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머리 감독의 할리우드 정복기-2화 (2/145)

# 2 < 1975년 미국 할리우드, 그리고 전생(轉生) (2) >

3.

평생을 영화판에서 뒹굴면서 나는 수많은 시나리오를 접해 왔었다.

그중에는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시기, 다른 사람의 몸에 빙의한 주인공을 소재로 다룬 영화들도 꽤 있었다.

그런데.

그게 내 이야기가 될 줄은 정말이지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직도 믿기지는 않지만,

교통사고를 당한 직후 다시 눈을 떠보니 나는 50년 전의 과거, 그것도 전혀 다른 인물이 되어 있었다.

1951년생 김도훈.

영어 이름은 제임스 킴(James Kim).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넘어온 유학생.

이것이 내 두 번째 인생의 주인공이었다.

‘그래, 좋아. 내가 정말로 전생이란 것을 했다 치자. 그런데 왜 하필 이 김도훈이라는 사람인 것이지?’

내 몸의 원래 주인인 김도훈과 나는 전혀 접점이 없는 사이였다.

살던 시기도, 살던 장소도, 하다못해 외모나 이름까지도.

다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도 나처럼 영화감독을 꿈꾸는 영화인의 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비록 지금은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는 무명의 단역 배우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목표 의식이었다.

‘앞으로의 내 목표는 이곳 할리우드를 넘어 전 세계 영화계를 주름잡을 정도로 유명한 영화감독이 되는 것!’

이는 전생에서 못다한 내 꿈을 이루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나의 꿈이 완전히 허황된 것만은 아니었다.

전생에서 나는 무려 30년이 넘는 세월을 영화계에 몸담아 온 사람이다.

따라서 영화적 지식이나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전혀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향후 세계 영화계의 판도를 명확히 알고 있다는 점이다.

앞으로 어떤 영화가 히트를 치게 될지.

무슨 장르가 유행을 하게 될지.

어떤 배우가 대세가 될지, 등등.

내가 가진 <전생의 기억>.

이는 나를 그 어떤 감독보다 유명하게 만들어줄 훌륭한 자산이기도 했다.

“어딜 그렇게 쏘다니다 오는 게냐?”

집으로 들어서는 나를 향해 중년의 남자가 도끼눈을 뜨며 물었다.

내 생물학적 아버지 김판석이었다.

내 아버지는 소위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온 이민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삶은 결코 녹록지만은 않았다.

젊은 시절 그는 사탕수수 농장, 광산 등지를 전전하며 백인 고용주들에게 엄청난 혹사를 당했다.

그러다 나이 50이 넘어서야 겨우 LA 한인타운에 자리를 잡고 나름 번듯한 슈퍼마켓을 열 수 있었다.

그때의 경험 때문인지 아버지는 미국 사회, 특히 백인들에 대한 적개심이 강했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슈퍼마켓의 계산대 아래에 항상 커다란 장총이 비치되어있는 것도 그 이유 중의 하나였다.

“또 쓰잘데기 없이 그 영화판인지 뭔지 하는 곳을 기웃거리다가 온 거냐? 그럴 시간 있으면 차라리 학교 복학해서 다시 공부나 시작해. 그것도 싫으면 아버지 가게에 나와서 일이나 돕던가.”

이전 생에서도 그랬다.

내가 처음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했을 때, 당시 아버지도 저런 뉘앙스의 말씀을 하셨다.

물론 그때는 아버지의 말이 맞았다.

나는 결국 실패한 퇴물 감독이 되고 말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모 영화 대사처럼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왜냐하면 지금 나에게는 <전생의 기억>이라는 비장의 무기가 있기 때문이다.

“저기, 아버지.”

“왜?”

“저도 이제 성인이에요. 제 앞가림 정도는 스스로 할 수 있는 나이라고요.”

“그런 놈이 허구한 날 아비에게 손이나 벌리는 게냐? 그 영화인지 뭔지 한답시고, 네가 꼬챙이에서 곶감 빼 먹듯이 이 아비 주머니에서 돈 가져간 것이 어디 한두 푼이냐고.”

내가 노년의 기억을 가지고 전생을 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런 아버지의 말에 분명 화가 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퉁명스러운 저 아버지의 말투에 녹아있는 걱정과 자식에 대한 애정을.

“이젠 안 그래요, 아버지.”

“뭐?”

“이제 더 이상은 아버지에게 손 안 벌리겠다고요. 그러니 제가 하고자 하는 일에 반대만 하지 말아 주세요. 조금만 더 저를 믿고 기다려주시면 제가 꼭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는 아들이 될게요.”

“어이구, 이놈아. 내가 지금 정말로 돈 때문에 이러는 줄 아느냐?”

아버지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여긴 미국 땅이다. 내가 오랫동안 겪어봐서 아는데, 미국 사회에서 동양인이 뭔가를 이루어내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겉으로는 기회의 땅이 어쩌고, 인종의 용광로가 어쩌고 하지만, 세상 그 어떤 곳보다 인종차별이 심한 곳이 바로 이 미국이라는 나라야. 그런 곳에서, 뭐? 영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마라. 콧대 높은 백인들은 절대 우리 같은 동양인을 인정하려 들지 않을 게다.”

“그렇지 않아요, 아버지.”

“뭐?”

“예전에는 할리우드가 백인들 중심으로 돌아갔지만, 최근에는 많이 달라졌어요. 특히 브루스 리(이소룡)의 영화가 미국 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되면서 동양적 세계관을 도입한 영화를 만드려는 할리우드 영화사들도 꽤 늘어났다고요.”

사실이었다.

1970년대 혜성 같이 등장한 브루스 리의 영화는 당시 할리우드 영화계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특히 미국의 대형 영화사 ‘워너 브라더스’ 사에서 배급을 맡은 <용쟁호투>는 미국에서만 2,500만 달러, 전 세계적으로는 9,000만 달러라는 전무후무한 흥행기록을 세웠다.

이로 인해 할리우드 영화계에서는 일명 ‘동양 신드롬’이라 불릴 정도로 동양 문화에 대한 관심과 이를 영화에 접목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그래서, 그 영화감독인지 뭔지를 기필코 하겠다는 거냐?”

“예.”

“네 생각이 정 그렇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 자기 하고 싶은 건 하고 살아야겠지. 하지만 말이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여긴 백인의 나라다. 동양인들이 살아가기에는 결코 쉽지 않은 곳이란 뜻이야. 그러니 네가 정말로 뭔가를 이루고 싶다면 그들보다 열 배, 아니 백배는 더 노력해야 할 거다.”

“저도 잘 알고 있어요, 아버지.”

“아버지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이야기해라. 동네 슈퍼마켓 사장이 도움이 되면 얼마나 되겠냐마는, 그래도 너보다 인생을 오래 산 선배로서 조언 정도는 해 줄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그럴게요, 아버지.”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나마 이해심이 넓은 새(?)아버지를 만났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지? 세계 최고의 영화판이라 불리는 이 할리우드를 씹어먹을 명감독이 되기 위해서 말이야.’

4.

“킴! 이른 아침부터 갑자기 우리 집에는 무슨 일이야?”

졸린 눈을 비비며 루브론이 나를 집안으로 안내했다.

아직 동도 제대로 트지 않은 새벽,

실례인 줄 뻔히 알면서도 이 시간에 내가 그를 찾아온 것은 어제 밤잠을 설치게 만든 한 가지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있잖아, 루브론. 얼마 전에 너랑 같이 엑스트라로 출연했던 영화 말이야......”

“우리가 출연한 영화?”

“그래. 내가 기억이 안 나서 그러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 영화에 출연하게 된 것이지?”

“읔! 겨우 그거 물어보려고 이 이른 새벽부터 우리 집을 찾아온 거야?”

“나한테는 아주 중요한 일이라서 그래.”

“그거 배우가 꿈인 나를 위해서 영화사에서 일하는 우리 아버지가 특별히 추천해 준 거잖아. 마침 영화에 동양인 엑스트라도 하나 필요하다고 해서 내가 너한테도 함께 출연하자고 제의를 한 거고.”

“그게 정말이야?”

“그래. 그날 네가 얼 타는 바람에 하마터면 나도 같이 덤탱이 쓰고 영화에서 짤릴 뻔했지만.”

“으, 그 점은 나도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루브론.”

“농담인데, 진심으로 받네. 평소의 킴 너답지 않게 말이야, 흐흐.”

“그보다......”

내가 다시 물었다.

“너 혹시 그 영화 연출을 맡고 있는 감독 이름이 뭔지 알고 있어?”

“당연히 알고 있지.”

“누군데?”

“조지 루이스라고, 꽤 젊은 감독이야. 올해 나이가 서른 살인가, 서른 한살인가 그렇다던데?”

루브론의 입에서 ‘조지 루이스’라는 이름이 나온 순간 내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역시나, 내 예상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어쩐지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인 것 같더라니. 역시 내가 생각했던 그 사람이 맞았어.’

조지 루이스.

영화인치고 아마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세계적인 명감독이자, 제작자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조지 루이스! 그는 무려 10편에 가까운 속편을 이어가며 전 세계적인 흥행 돌풍을 일으킨 영화 <스페이스 워즈(Space Wars)>의 아버지라 불리는 인물이지.’

<스페이스 워즈>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SF 장르의 영화였다.

물론 <스페이스 워즈>가 SF 영화냐, 아니냐를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있긴 했지만, 영화가 우주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으로 SF영화로 분류를 하곤 한다.

중요한 것은 이 <스페이스 워즈>란 영화가 개봉과 동시에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고, 이어지는 속편들 또한 그에 버금가는 인기를 얻었다는 점이다.

전체 관람료 누적 수익만 총 33조가 넘는다고 하니, 이 영화가 전 세계적으로 얼마나 큰 선풍을 불러일으켰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비디오, 책, 게임, 캐릭터와 소품 판매 등을 합치면 영화 하나로 가히 천문학적인 수익을 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지 루이스 감독의 <스페이스 워즈>라니! 이건 앞으로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엄청난 기회야!’

문제는 일개 엑스트라, 그것도 하찮은 동양인 신분으로 내가 어떻게 조지 루이스 감독의 눈에 드는가 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의 이목만 끌 수 있다면, 앞으로 그가 만드는 영화에 어떤 형식으로든 참여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조지 루이스 감독의 눈에 들만한 좋은 아이디어 말이야.’

내가 조지 루이스와 <스페이스 워즈>란 영화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려 애를 썼다.

이를 본 루브론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킴! 어디 불편해?”

“응?”

“아까부터 인상을 잔뜩 쓰고 있길래. 아, 너 혹시......”

루브론이 손가락으로 거실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화장실은 저기야. 똥 마려우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가서 해결해.”

“그런 거 아니거든.”

“그럼 왜 그렇게 잔뜩 인상을 쓰고 있는 건데?”

“그냥 좀 생각할 일이 있어서. 그보다......”

“응.”

“이번에 조지 루이스 감독이 찍고 있는 영화 제목이 <스페이스 워즈> 맞지?”

“맞아. 근데 사실 이 영화가 위험성이 좀 큰 영화이기는 해.”

“위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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