 하자.”

“맥주요? 이 벌건 대낮에요?”

“뭐 어때. 낮에는 술 먹으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냐?”

“가게는 어떻게 하시고요?”

“가게?”

아버지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찬수 있잖아, 찬수.”

“......”

불쌍한 찬수 아저씨.

오늘 오후 내내 아버지 슈퍼마켓을 지키게 되겠구나.

***

그 시각.

할리우드의 유명 영화사 중의 하나인 20세기 폭스사.

조지 루이스 감독이 로렌스 해네만 사장을 만나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오, 조지. 지금 <스페이스 워즈>가 연일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소. 오죽하면 뉴스에서조차 우리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다룰 정도이니, 하하하.”

“지금 관람료 수익이 1억 달러를 넘었다고요?”

“예. 이제 곧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서도 개봉이 시작될 예정이니, 못해도 그 두 배, 아니 세 배의 수익은 너끈히 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잘 됐군요. 그나저나 예전에 제가 보내드린 시나리오는 한번 검토해보셨습니까?”

“조지가 특별히 부탁해서 내 직접 한번 검토를 해봤는데, 시나리오가 생각보다 괜찮더군요. 제작비도 30만 달러면 큰 부담도 없고.”

“그럼 한번 투자를 해보시겠습니까?”

“물론이죠. 근데 메가폰을 잡게 될 사람은 누구입니까? 설마 조지 같은 거물 감독이 이런 저예산 영화를 직접 지휘할 리는 없을 테고.”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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