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머리 감독의 할리우드 정복기-1화 (1/145)

검은머리 감독의 할리우드 정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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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1975년 미국 할리우드, 그리고 전생(轉生) (1) >

1.

“X발......”

가슴이 터질듯한 답답함이 턱 밑까지 차오른 탓일까?

요즘 들어 술만 마시면 욕지거리가 입에서 절로 흘러나왔다.

영화 외길 인생 30년.

하지만 그 결과는 무척이나 참담했다.

이렇다 할 대표작 하나 없는 퇴물 감독으로 충무로를 맴도는 유령과 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내 처지가 이랬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처음으로 내가 만든 단편 영화는 한국 영화 최초로 칸 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했었다.

이 사실은 곧바로 언론의 큰 주목을 받았고, 그 결과 나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형 영화사들로부터 무수히 많은 러브콜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내가 제작한 영화는 모조리 흥행에 참패했다.

돌이켜보면 이는 모두 내 잘못이었다.

칸 영화제 수상으로 우쭐해진 나는 영화의 대중성보다는 작품성을 훨씬 중시하게 되었고, 이는 영화의 연출을 몹시 난해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는 내 영화가 대중들에게 외면받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김 감독, 영화의 작품성도 물론 중요하지만, 대중적인 측면도 좀 고려해야지? 결국 영화는 감독도, 제작자도, 비평가도 아닌 대중들이 보는 거잖아? 그러니 대중들의 니즈를 충족시켜줄 요소도 필요한 것이지.”

“김 감독은 다 좋은데 고집이 너무 센 것이 흠이야. 주변 사람들, 하다못해 같은 연출팀 직원들의 말은 좀 듣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그래서 김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뭔데? 이건 영화가 불친절한 수준을 넘어 완전히 외계어 수준이잖아? 제발 소중한 시간과 돈을 투자해서 김 감독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도 좀 배려하라고.”

주변 사람들의 이런 진심 어린 충고를 나는 철저히 무시했다.

독불장군처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영화를 만들었다.

‘내 영화가 실패한 원인은 연출 문제가 아닌 대중들의 무지(無知) 때문이야. 그러니 언젠가는 내 영화들이 빛을 볼 날이 올 거야. 반드시.’

하지만 이는 착각이었다.

나는 자기 세계에 갇힌 오만한 감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내가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었다.

충무로 내에서 영화감독으로서 나의 신뢰는 이미 바닥에 떨어질 대로 떨어진 지 오래였다.

그 결과 이제는 아무리 괜찮은 시나리오를 들고 가도 섣불리 투자에 나서는 영화사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여기에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전염병은 영화 산업 전반을 침체의 늪에 빠뜨리고 있었다.

‘딱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나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대중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완벽한 영화를 만들어 낼 수도 있을 텐데......’

하지만 이는 헛된 바람에 불과했다.

이미 영화감독으로서의 내 미래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내 걸음걸이마냥 완전히 갈 길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술에 잔뜩 취해 비틀거리며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 끼이이익!

- 쾅!

갑자기 웬 트럭 한 대가 빠른 속도로 달려와 순식간에 나와 충돌했다.

끔찍한 충격과 함께 내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더니, 이내 바닥에 털썩 내려앉았다.

“꺄아악!”

귓가에 울려 퍼지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

- 위용! 위용!

멀리서 들려오는 경찰차와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

긴급상황임을 알려주는 이러한 소리는 내 눈앞에 펼쳐져 있는 밤하늘과 이를 아름답게 수놓고 있는 별빛과는 무척이나 대조적인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후, 꼭 영화의 한 장면 같네......’

씁쓸한 웃음을 끝으로,

툭-

그나마 유지되던 나의 의식이 완전히 끊어졌다.

2.

“레디, 액션!”

몽롱한 의식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내 귓전을 때렸다.

그리고 이 음성은 이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바뀌어 갔다.

“컷! 컷! 거기 검은 머리 동양인!”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쏠렸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모여 있는 사람들 가운데 ‘검은 머리 동양인’은 나 한 사람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카메라 돌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으면 어떻게 하나? 다른 사람들 열심히 뛰는 거 안 보여?”

입에 침까지 튀겨가며 나를 힐책하는 남자.

금발 머리에 하얀 피부, 오똑한 콧날을 가진 영락없는 외국인이었다.

누구냐, 넌?

그리고 여긴 또 어디냐?

생각할 틈도 없었다.

금발 머리 남자가 다시 확성기를 잡고 ‘액션’을 외쳤기 때문이었다.

- 다다다다!

남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나 또한 영문도 모른 채 사람들을 따라 뛰기 시작했다.

안 그랬다가는 저 금발 머리가 나를 잡아먹으려 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컷! 오케이, 30분 정도 쉬었다가 다음 촬영갑니다.”

그제서야 내가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잘 꾸며진 세트장과 곳곳에 놓인 각종 소품들.

늘어선 카메라와 음향기기.

그 사이를 분주히 오가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복장의 사람들.

‘영화 촬영장?’

분명했다.

평생을 영화판에서 밥 먹고 살아온 내 눈으로 볼 때, 지금 이곳은 영화 촬영을 위해 만들어진 세트장임이 틀림없었다.

“헤이, 킴!”

갑자기 한 남자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을 붙여왔다.

“오늘 컨디션이 별로 안 좋아 보이는데, 무슨 일 있어?”

“......”

처음 보는 놈이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난 영어 울렁증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왜 내가 저 남자의 영어를 알아듣고 있는 거지?’

그러고 보니 아까 확성기를 들고 소리치던 금발 머리 남자가 했던 말도 영어였다.

단지 너무 자연스럽게 귀에 들려서 미처 영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갑자기 내 입에서 영어가, 그것도 원어민 수준의 유창한 영어가 흘러나온 것이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아, 내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이건 사실이었다.

난 분명 술 먹고 길 가다가 큰 트럭에 부딪혔으니까.

그런데 깨어난 곳은 병원이 아닌 낯선 영화 촬영장이었다.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응. 그래서 말인데......”

내가 남자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가 어디야?”

“오 마이 갓, 킴! 갑자기 이런 황당한 질문을......”

“이해 좀 해줘. 내가 후유증 때문인지, 사고 이후의 기억이 하나도 없어. 솔직히 네가 누군지 조차도 잘 모르겠어.”

“오, 지저스......”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남자가 나를 근처의 벤치로 데려갔다.

그리고는 몇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끝까지 듣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너무나도 황당하기 그지없는 내용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니까 지금 루비론 네 말은, 지금 이곳이 1975년 미국이고, 나는 부모님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온 한국인이란 말이야?”

“루비론이 아니라 루브론이야, 내 이름은. 나머지는 킴 네 말이 다 맞고.”

“말도 안 돼, 이건 정말이지 말도 안 돼는 일이라고!”

내가 황급히 세트장 한 켠에 있는 분장용 거울 앞으로 달려갔다.

루브론의 말에 따르면, 지금 현재 내 생물학적 나이는 그와 동갑인 24세.

다른 건 차치하더라도 일단 그것부터 먼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갑자기 내 주변에 일어난 이 황당무개한 일들을 조금이나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기에.

‘이럴 수가......’

거울 앞에 선 내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거울 속에는 이미 환갑을 훌쩍 넘긴 노년의 남자가 아닌, 20대 중반의 파릇파릇한 청년이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이게 진짜 나라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내가 손으로 얼굴 여기저기를 더듬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청년.

얼굴은 제법 잘생긴 편이었다.

키도 꽤 컸다.

주변의 덩치 큰 외국인들과도 별반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정말로, 이 젊은 청년이 정말로 나라고?’

거울 앞에 선 채로, 내가 몇 번이나 속으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이는 분명 나였다.

그랬다.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낯선 사람의 몸에 빙의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무려 50년 전의 이역만리 미국 땅에서 사는 한국 이민자 신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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